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독이 든 성배 (7) (59/341)

독이 든 성배 (7)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드넓은 샹파뉴 평원.

프랑스의 자랑이자 젖줄이며,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명술 중 하나인 샴페인의 고향.

그런 샹파뉴의 심장에 자리한 도시를, 사람들은 랭스라 불렀다.

그리고 그 랭스의 중심에는 거대한 성당이 그 웅장하고 장엄한 자태를 뽐내며 드높게 서 있었다.

노트르담 드 랭스.

많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 본,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랭스의 성당은.

유명함은 몰라도 멋과 고상함만큼은 파리에 있는 형제에게 밀리지 않겠다는 듯 추운 겨울에도 고고하고 묵묵하게, 오늘도 신실한 종소리를 멀리까지 울렸다.

“···그래, 드디어 랭스에 왔구나...”

이 멀리까지 은은하게 들려오는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소리에, 오를레앙대공은 마차 창문을 열고 얼굴을 살며시 내밀고서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찬 겨울바람이 수없이 콧등을 스쳐 코가 맹맹해져도, 따듯한 마차 안이 점차 그 온도를 잃어가도, 오를레앙 대공은 마치 종소리에 홀린 것 마냥 하염없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좁쌀만 했던 도시의 모습이 점차 커져갈 때마다 오를레앙의 벅찬 마음 또한 커져만 갔다.

오를레앙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정말이지 높고 청명했다.

야훼께서 환히 오를레앙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듯 싶었다.

마차 창문을 열고 헤실헤실 웃고 있는 그런 오를레앙을 향해, 푸른색과 금실이 수놓아진 두터운 망토와 삼각형의 군모를 입은 멋들어진 장군이 말을 몰아 다가갔다.

“폐하,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정도면 이제 랭스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오를레앙 대공은 장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런가? 알려줘서 고맙네, 뒤무리에 장군.”

“소관 뒤무리에, 할 일을 마땅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폐하.”

국왕, 아니 ‘국왕 예정자’의 상투적인 칭찬에 뒤무리에는 삼각군모를 벗어 가슴에 가져다 대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뒤무리에 장군의 모습에, 오를레앙 대공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허허,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마시오, 장군. 내 진심으로 칭찬하는 바이니.”

오를레앙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는 지금 세상 모든 게 다 아름답게 보였다. 눈이 소복하게 덮힌 평원의 모습도, 드높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 몇 마리도, 길가의 조약돌조차도 모두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런 오를레앙의 말에도 뒤무리에 장군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털이 얼마 안 남은 황량한 정수리를 오를레앙에게 보여주었다.

“영광입니다, 폐하.”

“하하하! 거 사람 참 고지식하기는, 그래. 왕의 곁에는 자네같이 우직한 사람도 있어야지!”

혹시 개인적으로 뭐 원하는 거라도 있는가?

오를레앙 대공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뒤무리에는 그런 오를레앙의 말에 눈을 번뜩였다. 그의 머리에 있는 뉴런들이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준장, 낭트 지역사령관 뒤무리에.

별 한 개짜리 장군인 자신이 파리로 올라와 고작 영관급 장교가 맡는 호송대장을 자원해 오를레앙을 따라온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자신은 ‘혁명의 친우, 평등한 필리프, 오를레앙 대공의 신변을 직접 지키고 싶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혹시 곧 왕이 될 오를레앙과 어떤 연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 때문 아닌가.

진급에 살고 진급에 죽는 군인들답게,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갑인 장군답게, 뒤무리에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하하! 어서 말해보게! 내 웬만한 건 다 들어드리겠네, 뒤무리에 장군. 그리고 내 호의는 그리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오?”

다시 크게 웃으며 덧붙이는 오를레앙의 말에, 뒤무리에 준장은 큼큼-하면서 작게 말했다.

“···말하기 부끄럽고 송구하오나, 소관의 견장에 혹시...”

“아.”

오를레앙은 손으로 턱을 쓸어내리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뒤무리에 장군, 귀관도 군인은 군인인 게로군?”

“송구합니다, 폐하. 실언이었습니다.”

“하하 겸손은 됐네. 뒤무리에 ‘소장’”

“예?”

뒤무리에는 벙찐 표정으로 오를레앙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오를레앙은 태연한 표정으로 뒤무리에의 눈을 보고 말했다.

“흠, 왜 그러시오, 뒤무리에 ‘소장’?”

“아, 아닙니다, 폐하! 오를레앙 국왕 폐하 만세! 만세! 만세!”

“하하하! 그래, 그래. 이제 대열로 다시 돌아가게나, 장군.”

뒤무리에는 또 다시 황량한 정수리를 보여준 뒤, 고삐를 돌려 대열로 돌아갔다.

오를레앙은 마차 창문을 닫고, 허리를 완전히 마차의자에 기댄 뒤 마차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정말로 왕이 되는구나.”

1초 만에 장군 계급장을 마음대로 바꿔 달아버리다니.

이게 왕이라는 권력의 맛인가?

“너무나 달구나, 너무 달아!”

처음으로 휘둘러 본 왕의 힘에, 오를레앙의 볼은 발갛게 상기됐다.

***

베르사유 궁전, 국민의회.

사회자, 미라보 백작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진짜로 어이가 없었다.

결국 미라보 백작은 떨리는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그, 말씀은, 지금?”

루이 16세는 태연한 표정으로 미라보 백작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짐은 의회가 국왕이 가진 모든 군권을 회수하고 오직 근위대만을 사사로이 움직일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면 하오만?”

“““···.”””

고요해진 장내와 달리, 루이 16세의 입은 움찔움찔 거렸다. 마치 웃음을 참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처럼 말이다.

미라보 백작은 충격으로 인해 주인의 의지와 듣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 말했다.

“그렇다면 군권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포함되는지요?”

왕은, 유쾌하게 답했다.

“어디까지라니? 전부 다 말하는 것이오만?”

“전부 다라 하시면...?”

“장교들의 임명권, 징병, 부대의 창설과 해산, 군수물자 관리까지 모두.”

“···.”

“껄껄껄!”

큰 소리로 웃는 루이 16세의 목소리는, 적막한 의회장의 벽을 구석구석 때렸다.

루이의 목소리가 장내 곳곳에 울려 퍼지는 현실을 본 황금색 비단옷의 성직자, 오를레앙 파의 늙은 대주교는 이를 뿌득-하고 갈았다.

‘네놈들, 대체 어디서 어디까지냐. 기욤 드 툴롱, 루이 오귀스트! 네놈들 대체 어디서 어디까지 짜고 치는 거냔 말이다! 아니, 상관없다. 막아야한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여기서 국왕이 가진 전권이 회수돼 버리면 오를레앙 대공이 베르사유로 온다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져 버리고 만다.

이미 통과된 법안을 강제로 거부한다?

오를레앙 대공의 지지기반 중 반은 혁명세력이 떠받치고 있다. 그런데 법안을 국왕의 독단적인 판단 아래 거부한다면?

미친 소리지.

지지기반 중 반이 사라지면 그 누구라도 쓰러지고 만다. 사람으로 치면 다리 한 짝을 잃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니.

그렇다고 법안을 받아들이면, 그대로 오를레앙은 자기 마음대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인형이나 마찬가지다.

‘외통수 중 제대로 외통수구나!’

대주교는 늙은 몸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름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당신이 멋대로 그럴 순 없습니다, 루이 오귀스트!”

국왕과 재무총감의 연이은 폭탄선언에 방금 전까지 얼이 빠져 있던 좌중의 얼굴이, 이제는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뭐, 뭐라구요? 대주교님!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주변에 있는 의원들이 경악으로 덜덜 떨리는 입을 겨우 열어 말했다.

그럼에도 대주교는 묵주를 빠르게 달칵달칵 돌리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루이 오귀스트는! 왕이 아니란 말이외다! 우리의 왕은, 지금 랭스에서 왕관을 받고 있는 오를레앙 대공 전하지 왕위를 양도하기로 한 루이 오귀스트가 아니란 말이오!”

연이은 대주교의 폭주에, 이제는 대주교 뒤에 자리한 사제들 또한 경악으로 얼굴이 씰룩씰룩 거렸다.

대주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이 막지 못한다면, 자신들은 끝이니까.

“나는 국민의회의 의원으로서! 루이 오귀스트 저 자가 이 성스러운 의회에 발을 들이는 걸 거부하겠소! 왕관을 내려놓은 자가 어떤 자격으로 국민들의 대표들이 모인 이 곳에 온단 말인가!”

대주교의 주름진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한참을 씩씩 대던 대주교는 숨이 가쁜지 잠시 말을 끊고 천천히 숨을 마시고 내쉬었다.

그러나 그 때, 누군가 일어서서 루이 16세를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제 좌중의 시선은 박수를 치는 서른 즈음의 청년에게 쏠렸다.

청년은 거의 1분여 동안 치던 박수를, 갑자기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국민의회 아라스 대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입니다. 할 말이 참 많지만 항상 법을 가까이 하는 변호사로서 우선은 몇 마디만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법적으로 지금 루이 16세 폐하는 아직까지 이 프랑스의 군주이며, 이는 오를레앙 대공 전하께서 랭스에서 왕관을 머리에 이기 전까지 유지된다는 점알려드리겠습니다.

따라서 현 국왕 루이 16세의 권한은 아무런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음을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몸을 기울여, 앞사람 의자에 손을 짚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구한 날 트집만 잡으시는데 지금까지는 줄곧 참아왔습니다만 나, 로베스피에르는 당신들 사제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듭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거기 대주교님 곁에 계신 분들 모두 목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것,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

랭스, 노트르담 대성당 앞.

“오를레앙 대공 전하, 만세!”

“만세! 만세! 만세!”

“프랑스 만세! 국민 만세!”

성당으로 향하는 대로변은 이제 진눈깨비가 조금씩 내려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마중 나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공 전하! 손 한 번만 흔들어 주셔요!”

“아니, 이 아줌마가 진짜! 좀 들어가 있으라고요!”

“아이고 군인 아저씨, 우리가 대공 전하 볼 일이 어디 있겠어요. 좀 비켜줘요!”

한 줄로 도열해 행렬을 지키는 호송대 병사들이 고생하는 건 당연했다.

뒤무리에 장군은 이제 말에서 내려 도보로 오를레앙이 탄 마차를 향해 걸어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음, 누구인가?”

“소관, 뒤무리에입니다. 폐하.”

“그래? 도착했는가?”

“예, 폐하. 그렇습니다.”

잠시 후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리고 오를레앙 대공이 근엄한 모습으로 마차를 내려왔다.

오를레앙은 군중들에게 눈길을 한 번 준 뒤, 몸을 돌려 거대한 성당을 눈으로 쫓았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커다란 두 개의 탑과 거대한 창문이 오를레앙의 눈에 비쳐졌다.

그리스도와 동정녀 마리아, 클로비스 대왕 및 그의 뒤를 이은 선대왕들의 모습이 조각된 파사드를 하나하나 천천히 눈에 담은 오를레앙은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가 후-하고 내쉬었다.

“그래, 내가...성공했구만.”

오를레앙의 눈에 맺힌 조그마한 이슬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씻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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