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 (9)
1789년 12월 31일, 파리.
“···하아, 이 광경도 이제는 질리는구만.”
길가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대는 파리 시민들을 본 오를레앙, 아니 루이 17세는 마차 안에서 작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쓸모도 없는 놈들. 옜다, 기분이다.”
루이 17세는 마차 창문을 살짝 열어 손을 몇 번 휘휘 내저었다.
눈길조차 없는 오를레앙의 감정 없는 손동작이었지만, 시민들은 열광했다.
“오, 오를레앙 대공 전하가 날 보셨어! 날 봐주셨다고!”
“멍청아! 오를레앙 대공 전하가 아니라, 루이 17세 폐하겠지!”
“그래! 그리고 니가 아니라 니 뒤에 서있는 날 봐주신거야!”
“아니야! 날 보고 손을 흔들어주신 게 분명해!”
“평등한 필리프, 루이 17세 폐하 만세!”
호송대 병사들은 그런 열광적인 분위기에 젖어 마차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발을 내딛는 시민들을 바깥으로 계속 밀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이 아저씨 좀 들어가세요!”
“야! 레날! 거기 똑바로 막아!”
“예! 하사님! 아니 제발 좀 들어가세요!”
그런 광경을 뒤쪽 대열에서 지켜보던 뒤무리에 소장(진)은 혀를 끌끌 차며 부관을 바라보고 말했다.
“부관, 이 꼴을 어떻게 생각하나?”
부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답했다.
“죄송합니다, 장군님.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부관은 고개를 돌려 대열 뒤에 따라오는 기병대를 보고 몇 번 머리를 까닥였다.
기병대는 부관의 신호 아래 고삐를 흔들고 앞으로 말을 몰고 나가 마차 주위를 둘러쌓았다.
겨울의 청명한 태양 빛 아래, 기병대가 입고 있는 흉갑이 번뜩번뜩 빛나며 주위를 압도했다.
군중들도 그런 기세에 밀려 이제는 섣불리 도로로 나서지 못했다.
뒤무리에는 그제서야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야 좀 질서가 잡혀있는 것 같군.”
이제 뒤무리에는 고삐를 살짝 흔들어 마차 옆에 말을 댄 뒤, 창문을 두드렸다.
“국왕 폐하, 이제 곧 마르스 광장에 도착합니다.”
“아 그래, 파리 시장이라는 작자와 악수 한 번 하기로 했었지. 그...이름이 뭐였는지...”
창문 너머에서 말하는 바람에 퍽 작아진 루이 17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 바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폐하.”
“아, 그랬었지. 이제야 기억나는군. 고맙소, 장군.”
뒤무리에는 루이 17세의 말에 예처럼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
파리중앙군사학교 뒤, 샹 마르스 광장.
바스티유 점령의 선봉장이자 3 신분 선거위원, 조르주 당통은 연신 옷매무새를 만지작댔다.
“장 바이 시장님, 저 지금 어떻습니까? 보기 좀 괜찮습니까?”
“···딱 당통 위원처럼 보입니다.”
장 바이 시장의 감정 없는 목소리에 당통을 입을 삐쭉 내놓고 말했다.
“그거 칭찬처럼은 안 들립니다만.”
“요 앞이 소란스러운 것 보니 루이 17세 폐하께서 벌써 지척에 온 것 같습니다.”
그런 당통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보이는데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장 바이는 저 멀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장 바이의 손 끝에 걸린 방향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장 바이의 말에, 당통은 다시 자신의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어댔다.
가슴에 달린 삼색기 휘장.
잘 달려있고.
머리.
음 나쁘지 않고.
옷.
나름 깔끔하고.
신발.
아 흙이 좀 묻어있네.
당통은 발을 몇 번 땅에 찍어 흙을 날려 보냈다.
그 후로도 한참 제 몸을 살피던 당통의 눈동자에, 어느새 백합 무늬가 새겨진 화려한 마차가 광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비춰졌다.
마르스 광장의 연단 앞에 멈춘 마차의 뒤를 따라 기병들과 보병들이 차례차례 도열했다.
거구의 남성이 마차 문을 열고 장 바이 시장과 당통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통보다 머리 하나가 큰 루이 17세는 활짝 웃으며 순서대로 악수를 건넸다.
“반갑네. 나는, 아니 짐은 루이 17세라고 하네.”
“영광입니다! 폐하! 소신은 파리 시장 장 바이이라 합니다.”
“귀하의 이름은 짐 또한 일찍부터 들어왔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루이 17세 국왕 폐하 만세!”
국왕은 이제 장 바이의 좌측에 서있는 당통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귀하는...?”
“소신은 선거 위원 조르주 당통이라 합니다, 폐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통이라...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것 같네만.”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는 루이 17세의 모습에 당통은 상기된 채 입을 열었다.
“예, 예! 그렇습니다! 소인은 폐하의 저택 팔레 르와얄에서 신세를 진 적 있습니다.”
“아, 그런게로군.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적 있다 싶었네. 하하하!”
담소를 나누는 세 사람 곁으로, 예복을 차려입은 사환 한 명이 수수하게 장식된 나무함을 들고 다가왔다.
당통은 나무함을 받아들고, 루이 17세를 향해 나무함을 천천히 열어보였다.
나무함 안에는 삼색기가 올려져있는 은으로 만든 브로치가 들어있었다.
“파리 시민들이 폐하께 드리기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폐하.”
루이 17세는 천천히 브로치를 들어 올려 자신의 가슴팍에 꽂아 넣고는 씨익 웃어보였다.
“그래, 짐에게 잘 어울리는가?”
“진정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폐하!”
당통은 환희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이 17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뒤로 돌아, 광장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짐은 항상 혁명과 함께하리다!”
“““평등한 필리프, 루이 17세 국왕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루이 17세는, 오를레앙은 남모르게 속으로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
“하, 조악한 것이 미적 감각이라고는 하나도 없군.”
루이 17세는 삼색기 브로치를 옷에서 떼어내 마차 구석으로 던져버리며 읊조렸다.
연기도 하루 이틀이지 근 몇 년간을 그렇게 보낸 루이 17세는 파리를 빠져나 오자마자 환했던 얼굴을 잔뜩 구겼다.
“아, 아바마마. 그래도 신민들이 마련해준 물건 아닙니까.”
루이 17세는 소리가 들려온 자신의 옆자리를 쏘아보았다.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향하면서 태우고 온 아들이자 이제 프랑스의 왕세자가 된 루이필리프 드 오를레앙 3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들의 얼굴을 본 루이 17세는 짜증이 솟구쳤다.
16살이나 먹은 녀석이 아직도 저렇게 나약하다니.
이게 다 혁명이니 뭐니 하는 저급한 불한당 놈들이 저택에 들어와 노닐어서 생긴 일 아니겠나. 그 놈들이 아들에게 헛소리를 불어넣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불순분자들을 저택에 불러 모은 건 자신이긴 하지만 나약한 선왕을 물리치고 대프랑스의 위엄을 되찾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루이 17세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왕세자에게 말했다.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네가 차지 그러느냐.”
“예, 예? 그, 그게 무슨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의 말에 왕세자는 당황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나는 혁명이니 뭐니 그런 치기어린 장난에 어울려주지 못하겠다.”
“···.”
결국 오를레앙 3세는 바닥에 떨어진 브로치를 주섬주섬 주워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쯧.”
그런 아들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루이 17세는 혀를 끌끌 찼다.
모름지기 국가의 지존이라면 위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저렇게 굽신대서야 원.
루이 17세가 그런 생각을 하던 때, 마부가 마차 앞창을 열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국왕 폐하, 베르사유에 도착했나이다.”
“···드디어.”
국왕은 흡족하게 웃으며 마차 문을 열고 경쾌하게 땅을 밟았다.
베르사유 궁전의 웅장한 황금색 자태가 그의 시야를 가득히 채워나갔다.
“““루이 17세 폐하 만세! 만세! 만세!”””
거기에 더해 수백 명의 의원들은 궁전 앞을 도열해 루이 17세의 이름은 연호하고 있었다.
“하하하! 고맙소, 고맙소!”
루이 17세는 행복했다.
그렇게 한참 환영을 받고 궁전으로 들어간 루이 17세에게, 황금 비단옷을 입은 늙은 사제가 찾아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긴히 전해드릴 말이 있나이다...”
“아 무슨 일이오, 대주교? 하하하!”
***
베르사유 궁전, 전쟁의 방.
“···면목이 없습니다, 폐하...”
“···.”
루이 17세는 숙인 고개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아무 말 없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이게 사실일리 없지 않나.
고작 보름이다. 보름.
보름 안에 왕이라는 자리가 뼈다귀보다 못한, 그런 종이호랑이가 됐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래 이건 꿈이다. 꿈.
아주 지독한 꿈이다.
“···지금 나를 바보로 아는가, 대주교? 하..하하...그럴 리가 없지, 않은, 가? 하나도 재미없소이다.”
루이 17세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떨려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폐ㅎ...”
“재미!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180cm가 넘는 거구의 국왕은 벌떡 일어나 온 세상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외쳤다.
“지금 나를 바보로 아느냔 말이야!!!”
루이 17세는 옆에 놓인 꽃병을 들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꽃병 조각이 이리저리 튀어나갔다.
“내가 지금 이딴 종이호랑이가 되려고, 그 모든 일을 시작한 줄 알아!”
그의 노성에, 대주교는 그저 고개를 바닥에 숙일 뿐이었다.
“대체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주교는 뭘 한 거요! 말해 보란 말이야!”
“···그, 그것이 의회에서 우리 쪽이 숫자로 밀리는 터라...”
“닥쳐! 닥치란 말이야! 짐이 네놈들한테 쏟아 부은 게 얼마나 되는 지 알기나 하는가! 이 쓸모없는 돼지새끼들!”
“···.”
루이 17세는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대주교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대주교, 말해보시오! 왜 말이 없소? 왜! 말이! 없느냔! 말이야!”
국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앞에 보이는 가구들을 죄다 발로 차 엎어버렸다.
“아니, 아니지. 그것보다 누구라고!? 누가 그 따위 일을 저질렀다고!”
루이 17세는 의자 하나를 바닥에 내려쳐 완전히 부숴버린 후 대주교를 힘으로 일으켜 세운 뒤 말했다.
“기,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입니다. 폐하.”
“기욤? 기욤! 기요오옴!!”
죽여 버릴 테다.
***
“···누가 나 부르나?”
왜 귀가 간지럽지.
나는 서류를 잠시 내려놓고 귀를 후볐다.
“···너 꼼수부리지 말고, 다시 서류나 똑바로 들어라?”
마티유 형은 날 째려보며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진짜로 귀가 간지럽다니까? 아 그리고 형 내가 대위로 진급도 시켜줬잖아 왜 그래.”
“아 그러셔요? 대애애위? 돈 문제는 차아암 똑 부러지는 우리 총감님께서 왜 앞에 ‘임시’는 빼먹으셨을까?”
“···아무튼 대위는 대위잖아.”
“입이나 안 열면 밉지나 않지.”
우리 마티유 형이 이렇게 쌀쌀맞은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래, 이게 다 그루시 때문이다. 그따구 편지는 대체 왜 라파예트 사령관한테 보내서 나와 마티유 형을 이렇게 만든 거야.
그루시가 날 이 지옥도에 끌어들였어!
그 때 누군가 재무총감 사무실의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왔다.
어찌나 세게 깠는지 문이 경첩에서 떨어져 바닥에 쳐박혔다.
“뭐, 뭐야 씨발?”
“네놈! 네놈이 기욤인가!”
180cm가 넘는 거한이 얼굴이 벌게진 채 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으아아아!”
“안돼! 책상은 안돼!”
겨우 분류해놓은 책상위의 서류가, 마치 벚꽃 잎처럼 허공에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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