여러분 파리는 안전합니다! (1)
플로리앙의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탁자에 놓인 컵을 들어 올려 안에 든 차로, 다시 한 번 입술을 축인다.
계약 철마다 항상 미국인들의 돈에 대한 집착은 놀라울리만치 강하다고 느끼는 플로리앙이었다.
물론 사장님이 이번에 도입한 인센티브제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플로리앙도 이제는 그에 못지않게 성과에 집착하긴 하지만 말이다.
젠장. 사장님은 라부아지에 그 인간 말처럼 사탄이라도 되시는 건지 별 해괴한 급여제도를 만들어서는 일을 안 하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 놓으셨다.
일을 하면 할수록 돈이 복사가 된다고? 세상에 이걸 어떻게 참는담.
베르사유에서 일은 안하고 매일 사람을 이리저리 굴려먹을 궁리만 하시는 건가?
플로리앙은 계약서에 쓴 금액의 셋째자리 수를 조금 바꾼 후, 다시 한 번 맞은편에 앉은 미국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방금 전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그러면 이런 조건은 어떠십니까? 대신 다음 년도까지는 이번 계약 조건으로 합의하시는 걸로.”
미국인은 찬찬히 계약서 내용을 살펴본 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음··· 이 정도면 제게 대리를 맡긴 무역상들도 상당히 흡족해할만 하군요. 좋습니다, 플로리앙 씨. 내년까지 이삭의 민족에 우리 미국산 곡물을 독점적으로 대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쇼트 대사님!”
이삭의 민족 부사장, 알렉상드르 플로리앙은 주재프랑스 미국대사 윌리엄 쇼트의 말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윌리엄 쇼트와 알렉상드르 플로리앙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적힌 계약서가, 플로리앙에게는 마치 200 리브르짜리 지폐처럼 느껴졌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플로리앙 선생과는 말이 참 잘 통해서 좋습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계약서를 챙기는 플로리앙을 보고, 미국 대사가 말했다.
“하하, 저야말로 제퍼슨 대사, 아니 이제는 국무장관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제퍼슨 국무장관님이 미국으로 돌아가셨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만, 그분의 후임으로 윌리엄 쇼트 씨 같은 분이 오셔서 다행스러울 따름입니다.”
“하하, 제퍼슨 장관님 같은 분께 절 견주어 주시다니, 제겐 너무 과분하게 느껴지는 데요?”
“이런, 조지 워싱턴 대통령께 처음 임명을 받은 공직자치고는 너무 겸손하신 것 같습니다?”
몇 년 전만해도 어디어디 사장이니, 어디어디 공장주니 하던 사람들에게 지레 쫄던 자신이, 이제는 한 나라의 외교관마저 능숙하게 구워삶을 줄 알게 되다니.
플로리앙은 아직도 가끔 자신이 꿈을 꾸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쇼트 대사는 그런 플로리앙의 말에 꽤나 기분이 좋았는지 웃는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아, 날도 좋은데 좀 걸으시겠습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정원사 솜씨가 좋아서 말입니다. 한 번 보여드리고 싶군요.”
“허, 명색이 대사관인데 일반인인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우리 미국 곡물상들의 오랜 파트너인 이삭의 민족 부사장이나 되는 분에게 그 정도도 못해줄 리가요. 오히려 제가 플로리앙 씨를 박대한다면, 본국에 있는 무역상들에게 살해협박을 당하지 않을까 겁나는 걸요?”
“하하, 쇼트 대사님을 위험해지게 만들 수는 없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쇼트 대사의 뒤를 따라 대사관 밖으로 나서자, 5월 말의 파리가 내뿜는 훈훈한 기운에 화사해진 후원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 고용하셨다는 정원사 분 솜씨가 대단하신데요?”
“나쁘지 않지요? 우리 미국인들도 나름 유럽 사람들만큼 미적 감각이 있답니다.”
한참 서로 사교적인 말을 나누며 후원을 반쯤 구경했을 무렵, 윌리엄 쇼트 대사가 넌지시 말했다.
“요새 본국, 그러니까 미국에서 프랑스에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국왕 폐하도 바뀌시고, 많은 게 바뀌지 않았습니까.”
의회...라는 것도 생기고, 신분이라는 것도 법적으로 사라졌다. 물론 아직 어디어디 영주니 어디어디 자작이니 하는 귀족 나리들은 존재하지만 뭐, 사람이 법이 바뀐다고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뭐, 그것도 상당히 화제이긴 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지요.”
“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민주공화정말입니다.”
“···글쎄요. 전 현생을 살기도 바빠 정치와는 담을 쌓은 터라, 섣불리 답해드리기가 어렵군요.”
플로리앙은 고개를 틀며 말했다.
“하하,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부사장님께서 모시는 분이 현 정부의 재무총감이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 사장이라는 사람이 부사장한테 일을 다 맡겨놓고 밖으로 나도는 것도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음.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본인의 실언이었습니다. 우리 미국인들은 ‘공화정’이라는 말에 껌뻑 죽는 사람들이라 말입니다.”
하기야 왕이 없어 대통령인지 뭔지 하는 자리를 만든 미국인들 아닌가.
플로리앙은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헛기침을 했다.
“큼큼. 조금 당황했습니다.”
“하하, 외교관은 그 나라의 분위기를 항상 읽어야 하는 입장이니 이해해주십시오.”
후원의 끝에 다다르자, 윌리엄 쇼트 대사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좋은 일로 뵙길 기원하겠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하여간 정치인들이란.
***
- 미라보 의원님.
- 왜 그러시오. 총감.
- 어차피 지금 의회가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재무총감 일은 파리에서 처리해도 되지 않을까요.
- 딱히 상관없긴 한데...
- 의원님, 생각해보십쇼. 이렇게 서로 쌈박질만 하는 베르사유에 있다가는 능률도 바닥을 치지 않겠습니까? 원래 수험생들도 자기가 편한 곳에서 공부를 해야 제 실력이 나오듯, 저도 제 심신이 편한 곳에서 일을 해야 능률도 잘 오르지 않을까요?
- ···알겠소, 재무총감이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해보시오.
- 라파예트 사령관님?
- 또 무슨 이상한 소리하시려고 찾아오신 겁니까, 재무총감?
- 섭섭하네요. 누구는 라파예트 사령관 말대로 코르들리에인지 뭔지 하는 곳까지 가서 신신당부를 하고 왔는데, 그 사람을 이렇게 박하게 대하시다니.
- ···원하시는 게 뭡니까?
- 저 파리로 사무실 옮겨서 근무하면 안 될까요?
- 뭐, 그 정도야... 재무총감이 하고 싶은 대로 하셔도 될 것 같네요.
이 의자의 촉감. 이 책상의 질감. 그래 이게 우리 집이지.
인외마경 베르사유에서 니들끼리 지지고 볶던 말 던 알아서 해라, 난 파리에서 느긋하게 지내련다.
“아 편하다. 그래 역시 집이 최고 아니겠어.”
“···.”
“뭐야 절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플로리앙 씨.”
“아뇨, 사무실을 보고 집이라고 하시다니 드디어 사장님의 머리가 완전히 돌아버리셨나 싶어서 말입니다.”
“···플로리앙 씨, 제가 플로리앙 씨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상사를 둔 월급쟁이의 푸념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음 고된 일상 속 월급쟁이의 푸념이라, 그럴 수 있지. 그런 것도 없이 어떻게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
그러고 보니까 윤전기는 어떻게 됐더라.
“아 플로리앙 씨, 윤전기 건은 어떻게 잘 되갑니까?”
“사장님께서 그거 언제 물어보시나 했습니다. 요 며칠 간 기요탱 박사님과 영국인 기술자들이 달라붙어 만드시던데, 이제 하루에 3만 부 가량 찍어낼 만큼은 여유롭게 돌릴 수 있다고 합니다.”
짜릿해. 최고야. 21세기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역시 공돌이는 공돌- 하고 울 때까지 갈아야 제 맛이지.
그나저나 기요탱 박사님은 그렇다 치고, 영국인 기술자들 실력도 상당한가 보네? 이 참에 아예 우리 회사로 스카웃하고 싶을 정도야.
“혹시 그 영국인들 중에 우리 회사로 데려올 만한 사람은 없습니까?”
“···어디보자. 윌리엄 머독이라는 사람은 이미 제임스 와트 사 직원이라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만, 리처드 트레비식이라는 젊은 친구는 기껏해야 광산 기술자라 어떻게 이리저리 꼬셔보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아 나랑 동갑이라던 그 사람? 하긴 공돌이는 젊을수록 좋지. 그 만큼 많이 갈아볼 수 있다는 거니까.
“나쁘지 않네요. 오늘 일 끝나고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일단 그 쪽에 사람을 한 명 보내보겠습니다.”
음 좋아. 이제는 알아서도 척척 잘하시는 군.
“아, 사드 씨는 글 잘 쓰고 있습니까? 며칠 전에 한 번 혼내주긴 했는데.”
“글쎄요, 잡지사 쪽은 페시옹 씨가 이제 저보다 더 잘 알겁니다. 페시옹 씨!?”
플로리앙 씨의 부름에, 이런 저런 문서를 정리하던 페시옹 씨가 이쪽으로 달려와 말했다.
“예? 아 예! 부사장님. 부르셨습니까?”
“사장님께서 궁금하신 게 있으시답니다.”
나는 내게 눈을 돌리는 페시옹 씨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페시옹 씨, 잡지사 쪽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아, 일단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종합잡지 [포브스]는 내일 모레부터 발간을 시작할 예정이고, 그...생쥐스트 편집장과 사드 씨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그것’은 글피 쯤 발간 예정입니다.”
페시옹 씨는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몇 가지 사항을 내게 알려주었다.
좋아. 아주 좋아.
우리의 새로운 노다지, 잡지가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다니!
이 사장님은 너무나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에요!
“···사장님.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뭔가요, 플로리앙 씨?”
“대체 잡지 이름을 왜 [포브스]라고 지으신 겁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나 이름을 따온 곳이 있으신 겁니까?”
“왜냐니요. [포브스] 선정 ‘머시기 1위!’. 어감이 되게 좋지 않습니까?”
포브스 선정 세상에서 가장 착한 기업 1위, 이삭의 민족.
되게 멋이 살지 않나?
그리고 종합잡지면 무엇보다 [포브스]지.
플로리앙 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게 다시 물었다.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그러면 [막심]은 대체 왜 [막심]인 겁니까? 사장님 근처에 막심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왜냐니요. 성인잡지 [막심]. 얼마나 착착 입에 달라붙습니까?”
플레이보이는 너무 막 나가는 것 같고.
잡지 [막심]! 그래, 야시시한 건 [막심]이지.
대충 한 십년만 지나봐라, 길 가던 사람 붙잡고 ‘혹시 막심 아십니까?’하면 ‘모르면 영국 간첩이죠!’ 소리가 나올걸.
“···가끔은 말입니다. 사장님이 좀 이상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치 네로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네로? 그 로마를 태운 황제 네로 말하는 건가?
“아니 네로라니 그거 너무 하시네.”
“···일감 던지고 도망가시는 건 비슷한 것 같기도... 아, 아닙니다 사장님.”
···믿었던 페시옹 씨까지 그럴 줄이야.
“그러면 두 분은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다가 우리 잡지 좀 갖다 팔 방법 좀 고안해 보세요. 이 네로는 이만 쉬러 갈 테니까.”
내 말에, 플로리앙 씨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 뭐냐. 남이 날 싫어하면 그 싫어할만한 이유를 만들어주라고 하지 않았나.
달게 받으십시오 휴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