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 (5)
“평등한 필리프! 오를레앙 대공 만세! 혁명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루이 17세 국왕 폐하, 만세!”
12월 초순의 상당히 추운 날씨에도, 대관식을 위해 랭스로 향하는 오를레앙대공의 마차 주위로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평범한 주부,
말끔한 정장을 차려 입은 잘나가는 변호사,
비번임에도 정복에 백반까지 칠해가며 멋지게 입고 나온 젊은 장교,
퀼로트 같은 비싼 바지 대신 허름하고 편한 면바지를 대충 걸친 노동자까지.
수백, 수천에 이르는 각양각색의 파리 시민들이었지만 그들의 목소리와 손은 화려하게 장식된 부르봉 왕가의 상징, 백합 세 송이가 그려진 마차를 향하고 있었다.
“““오를레앙 대공 전하, 만세! 만세! 국민의회 만세! 파리 시민 만만세!”””
수많은 손과 자그마한 삼색기가 앞 사람들의 어깨와 얼굴 옆을 비집고 나와 춤추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이 얼마나 손을 흔들어대건, 얼마나 큰 목소리로 떠들던, 얼마나 많은 삼색기가 바람에 휘날리던, 마차의 창문은 한 치도 열리지 않았지만 시민들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파리 시민들이, 혁명이 승리했다는 것이었으니까!
시민들은 왕좌의 주인이 바뀌는 걸, 모두 파리 시민들이 만들어 낸 산물이자 혁명의 승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쯧, 버러지 같은 놈들.”
오를레앙은 창 밖에 우글거리는 인영들을 보고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이보게, 거 빨리 좀 가지. 여기서 더 미적대다가는 토할 것 같으니.”
결국 오를레앙은 짜증이 잔뜩 난 목소리로 마부가 앉아 있는 앞쪽과 연결된 조그마한 창문을 열고 말했다.
“예! 대공 전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음?”
오를레앙은 마부의 말을 듣고 한쪽 눈을 찌푸렸다.
“죄, 죄송합니다. 국왕 폐하! 소인의 불찰입니다!”
“음, 뭐 괜찮네. 그보다 어서 가도록 하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마부의 모습을 본 오를레앙은, 그제서야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턱을 쓸어내렸다.
아무렴. 겨우 대공 전하라니, 오를레앙 자신은 이제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이자 부르봉 왕가의 가주지 않은가. 그래. 내가 왕이다!
“이랴! 이랴!”
열심히 고삐를 휘두르는 마부의 뒤로, 오를레앙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랭스로 가는 오를레앙 대공의 대관식 행렬이 파리를 빠져나온 지도 약 한 시간 정도 지난 시각.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길 한가운데 멈춰있었다.
“···이게 무슨...”
“요즘 춥긴 했지만 길이 이렇게나 얼어있을 줄은...”
호송대 사령관 뒤무리에 장군은 부관과 함께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군화로 길을 퍽퍽 소리가 나게 찍었다.
“···장군님. 이거 아무래도 다 깨고 지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차를 이 위로 끌고 가면...”
“그래, 까딱 잘못하면 바로 전복 되겠구만.”
뒤무리에는 한차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후-하면서 내쉬었다.
“···부관.”
“예. 장군님”
“데려온 병사들 중 공병이 몇 인가?”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
“얼마 안 되더라도 동원해서 어떻게든 해결해보게. 그리고 파리로 파발을 보내서 곡괭이 좀 넉넉하게 가져오라고 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대기하고 있다가 도구가 오는 대로 작업에 투입시키도록.”
“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하도록.”
자신에게 경례를 올리고 병사들에게 달려가는 부관을 뒤로, 뒤무리에는 삼각군모를 벗고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젠장, 무슨 초겨울에 이렇게 땅이 깡깡 얼어 있담.”
뒤무리에는 다시 모자를 쓰고는 대열의 중간에 있는 화려한 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똑
오를레앙은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괴고 있던 팔을 내리고 근엄한 자세로 말했다.
“게 누구인가.”
“뒤무리에입니다, 국왕 폐하.”
뒤무리에는 속으로 쓴 물을 삼켰다. 국왕 폐하라니, 곧 왕이 되긴 하겠지만 아직 대관식도 안한 자에게 그런 칭호를 벌써부터 붙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랴.
뒤무리에는 신하된 성격이었지, 반골이 아니었다.
“음, 열어도 좋소.”
오를레앙의 말에, 오십 가까운 나이의 중년 장군은 마차 문을 열고 오를레앙을 향해 정중하게 삼각군모를 벗어 예를 취했다.
오를레앙 또한 그런 중년 장군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답했다.
“그래, 무슨 일이오. 뒤무리에 장군.”
중년 장군은 오를레앙의 말에 차분하게 말했다.
“예, 길이 상당히 얼어 있어 랭스까지 가는 길이 꽤 늦어질 듯 합니다.”
“허. 그렇게나 많이 얼었단 말인가? 아무튼 알겠네.”
“그러면 편히 쉬십시오, 국왕 폐하.”
뒤무리에 장군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마차 문을 다시 닫았다.
다시 혼자가 되자, 오를레앙은 근엄한 자세를 풀고 다시 팔을 턱에 괸 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다 끝나고 한 발자국만 더 가면 되는데, 겨우 빙판길 따위에 발목을 잡히다니. 기분 참 엿 같군 그래.”
짜증이 속에서부터 울컥울컥 올라왔다.
***
같은 시각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오늘 의회가 개회하기 전 루이 16세와 나는 주변을 모두 물리고 정원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래, 재무총감. 판은 충분히 짰는가?”
“준비야 모두 해놨습니다. 남은 건 폐하와 제가 하기에 달려있죠.”
내 말에 루이 16세는 씨익 웃었다.
“좋네, 재무총감! 어디 일 한 번 저지르러 가지. 내 이 왕좌에 올라서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궁을 나서는 건 처음 같구만.”
“그렇게나 좋으십니까?”
“왕이 돼서, 신민들을 위해 목적을 가지고 무언가 해보는 건 처음이라 많이 들뜬 것 같네. 하하하!”
“아니, 그렇게 사람들 생각하시는 분이 군대는 왜 파리로 보내셨습니까?”
“···그건 다 리슐리외 같은 자네를 얻기 전 아닌가.”
허어?
내 얼굴이 썩어 들어가자, 루이 16세는 큼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짐이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네. 왕좌라는 자리에 집착하다보니 그렇게 되더군. 짐이 진심으로 사죄하겠네.”
“···저 말고 의회에 있는 의원들한테 하십시오.”
“물론, 자네 말대로 하지. 왕이고 뭐고 짐은 훌훌 털어버렸으니, 이제 거리낄권위 따위도 없으니 말이야.”
“누가 보면 해탈이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해탈이라, 어찌보면 해탈일 수도 있겠군. 이 허울뿐인 자리가 어찌나 사람 마음을 갉아먹던지... 사실 자네 말대로 ‘시민’으로 돌아가면 책이라도 하나 쓸까하네만.”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루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책이라뇨?”
“음, 관심 있는가. 재무총감? 제목은 [무소유]로 한번 해볼까 싶네만.”
“···시민으로 돌아가셔도 폐하 밑으로 열 명은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딱히 무소유...적인건 아닌 것 같은데. 무소유라 쓰고 풀소유라 읽어야 하는 건가?
루이는 다시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큼큼-소리를 내더니 내 눈을 바라보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거, 재무총감. 자네는 너무 사람이 냉정한 것 아닌가? 조금 정서적인, 그런 면을 부각시키는 책이라고 생각해주게.”
“예, 예. 알겠사옵나이다아.”
그런 우리의 뒤로,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성당에서 정각마다 내는 종소리가 뎅-뎅-하면서 울려 퍼졌다.
나와 루이 16세는 동시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준비되셨습니까, 폐하?”
“음, 재무총감은 어떤가?”
“저야 불 지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우리 둘은 서로 마주보고는 씨익, 웃음을 교환했다.
***
“다음은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이 발언하겠습니다.”
내가 단상 위에 올라가자, 몇몇 의원들이 움찔거렸다.
대체 날 뭘로 보길래 저러는 거지. 내가 무슨 저승사자로 보이나? 내가 무슨 뱃사공 카론이야? 진짜 너무들 하네.
아, 아니다. 저게 훨씬 나은 것 같아.
로베스피에르 씨. 제발 절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그러면 좀...무섭거든.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손에 쥔 법안을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오늘 발언할 내용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산에 대한 환수조치입니다.”
음. 다들 왜 그렇게 얼어붙으셨지.
아, 그건 아니구나?
“···재무총감, 당신 미쳤소?”
“헛소리하지 마시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교회 재산을 압류하면, 성직자들은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어우 화끈하셔라.
잠시의 정적 끝에, 곳곳에 있는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내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음. 다 예상하고 있었어, 느낌 알잖아.
도와줘요! 탈레랑 몬!
“저, 오툉의 주교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은 재무총감의 의견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이제 좌중의 시선은 태연자적하게 앉아서 한 손을 든 채 고개를 까닥이는 사제에게 향했다.
“다, 당신 뭐라고 했소?”
“전 재무총감의 법안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지금 장난해!? 성직자들을 다 굶겨 죽이겠다는 거야, 뭐야!”
“흠, 글쎄요. 연봉으로 15만 리브르 씩 받아먹으시면서 굶어죽는다고 난리를 치시는 겁니까?”
“그, 그건 품위유지비와 이런 저런 잡무에···.”
“헛소리 좀 그만하시지요. 저 탈레랑 또한 사제입니다. 되도 않는 거짓부렁은 참을 수가 없군요.”
탈레랑은 그 무뚝뚝한 얼굴에 미간까지 찌푸리면서 일어나 말했다.
“사제님들 모두 교회의 재산이 얼마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30억 리브르입니다! 30억! 연 수익만 해도 2억 리브르에 달하는 돈을, 꿀꺽꿀꺽 삼켜왔으면서 굶어죽는다 뭐다 난리를 핍니까? 선배 사제님들, 후배님들! 신학교에서 그렇게 하라고 배우셨습니까!? 야훼께서 성경에 그런 식으로 행동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그...”
“···.”
“험...험...”
탈레랑의 노기 띤 말에, 일어나서 내게 삿대질을 퍼붓던 성직자들은 하나 둘씩 자리에 앉았다.
이야, 탈레랑 몬. 성능 대단한데? 믿고 있었다구!
그러니까 로베스피에르 씨, 눈에서 독기 좀 빼주시면 안될까.
탈레랑의 말빨로 어느 정도 정리된 분위기에도, 내게 일어나 항의하던 성직자들을 쳐다보는 로베스피에르 의원의 눈에는 불꽃이 일었다.
그러나 아직도 몇몇 성직자들은 말없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
제발 멈춰! 이러다 저 단두대 마스터한테 다 죽고 싶어?
나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반대하시는 의원들도 계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다만 프랑스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러나 내 말은 내게 처음 삿대질을 한 성직자 의원에 의해 잘려나갔다.
“재무총감, 내 한마디 하겠소. 교황청과 분명히 갑론을박이 오고갈 텐데, 그 거에 대한 방지책은 준비해 놨소이까?”
음. 저 자신만만한 표정보라지.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성직자 의원의 그런 자신만만한 표정은, 의회의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짐, 루이 16세 또한 재무총감의 말에 동의하는 바요.”
루이 16세는 그렇게 말한 후 나를 보고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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