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 (6)
루이 16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왜들 그러는가? 그대들은 짐이 알기로는 프랑스 국민들을 대표하고, 또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 아니었나? 아니면 프랑스 국민들을 위한다는 말은 거짓이었던 겐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루이 16세가 뱉어대는 문장들에, 의원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저 인간이 미쳤나?’
‘오를레앙 대공이 왕이 된다니까 갑자기 홱 돌아버린 건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그러나 어리둥절한 의원들과는 다르게, 별 일 아니라는 듯 재무총감은 어깨를 으쓱하며 들어올렸다.
“···혼란스러운 분들이 있으신 것 같으니, 잠시 휴회를 가지고 이후에 다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사회자는 그렇게 말하며 판사봉을 두드렸다.
나무와 나무가 맞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의회 곳곳의 벽을 때리고 잦아들 무렵, 의원들은 각기 자리에서 일어나 아는 사람끼리 뭉쳐 숙덕이거나, 뒷짐을 지고 밖에 바람을 쐬러갔다.
“재무총감 말대로라면 일단 재정은 확실하게 해결된 것 아닌가?”
“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내 의견은···.”
“···무상몰수일까 아니면 유상몰수일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글쎄, 솔직한 얘기로 난 잘 짐작이 가지는 않네. 재무총감이 보통 신출귀몰한 자여야 짐작을 하던 말던 할 것 아닌가.”
“지금 보니까 기욤 재무총감 말이야, 아주 그냥 에베르 같은 빨갱이 같은데?”
“에, 에베르? 에이. 그 빨갱이보다야 훨씬 낫지! 에베르 그 미친놈은 재산을죄 없애자고 하지 않았나.”
“하기야, 사제란 놈들이 뭐 하는 게 있어야지! 하루 종일 기도만 하면서 묵주굴리는 놈들 아니야!? 15만 리브르라니, 그 돈이면 웬만한 소도시에 자그마한 신작로를 만들 돈 아닌가!”
“그래, 도대체 말이 되는 일인가! 보통 사람들은 하루에 1 리브르 가지고 생활하는데 연봉으로 15만 리브르라니, 하루에 무슨 400 리브르 씩 쓴단 말이야? 제 놈들이 무슨 에리식톤인가? 배에 걸신들린 것도 아니고!”
“교황 성하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정간섭을 하실까?”
“아니, 인노켄티우스 교황 때 일은 잊었어?”
가지각색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의회의 안과 바깥을 채워나갔다.
그러나 사제복을 입은 일부 의원들은 자리에 앉아 잔뜩 노기 띤 얼굴을 한채. 손에 쥔 묵주를 아무 말 없이, 달칵달칵 소리가 나도록 한 알 한 알을 힘을 줘 굴려대고 있었다.
그런 성직자들의 적막을 깬 건, 늙은 대주교의 말이었다.
“···이리로 다들 모여 보게.”
오를레앙 대공의 신임을 받는 대주교의 근엄한 말에, 성직자들은 숙소에 모였던 저번처럼 그를 빙 둘러쌌다.
황금색 비단옷을 중심으로, 흰색과 붉은 벨벳 옷이 모여들었다.
대주교는 손에서 굴리던 묵주를, 앞에 있는 탁자에 살포시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이거 우리가 한 방 먹은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닙니까! 당장 재무총감 저자를 끌어내려야 합니다!”
대주교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젊은 사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대주교는 코웃음을 치는 동시에 젊은 사제를 차갑게 노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허, 우리가 지금까지 막대한 부를 착복한 건 말이 되고?”
“그, 그건...”
“아서시게. 같은 사제인 나도 설득 못하면서 재무총감을 끌어내리겠다고?”
얼어붙은 듯 차가운 대주교의 말에 사제들은 그저 큼큼-소리만을 내며 눈을 피했다.
“잘 생각하게 다들. 이미 의회에 있는 사람 중 대부분은 저 스물도 안 된 재무총감 나리의 세치 혀에 넘어간 지 오래야.”
대주교는 다시 예의 그 젊은 사제를 바라보고 물었다.
“자네.”
“예, 예! 대주교 각하.”
젊은 사제는 방금 전의 상황을 맘에 담아둔 듯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의원 수가 모두 몇 명이지?”
“아마...오백 명이 조금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몇인가?”
“···아흔입니다, 대주교 각하.”
“그래도 수는 셀 줄 아는구만. 다들 이 친구 말 들었나? 우린 아흔일세, 아흔.”
“““예, 대주교 각하.”””
대주교는 탁자에 올려놨던 묵주를 다시 손에 쥐고 한 알 한 알을 천천히 굴려 나갔다.
달칵
달칵
달칵
한 번씩 묵주의 알이 대주교의 엄지손가락을 거칠 때마다, 사제들의 구레나룻에도 땀이 한 방울씩 맺혀 바닥에 떨어졌다.
“···남은 수는 두 가지로군.”
교황청, 오를레앙 대공 전하. 대주교는 덧붙였다.
그런 대주교의 말에, 옆에 있는 중년의 주교는 입을 열었다.
“···카노사 때 일을 재현하고자 하십니까?”
“필요하다면야 뭐든 못하겠나.”
카노사의 굴욕.
신성로마제국의 애송이 황제가 교황에게 자신이 성직자를 임명하겠다며 깝죽대다가 얻어터진 사건.
“프랑스 안에서야 왕의 지지가 있으면 뭐든 해볼 수 있다만, 대국적으로 볼 때 교황 성하께서 힘을 써주신다면 못 막을 것도 없지.”
그리고. 대주교는 주위에 모인 사제들을 슥, 눈으로 한 번 훑으며 덧붙였다.
“오를레앙 대공 전하, 아니 ‘국왕 폐하’께 이 얘기를 서둘러 전하도록. 이건 시간 싸움이네.
랭스에서 ‘국왕 폐하’가 며칠 내로 이 베르사유에 입성하신다면 우리가 본격적으로 싸우지도 않고 승리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교황 성하의 힘을 빌려 재무총감과 그 패거리와 한판 붙어야 될 테니.”
파발을 띄우게 어서.
***
- ···자네, 경감이라는 감투 좀 받더니 일이 장난처럼 보이나?
- 아닙니다! 총경님!
- 겨우 검문소 하나 관리하는 게 그렇게 힘든가?
- 아닙니다! 총경님!
- 지나가는 마차에 탄 사람에게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물어보는 게 그렇게 힘든가?
- 아닙니다! 총경님!
- 그래. 놓쳤다고 치자고. 그런데 왜 쫓을 생각은 안한 건가? 성한 몸 가지고 어디에 쓰려고? 자네는 정신이 부족해 정신이! 어? 할 수 있다, 무조건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경관을 해야지 원. 정신력이 부재한 자네를 정녕 프랑스인이라고 할 수 있겠나!?
- 죄송합니다! 총경님!
- 후...됐네. 나가보게.
“젠장, 그게 그렇게 쉬우면 지가 직접 근무 서라지.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요 아주.”
파리 경찰청 경감 파트리크는 며칠 전 야간 당직 때 있었던 일 때문에 욕을 먹은 오늘 아침을 회상하며 파이프에 담뱃잎을 쑤셔 넣었다.
사람이 마차 한 대 놓친 것 가지고 이렇게 들들 볶아대다니 정말 너무 한 것 아닌가. 차라리 말이라도 한 필 주고 잡으라고 하면 모를까, 맨 다리로 어떻게 마차를 쫓아?
“정신이 어쩌고저쩌고 좋아하네, 입만 번지르르한 놈 같으니.”
쓰읍-후우우
“하아. 그나마 낫구만.”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파트리크는, 답답했던 전신이 기분 좋게 뚫리는 듯 한 기분을 즐기며 초소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그렇게 한참 파이프를 꼬나물고 초소 밖을 응시하던 파트리크의 귀에, 멀리서 누군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트리크는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대신 호루라기를 바꿔 물고 경찰모를 쓴 채 초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삐이익! 정지! 정지!”
“비, 비키시오! 급한 일이오!”
말을 탄 사내는 미간을 좁히며 파트리크에게 소리쳤다.
“거, 사람 성격 참 급하네. 어디로 가는 길이고, 어디서 왔습니까?”
“그런 거 말할 시간 없소!”
“에헤이. 그러지 마시고 단순한 절차니까, 서로서로 피곤하게 굴지 맙시다.”
파트리크는 웃는 낯으로 조곤조곤 말했다.
“어, 어! 이봐! 잠깐만! 야!”
그러나 말을 탄 사내는 말 머리를 홱! 하고 돌리더니 그대로 고삐를 힘차게 치고 달려 나갔다.
“이, 이런 미친 새끼!”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본 파트리크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놓치면, 죽는다.’
경감, 파트리크는 경찰모도 아예 벗어던지고 호루라기를 있는 힘껏 불며 달려 나갔다.
“삐이이익! 거동수상자 발견! 삐이이익! 거동수상자! 야이 개새끼야! 거기 안서!”
그러나 있는 힘껏 손을 앞뒤로 흔들며 달리는 파트리크의 노력에도, 말은 너무나 빨랐다. 한 손만 했던 말과 남자의 모습이 주먹으로, 다시 엄지손가락만큼 작게 줄어들었다.
‘좆됐다!’
파트리크는 멀어져만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어?”
그 순간, 말이 하늘을 날았다.
몇 시간 뒤.
“···사인은 뭘로 할까요, 경감님?”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온 순경은 싸늘하게 식은 사체 앞에서 파트리크에게 말했다.
“···굳이 ‘뭘로’라고 까지 할 것까지 있나. 그냥 말이 빙판길에 미끄러져서운 없게 죽은 거지.”
“그렇겠죠? 그래도 이 사람, 목이 부러졌으니 아프게 가지는 않았겠습니다.”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 낙마를 했어도 목부터 떨어지나.”
“그러게 말입니다.”
두 경찰관은 마주보던 시선을 옮겨. 병사들이 치웠건만 아직도 길 군데군데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빙판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운 없는 사람이었다.
***
같은 시각 베르사유 궁전.
재개된 의회는 다시금 충격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음은 짐이 직접 말하리다. 짐은 왕이 지닌 군권을 모두 의회와 국민방위대에 넘기고. 오직 베르사유의 근위대만을 통제할 것을 의회에 요구하는 바요.”
“그럼 이번에는 저,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이 말하겠습니다. 아까 전에 성직자 분들께서 ‘다 가져가면 우리는 뭘로 먹고 사느냐’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정부에서 앞으로 월급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월급은 글쎄요... 기존보다는 적지 않을까요? 앞으로 성직자 분들은 사치품을 쓰실 때 ‘까다로운 선택’이 필요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뭐 어쩌라고.
꼬우면 돈 벌던가.
‘껄껄껄! 재무총감, 어땠나?’
‘으히히히히! 폐하! 믿고 있었습니다!’
나와 루이 16세는 눈두덩이를 씰룩거리며 눈빛으로 서로 칭찬을 주고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