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위정자 (6) (76/341)

위정자 (6)

“10억 리브르를 전액 탕감이라... 사람들이 들으면 반란을 일으킬 법한 금액 아닙니까?”

“그 정도 돈은 제후 두엇을 비틀어 짜면 나올 돈입니다. 총감 각하.”

내 말에도 괴테는 서글서글 웃어넘기며 답할 뿐이었다.

젠장, 어떡하지.

저 미끼. 너무 맛있어 보여.

“제가 뭘 해드리면 됩니까?”

나는 입술을 한참 잘근잘근 씹어대다가 괴테에게 말했다.

“곧, 새로운 카이저를 선출하는 제후회의가 열릴 예정입니다. 퀼른 선제후께서는 그곳에 기욤 총감 각하를 초대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니까 제후들과 귀족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날 던져놓으시겠다 그겁니까?”

“던져놓기만 하다뿐일까요. 연설도 해주셔야겠습니다.”

허? 그랬다가는 내 가슴팍에 총알구멍이 생기겠다. 아니 그 전에 험상궂은 사각턱,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나한테 결투를 신청하겠네.

웬만한 거면 꾹 참고 하겠는데 이건 그냥 지옥불 위를 걸어가라는 거랑 뭐가 다르냐?

“안하겠습니다.”

“···예?”

괴테는 내 단호한 말에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만약 작가님과 그 퀼른 선제후라는 분이 실패하신다면, 전 프랑스로 곱게 살아나가지는 못할 것 같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이렇게 작가님께서 늦은 시간에 절 몰래 만나시는 것도 귀측의 힘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나 다른 제후들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는 증거로 보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총감 각하께서는...프랑스를 위해 무엇이든 하시는 분 아니었습니까?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그려.”

뭔 소리야. 강제로 자리에 박아놓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건데.

내 품에는 항상 사직서가 예리하게 다듬어져 있다니까?

붕붕 이게 바로 천하제일사직검이다.

뽑지를 못할 뿐이지. 흑흑.

“전 그저 맡은 바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지금 작가님과 퀼른 선제후라는 분께 붙는 건 확률이 낮은 도박 같아서 말입니다. 아무리 걸린 돈이 크다고 해도 확률이 어느 정도는 나와 줘야 도박을 하지 않겠습니까.”

“···음...”

괴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신음을 흘렸다.

“작가님. 제게 절충안이 하나 있기는 한데, 한 번 들어보시렵니까?”

나는 침울해진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괴테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절충안, 말이십니까?”

“어차피 절 혁명의 토템으로 쓰시려하는 거 아닙니까. 기꺼이 토템은 되어드리죠. 하지만 대놓고는 못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뭐긴 뭐야. 연극 한 번 거하게 해보자는 거지.

그래서 허쉴? 안 허쉴?

***

쓰으읍

후우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나는 부사관에게 빌린 파이프를 마지막으로 깊게 빨아들인 후 원주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후우...이거 얼마에 사셨습니까, 중사님?”

“예? 아마 2 리브르짜리 일겁니다.”

“담뱃잎은요?”

“그건 한 3 리브르쯤 주고 샀습니다.”

“두 가지 다 합쳐서 저에게 10 리브르에 파시죠.”

아무리 생각해도 난 니코틴이 필요해. 엿 같은 일에 계속 엮여서 스트레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은데, 니코틴마저 없으면...생각하기도 싫다 진짜.

담배가 없으면 나약한 기욤은 죽어버릴지 몰라!

“왜 굳이 헌걸 사서 쓰시려고 합니까, 총감 각하. 차라리 요 근처에서 새로 하나 사시지요.”

“아, 이 근방에 담뱃가게가 있습니까?”

“안내해드릴까요?”

“예 부탁드립니다.”

부사관과 나는 수수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부사관의 말대로 담뱃가게가 문을 열고 있었다.

“안녕하십ㄴ, 아니지. 구텐 탁?”

“···프랑스어 할 줄 아오. 그리고 아침이니 구텐 탁이 아니라 구텐 모르겐이오만.”

카운터에 앉은 노인은 내 얼굴을 보곤 피식 웃으며 말했다.

“큼큼. 거 담배 좀 사러왔습니다.”

노인은 내 말에 카운터에서 일어나 물건 쪽으로 향한 뒤, 내게 물었다.

“뭘로 하시겠소? 시가? 막궐련? 아니면 파이프?”

“···막궐련? 궐련이 있습니까?”

파이프나 시가는 몰라도 궐련은... 뭐 본적이 없는데?

늙은 가게 주인은 다시 한 번 피식 웃더니 말했다.

“허, 그러면 궐련 없는 담뱃가게도 있소? 보아하니 담배 처음 펴보는 젊은 친구 같은데, 그러면 파이프를 권하겠소. 막궐련은 너무 독하거든.”

“허, 제가 이래봬도 말보루 레드도 피워봤거든요?”

물론 좀 독하긴 하더라. 한 번 빌려 피우고 다시는 안 피우긴 했지 아마.

“말, 말보루? 그게 뭐요?”

아차.

“···그, 독한 담배 있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말리지 않겠소만.”

노인은 어깨를 씰룩하더니 담뱃잎을 종이에 싸서 내게 건넸다.

“자, 여기 있소. 막궐련. 하나 피워보겠소? 불은 거기 옆 부싯돌을 쓰시오.”

나는 노인장이 건넨 궐련을 받아 카운터에 있는 부싯돌을 탈칵여 스파크를 만들어냈다.

내가 만들어낸 불꽃이 담뱃잎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담배지!

흑흑 네가 너무 그리웠어, 담배야!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었다.

쓰으읍.

“크하아악! 우욱! 케하아아악! 쿨럭쿨럭!”

연신 기침을 입 밖으로 쏟아내는 날 보고, 노인은 배를 잡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껄껄, 내 그럴 줄 알았지! 청년처럼 뭣 모르는 젊은이들이 멋 부린답시고 꼭 한 번 데여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더군.”

“쿨럭! 쿨럭! 이게...궐련이라고요? 담배가 아니라 독약 아닙니까?”

“청년이 피운 게 딱 표준이네만?”

이게...필터의 힘인가? 난 지금까지 담배가 아니라 필터를 피우던 거였나?

필터 없는 순수한 담배연기는 내 폐를 이곳저곳 쑤시다 못해 마치 내 폐 안에서 그루시마냥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쿨럭쿨럭! 그냥 파이프로 주십시오.”

노인은 다시 물건 매대로 가더니 여러 파이프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파이프 재질은 뭐로 하겠나? 보아하니 꽤나 잘사는 집 사람인거 같은데, 나무보다는 상아가 더 예쁘고 오래 쓸 수 있다네. 물론 좀 비싸기야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요 근래 상아가 꽤 많이 들어와서 작년보다는 싸졌으니 그렇게 부담 가는 가격은 아닐 걸세.”

“···그럼 상아로 주십시오.”

“아주 자알 생각했소! 껄껄껄!”

노인은 흡족한 듯 누런 이를 내보이며 내게 웃어보였다.

***

1790년 3월 초순.

프랑스령 코르시카, 아작시오.

“코르시카에서 철수하시지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새벽의 야음을 틈타, 코르시카에 도착한 영국인이 건네는 첫마디에, 파올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십 수 년간의 영국 생활로 단련된 능숙한 영어로 말했다.

그러나 영국인은 그런 파올리의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꼿꼿하게 허리를 핀 채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본국 의회와 총리께서 내린 결정은 굳건합니다. 파올리 씨.”

“여태까지 당신들 말대로 다 해줬잖소! 프랑스에서 코르시카가 독립하면, 느슨하지만 대영제국에도 들어가겠다고 맹세했고! 총독도 받겠다고!”

결국 파올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영국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영국인은 그런 파올리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선 말을 이어나갔다.

“파올리 씨. 말은 바르게 하시죠. 어차피 대영제국 참가도, 총독 파견도 명목상이지 않습니까. 우리 영국 외교부와 파올리 씨 간의 약속은 그게 아니었을 텐데요?”

“···.”

“우리 대영제국은 코르시카를 통해 프랑스 남부를 견제하고, 코르시카는 독립국에 준하는 자치를 누린다 - 그게 우리 상호 간의 실질적인 약속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흥분하시다니, 저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럽군요.”

“···십 수 년 간 꿈꿔왔던 고향 땅을 밟으니, 감정적으로 변했던 것 같소. 내 사과하리다.”

그러나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영국의 지원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파올리는 결국 고개를 숙여보였다.

“한 명의 신사로서, 파올리 씨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오.”

“예, 궁금하신 거라도?”

영국인은 싱긋 웃으며 파올리에게 물었다.

“대관절 왜 갑자기 코르시카에서 철수하라는 거요. 이유라도 제대로 설명해주시오.”

“···아 그건 말이지요. 전 유럽이 들썩이고 있어서 말입니다.”

“···유럽이 들썩여?”

“그렇습니다. 이주일 전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저가 세상을 떴지 뭡니까. 덕분에 우리 대영제국 외교부만 과로로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참 힘들지 뭡니까. 영국인은 모자를 벗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덧 붙였다.

“···.”

“국왕 폐하와 피트 수상은, 작금의 정세변화에 대처하려면 현재 우리가 펼치고 있는 외교 전략의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 대영제국은 우리 코르시카 인들을 버리겠다는 거요?”

“버리다니요. 무슨 말씀을! 구체적인 외교 전략안이 나올 때까지만 잠시 코르시카 독립을 보류하자는 거지요.”

“···이보시오. 내 한 가지만 물으리다.”

“얼마든지요.”

“귀하가 보기에는 내가 몇 살로 보이오?”

파올리는 차분한, 그러나 무언가 불꽃같은 게 일렁이는 듯 한 눈으로 영국인을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 백발성성하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내가, 당신에게는 몇 살로 보이느냐고.”

내 나이 예순여섯 평생 이 날만을 기다려 왔소. 그런데, 당신들 대가리가 몇 마디 조잘거렸다고 다시 그 시궁창 같은 런던으로 돌아가라고?

그러나 파올리의 말은, 끝끝내 목에 맴돌 뿐이었다.

“···.”

자신을 째려보기 시작하는 영국인에게, 파올리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아니오. 실언이었소.”

“···아무튼 이번 3월 중순에서 말 사이에 저번처럼 밀항선을 보낼 테니 준비하고 계십시오. 파올리 씨.”

“알겠소.”

영국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파올리는 작게 읊조렸다.

“역겨운 영국 해적 새끼들.”

***

사람과 사람을 친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빠른 방법이 뭘까.

자신과 비슷한 공통점을 찾아 얘기하는 것?

업무 중 잠시 자리를 비우고 회사 옥상에 올라가 동료끼리 피우는 맞담배?

아니면

“자! 건배! 코르시카를 위하여!”

“““위하여!”””

벌컥벌컥

“크어어어!”

“이야 나폴레오네! 니 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아이가?!”

“어허! 내한테 이 정도는 물이나 다름 없제.”

“나폴레오네 점마 엊그제도 저러다가 술집 탁자에 대가리 통째로 박아버리지 않았나?”

벌써 근 일주일 넘게 술값을 다 대며 나폴레옹은 파올리의 측근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나이도 비슷한 친숙한 동향사람이 하루 웬 종일 곁에 붙어 부어라 마셔라하고 있으니, 이제 나폴레옹의 또래 되는 말단 단원들은 나폴레옹을 거의 친구나 형, 동생으로 보고 대하기 시작했다.

“마! 나폴레오네! 내가 주는 술도 함 받아봐라!”

“하모 예!”

“나폴레오네 형님! 이번에는 제가 함 따라보겠심더!”

“하모 좋제!”

“야야 파리에서 뭐 했는지 좀 얘기해도!”

“하모 당연하제. 그러니까 내가 파리에 있었을 때···.”

술자리가 원래 그렇듯, 오늘도 나폴레옹은 자신의 온갖 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위고 그 싸가지 없는 새끼의 대가리를 깨버린 것부터.

“이야 속이 후련하네!”

자신의 친구들 얘기까지.

“기, 기욤이면 그 재무총감? 그 사람이 나폴레오네 니 친구라꼬?”

나폴레옹은, 차근차근

한 수, 한 수를 쌓아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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