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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독이 든 성배 (8) (60/341)

독이 든 성배 (8)

베르사유 궁전, 재무총감 사무실.

나는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보며 입을 말했다.

“어디보자. 군권도 받았고, 또 교회 재산도 먹었고...”

이야 이거 완전 제대로 빨아먹었는데? 오를레앙이 베르사유로 오면 거의 피눈물 쏟겠어.

꺼어억! 넘모 맛있다!

“허. 방금 전에 난장판을 만들어 놓으신 사람치고는 정말 태평하십니다, 기욤재무총감.”

내 맞은편에 앉은 라파예트 사령관이 날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으으래도 이번에는 미리 알려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야 합니다만, 겨우 확보해놓은 장교들 중에 1할이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보고를 방금 들은 저로서는 일단 내면에 있는 화를 다스리기가 어렵답니다. 총감.”

어...음..어..

“···죄송하다고 하면 봐주시나요?”

“마리 씨가 구워주시는 호박파이가 조금이나마 맛이 덜했더라면 재무총감은 벌써 반송장이 됐을 수도 있었다는 것만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하...하하...”

너무 무섭게 말하신다...

“그래도 이번 일 덕에 나중가면 사령관도 편하실 겁니다.”

“흠.”

내 말에도 라파예트 사령관은 팔짱을 낀 채 날 계속 째려보았다.

아저씨 내 말 좀 들어보셔요.

나는 두어 번 큼큼 소리를 낸 뒤 천천히 말했다.

“그...생각해 보십쇼, 사령관님. 이제 재정도 완화됐고 군권도 우리 혁명파가 가진 셈 아닙니까. 군사제도도 이제 안정적으로 굴러가지 않을까요?”

“뭐, 총감의 말대로 국왕의 말 하나에 와해되지는 않겠지요.”

다만. 라파예트는 덧붙였다.

“오늘 기욤 총감이 쏘아 올려준 그 작은 공 덕분에, 교황청에서 항의가 들어온다면 군제 안정이고 뭐고 다 산산이 흩어질 수도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프랑스인은 계몽주의보다는 가톨릭에 더 친숙하니까요.”

“그거 내정간섭 아닙니까?”

라파예트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우리 프랑스가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한 것도 영국에 대한 내정간섭 아닙니까.

물론 영국 해적 놈들이 단죄 받아야 마땅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에이, 설마 그렇다고 전쟁이라도 나겠습니까?”

나는 라파예트의 말에 애써 미소를 짓고 말했다.

라이징 스타이자 전쟁영웅 나폴레옹은 1800년대 초에나 나오는데 지금은 1789년 말인걸.

그리고 내가 프랑스 혁명을 조오오오금, 야아아악간 비틀긴 했지만 큰 틀은 그대로이지 않나.

거기에 왕 목도 안 잘랐는 걸?

왕 모가지도 안 자른 상황에 딱히 막 옆 나라 왕들 신경을 거스를만한 과격함도 없었고 말이야.

“글쎄요. 전쟁이라는 게 그렇게 순진하게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하는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라파예트 사령관은 그렇게 말한 뒤, 차를 한 모금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재무총감님. 이 라파예트가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딱히 좋은 느낌이 들지는 않는데요.”

내 떨떠름한 표정에도 라파예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 재정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음...

일단 30억에 달하는 부채는 교회 재산을 채권처럼 팔아서 급전을 땡기면 해결할 수 있긴 하다.

그런데 이 부채를 해결해도 이제 플러스마이너스 0 이라는 거지, 결코 여유롭다는 건 아니라는 거다.

“솔직한 얘기로, 불가능하지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내 제스처를 본 라파예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흠, 그렇다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는 계획안은 없애야겠군요.”

“···예...?”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이탈, 리아로 쳐들어가요?”

“예. 이탈리아에 있는 왕국들이 교황의 이름을 빌려 우릴 공격하기 전에 먼저 치는 게 제일 최선의 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건 좀...”

전쟁의 이유는 차치하고서, 그러는 순간 바로 곳간에 빨간 불 켜질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방어전을 수행해야겠군요. 국경에 요새 증축을 하거나 개보수를 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요새...요?”

딱 듣기만 했는데 돈 많이 나갈 것 같은 그런 기분.

“흠, 그것도 안됩니까?”

“···.”

라파예트 사령관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날 보면서 말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니.”

“그, 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구요.

“그러면 한 가지만 수고해주시겠습니까?”

“예, 예? 그거 혹시 돈 듭니까?”

“아니요. 돈은 안 듭니다, 총감님.”

돈이 안 든다면야...

“뭔지 몰라도 돈이 안 드는 거라면 무조건 해보겠습니다.”

“하하하! 그으으렇단 말이지요, 재무총감?”

어, 이거 뭔가 잘못된 듯 한 그런 기분.

“잠시 따라오시지요. 기욤 재무총감.”

라파예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

“분명 다 한다고 하신 겁니다?”

“···.”

라파예트 사령관은 자신의 집무실 책상 가운데에 쌓아놓은 서류의 탑을 가리키며 낄낄 웃어댔다.

당했다.

“···이게 뭡니까?”

“전국에 있는 초급장교들 프로필입니다. 아시다시피 전 이제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 10여 년이 지나 요즘 초급장교들은 도통 얼굴을 모르겠더군요.

덕분에 이 친구가 제대로 혁명을 지지하는지, 아니면 지지하는 ‘척’을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불순분자인지 확인하기가 힘듭니다.

사실 이번에 도망갔다던 장교들도 제가 내심 고려 끝에 선발한 장교들 중 일부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그렇군요.”

다 좋은데 그걸 왜 저한테 알려주시죠.

“그런데, 저 장교 프로필 중에 기욤 총감 이름도 들어있더군요?”

“어···.”

라파예트는 쌓여 있는 서류 앞에 가더니 가장 상단에 있는 서류 몇 장을 들고 읽어 내려갔다.

그가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기욤 드 툴롱.

남부 마르세유·툴롱지역에 자리한 게헨느 출생.

파리중앙군사학교 차석 졸업 후 포병대 소위 계급을 받았으나 제대 신청 후 예비역 편입.

생도 시절 사업을 시작해 파리 전체에 점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성공함.

평민, 지방 귀족 출신 생도들을 규합해 약칭 ‘평등 클럽’이라는 사조직을 운영함.

‘평등 클럽’의 구성원은 약 250여명에 달하며, 현재 ‘평등 클럽’의 구성원 중 대다수는 혁명에 동조하고 있으며 각 연대에서 실무를 담당하고 있음.”

라파예트는 다 읽은 프로필을 다시 가지런히 서류더미 위에 올려놓고는 날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걸 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이번에 제 2 용기병연대가 독일용병대를 막는데 큰 공을 세운 젊은 장교가 하나 있어 물어봤습니다. 믿을만한 장교가 있느냐-라고 말이지요.”

“···.”

“그런데 그 친구가 말하더군요. ‘기욤 드 툴롱’이라는 사람이 믿을만하다고.

그래서 좀 캐물었더니 이렇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주덥니다.”

라파예트는 책상 서랍을 열어, 밀랍이 뜯어진 편지를 내밀었다.

“···제 2 용기병연대 임시 소령, 에마뉘엘...드...그루시...?”

이..이...씨..발..!

황망한 표정의 날 보면서, 라파예트는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한다고 하셨지요, 총감?”

“어...”

“여기 있는 장교들 프로필, 내일 아침까지 모두 보시고 믿을만한 사람 추려서 가져와 주십시오. 저도 총감 덕에 고생 좀 했으니, 총감도 고생 한 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 그냥 나갈게요.”

“들어오실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랍니다, 재무총감.”

***

주 그리스도.

미소 짓는 천사.

말에 탄 채, 검을 들고 있는 잔 다르크.

동정녀 마리아.

성당의 지붕에 자리한 왕가의 백합 문양.

대목수 도르베와 장 르루, 고셰와 수아송이 한땀 한땀 정성으로 만든 아름다운 성당의 장식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오를레앙 대공은 그 모든 것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이 눈에 가득히 담고 또 담았다.

오를레앙 대공이 거대한 성당의 문 앞에 서자, 위병들이 경례와 함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기기기긱

육중한 나무문이 마찰음을 내며 자신의 속을 차근차근 보여주기 시작했다.

흰 색의 대리석 기둥과 반기둥들이 30여 미터를 수직으로 뻗어 나가 아치형을 이뤄 두터운 천장을 떠받쳤다. 마치 거대한 레드우드 숲처럼.

이에 질수 없다는 듯, 동방박사와 주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가 형형색색으로 그려진 보라색 바탕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받아 성당 바닥을 화려하게 비추었다.

오를레앙은 그 중심을, 차례차례 천천히 걸어나갔다.

오를레앙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을 뗄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자세로 오를레앙을 향해 고개와 무릎을 숙였다.

마치 파도가 지나가는 것처럼, 인영들의 높이가 낮아졌다.

오를레앙은, 그 파도의 끝에서 무릎을 꿇었다.

흰 수염이 난 랭스 대주교가, 경건하게 오를레앙 대공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루이필리프 조세프 드 오를레앙, 오를레앙의 대공작이자 영주이며 생 클루성의 성주이자 팔레 르와얄의 주인이오.”

“그대는 레미기우스에게 세례를 받은 클로비스처럼, 주 그리스도의 뜻을 세상에 널리 떨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하오.”

“그대는 샤를 8세 대왕과 루이 12세 대왕처럼, 신앙의 수호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하오.”

“그대는 샤를마뉴 대왕처럼, 프랑스와 나바르의 만민과 재산과 안전을 책임지며 외적에게 용맹히 맞설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하오.”

대주교는 성수로 깨끗이 닦은 황금 왕관을 양손으로 들어, 무릎을 꿇은 오를 레앙의 머리에 천천히 올려주었다.

“새로운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이자, 브르타뉴와 오를레앙과 노르망디의 지배자, 루이 17세 대왕 만세!”

대주교는 왕관을 오를레앙의 머리에 올린 후 고개를 숙이고 팔을 높게 올리며 외쳤다.

“““루이 17세 대왕, 만세! 만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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