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세상 (9)
“흠.”
“어떻습니까? 만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뭔가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할 것 같은 인상의 중년 남자에게,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그으을쎄요. 흠. 이봐, 에티엔! 잠깐 이리로 와봐!”
“뭐야 미셸 형, 무슨 일인데 불러.”
중년 남자가 외치자, 에티엔이라 불린 다른 남자가 저택 안쪽에서 문을 열고 나온 후, 나란히 의자에 앉아 내가 건넨 윤전기의 설계도를 보고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손님이 가져오신 설계도인데 한 번 봐봐.”
“어디...”
“어때 보이냐?”
“대강...어떤 식으로 돌아갈지는 알겠는데. 이거 진짜 작동은 되는 건가? 한번 조그마하게 만들어보기 전까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한 번 만들어보고 뜯어봐야 좀 윤곽이 잡힐 것 같단 말이야.”
미셸이라 불린 엄한 얼굴의 남자는 동생과 한참을 중얼거리다가 나에게 물었다.
“재무총감님. 혹시 이 설계도 며칠만 저희에게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예 뭐. 원본도 아니고 사본인걸요.”
“감사합니다! 시제품을 만들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중간에 뭔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명함을 드릴 테니 이곳으로 연락 주십시오. 바로 응대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남자가 건넨 명함을 받아 읽어 내렸다.
“어디 보자. [몽골피에 제지가죽회사] 라 알겠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총감님!”
나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와, 곁에 있는 기요탱 박사님을 보고 물었다.
“기요탱 박사님, 저 두 사람 괜찮은 사람들 맞지요?”
“물론입니다, 재무총감 각하. 몽골피에 형제는 아주 유능한 친구들이랍니다.
하하하!”
음 사람 좋아 보이는 박사님이 그렇게 얘기하시니까 믿어봐야 겠는ㄱ···.
- 증기기관이라니 정말 굉장해애애!
- 증기기관? 아 이건 못 참지!
내가 뭘 들은 거지.
방금 나온 건물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거 같은데.
“···.”
“···큼큼. 저 친구들이 좀...변태 같아보여도 열기구라는 걸 처음 사람이 탈 수 있게 만든 기술자들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린 내 눈빛을 읽은 듯, 기요탱 박사님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그...너무 신경 쓰지 마시지요. 총감 각하.”
“그...럴까요?”
안 쓸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곧 오스트리아로 떠나시지 않습니까. 어디 맡긴 물건이라 생각하시고 마음 편히 가지시지요. 어차피 시제품이 나와서 작동하기까지 적어도 두 달은 필요할 겁니다.”
“흠.”
완성만 된다면야 누가 맡던 상관이 없긴 한데. 만들어지는 게 최소 두 달이라.
성장형 핸드폰 게임에서 건물 올릴 때 2주 씩 기다리는 기분을 핸드폰도 없는 세상에서 다시 느끼게 될 줄이야.
이게 게임이었으면 바로 다이아 현질해서 질렀다 이거.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 현질 못할 이유는 없지 않나?
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기요탱 박사님을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기요탱 박사님. 라부아지에 씨와 함께 윤전기 발명 건을 아예 전담으로 맡아 보시지 않겠습니까? 조건은 일주일에 한 번씩 오스트리아에 있는 제게 개발상황을 편지로 전달해 주는 것, 그 외에는 없습니다. 거기에 지원도 월 1만 리브르까지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달마다 여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3만 리브르이니 그 정도야 R&D한답시고 투자하지 뭐.
“허, 공학자로서 정말 달갑고 또 후한 제안입니다만. 굳이...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글쎄요. 이건 무조건 성공할 거라는 사업가의 직감이 외친다고 해야 하나요?
그리고 제가 또 성격이 조금 급하거든요.”
적어도 내 21세기 기억에는 신문사를 보여주는 뉴스에서 윤전기가 세차게 돌아가고 있었단 말이지. 그걸 미리 개발해서 돈을 땡긴다면 얼마나 달달할까.
사람들의 놀이거리가 겨우 활자 쪼가리뿐인 세상에서 수천 장을 한 번에 뽑아내는 윤전기를 발명해? 아 못 참지. 이건 무조건 돈을 쓸어 담는 사업이다.
하, 또다시 기욤 드 툴롱이 18세기에 물보라를 일으키고 말았군.
“하하하, 그렇게까지 탄탄하게 지원해주신다니 잘 알겠습니다. 각하. 이 기요탱이, 한 번 열심히 만들어보도록 하지요.”
***
“잘 다녀오셨습니까, 사장님.”
“아 페시옹 씨시군요. 플로리앙 씨는 어디 갔나요?”
“부사장님께서는 6시까지 근무하시다가 저와 교대하고 퇴근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기요탱 박사님 만나러 가는 일 때문에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 낮에 누구 한 명 면접 보러 오지 않았어요?”
귀족인지 평민인지 복식을 짬뽕시켜서 입고 다니는 이상한 사람을 본 거 같은데.
페시옹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맞습니다. 이름은 도나시앵 사드, 생쥐스트 씨가 면접을 보셨는데 합격시키셨더라구요.”
“오, 그래요?”
생쥐스트 씨 드디어 일 시작했구나.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생쥐스트 씨와 사드 씨가 퇴근하기 전 두 사람이 사장님께 보여 달라고 쓴 글이 하나 있었는데 시간 괜찮으시다면 가져다 드릴까요?”
“네, 뭐 저녁 먹으면서 심심풀이 겸 읽어보죠. 가져다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곧, 페시옹 씨가 내게 소책자를 하나 가져다 주었다.
“감사합니다, 잘 볼게요.”
“하하 아닙니다, 사장님. 그러면 전 옆방에서 서류작업 하고 있을 테니, 무언가 필요하면 불러주십시오.”
“네네. 수고하세요.”
나는 간편식사 하나를 입에 물고 소책자를 펴 활자를 읽어나갔다.
“이...이게 뭐야!? 갸아아아아악!”
생쥐스트, 사드 이 미친 새끼들이 내 돈 받아 처먹고 대체 뭘 써내는 거야!
다음 날, 이삭의 민족 잡지사 사무실에는 사장 기욤 드 툴롱의 이름으로 긴급 주문한 거대한 나무판이, 벽에 큼지막하게 걸리게 되었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쓰지 말아야 할 것 12가지와 정상적인 잡지 활동을 위한 매뉴얼]
***
1790년 1월 30일.
베르사유 국민방위대 사령관실.
“···부근위대장 앙투안 드제 소령이 직위해제 됐다고? 확실한가?”
국민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는 턱을 쓸어내리며 부관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거기에 왕실 근위대 대원 대부분이 물갈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음.”
라파예트 사령관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일어섰다가 다시 의자에 앉으며 짧게 탄식했다.
부근위대장 앙투안 드제 소령.
혁명에 어느 정도 우호적인 영관급 장교이자, 기존 근위대 대원 중 상당수가 존경하는 젊은 소장파 장교.
그런 소령을 왕이 직위해제 시켰다.
“사령관님. 아무래도 이건...”
“···그래. 루이 17세가, 아니 오를레앙이 무언가 일을 저지르고 싶어 하는 것 같군.”
굳은 얼굴로 결연하게 말하는 부관에게 라파예트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라파예트는 잠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부관을 다시 쳐다보고 물었다.
“탈영한 병사들과 장교의 검거는 어떻게 되고 있나.”
“일부 부대에서 병력을 차출해 헌병대로 돌리고 있지만 탈영병 대부분이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고향으로 숨어들어간 바람에 수색이 힘에 부치는 모양입니다.”
“음.”
이 엿 같은 상황에 처한 게 대체 몇 개월째인지. 라파예트는 속으로 한탄하며 짧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런 라파예트의 모습에, 부관은 다시 입을 열고 목소리를 냈다.
“···혹시 이번에 재무총감이 오스트리아로 가는 것과 상관이 있을까요?”
“글쎄, 귀관은 어떻게 생각하나.”
라파예트는 달달 떨리는 다리를 멈추고자 다리를 꼬며 부관에게 물었다.
부관 또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상관있다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여태껏 사태를 관망만 하던 합스부르크 놈들이 갑작스럽게 움직인 것도 그렇고,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사람 중 재무총감만을 딱 골라서 초빙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후...그래, 본관도 이하동문이네.”
라파예트 사령관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안 좋군.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아.”
지난 미국독립전쟁 때, 영국군의 총탄에 맞은 다리가 아려오는 듯 했다.
“내가 다리에 총을 맞았던 브랜디와인 전투에서도 이 정도로 예감이 안 좋지는 않았네.”
국민방위대 사령관은 다리를 풀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부관을 바라보았다.
“부관, 국민방위대 주둔지 지도를 가져와주게.”
“예, 사령관님.”
부관이 구석에 말아놓은 지도를 가져와 탁자에 펼치자, 사람 반만 한 크기의 지도가 파라락하는 소리와 함께 라파예트의 눈동자에 비춰졌다.
지휘봉을 꺼낸 라파예트는 지도를 신중하게 훑어보다가 프랑스의 동북쪽 국경을 탁-하는 소리와 함께 가리켰다.
“북독일 국경 알자스, 로렌 쪽 연대는 즉시투입 가능할 만큼 재편된 것 맞는가?”
자신을 바라보는 라파예트 사령관에게, 부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재무총감 각하가 준 프로필을 참고해 장교 대부분을 친혁명파로 편성해놨습니다.”
“좋아, 프로이센과 헤센은 제쳐놓고.”
라파예트 사령관은 지휘봉을 거두고 다시 지도를 찬찬히 살피다, 프랑스 북쪽 해안가를 다시 지휘봉으로 톡톡 건드렸다.
“···네덜란드 방면 불로네는, 어떤가.”
“예. 칼레 해군육전연대가 완전편제 된 상태로 주둔하고 있습니다.”
“좋아, 저지대도 제쳐놓자고.”
네덜란드에서 지휘봉을 거둔 라파예트 사령관은 서쪽 국경에 자리한 스페인을 향해 지휘봉을 옮기다가 멈칫하면서 말했다.
“스페인은... 제쳐놓도록 하지, 그 쪽은 해군 빼고는 아예 민병대 수준도 못되지 않나.”
허공에 잠시 멈춰있던 지휘봉이 동남부 쪽으로 이동해 다시 지도를 찍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브장송과 도피네인가.”
라파예트의 지휘봉이 가리키는 프랑스의 동남부 영토 옆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쌍두 독수리가 거대한 발톱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래도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한 동맹국 사이인데, 설마 신성로마제국이 쳐들어오겠습니까, 사령관님?”
“···물론 신성로마제국이 안 그럴 수도 있네. 문제는 여기란 말이지.”
부관은 라파예트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라파예트의 지휘봉이 이탈리 아 반도의 파르마와 모데나를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파르마와 모데나라니, 이탈리아 말씀이십니까? 기껏해야 파스타나 만들고 돈장사나 하는 샌님들 아닙니까.”
“귀관 말대로 이탈리아 군은 형편없지. 무서운 건 이탈리아 군이 아니라 따로 있네.”
라파예트는 부관을 향해 씁쓸하게 웃으며 지휘봉을 프랑스 한 가운데로 옮겼다.
“명심하게. 전장에서 가장 무서운 건 눈앞의 적이 아니네, 가장 무서운 건 아군의 지휘체계가 무너지는 거야. 현 국왕의 왕비가 누구 딸이지 알고 있나?”
“···모데나 공국의 공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지도 위의 베르사유를 지휘봉으로 짚으며, 라파예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남부에 주둔하는 연대를 몇 개 차출해서 이탈리아 국경에 가깝게 배치하도록. 추가로 베르사유 근방의 경계를 더욱 강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