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든 성배 (4)
“그, 그럼 재무총감 각하,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 예 제발 빨리 좀 가시고, 명심하세요, 4개월 뒤까지 방법 가져오라는 말.”
“예! 당연하지요! 제가 꼭 방법을 찾아서 해내보이겠습니다, 각하!”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말하는 라부아지에에게, 나는 질린다는 듯 손을 휘휘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부아지에는 문을 나서 마차에 탈 때까지 계속 나에게 연신 머리를 숙여댔다.
아무리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지만 사람이 뭐 저렇게 굽신굽신 거리는 인간으로 바뀌었대.
“그나저나 내가 혁명의 얼굴? 대체 누가 그런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니는 건지.
플로리앙 씨는 뭐 들은 거 없어요?”
나는 옆에 서있는 플로리앙 씨에게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저야 베르사유에 계속 있다가 오랜만에 파리로 온걸요. 알 턱이 있나.”
“하기야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사장님.”
내 말에 플로리앙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 한켠에 쌓여 있는 잡지들 중 몇 부를 뽑아서 내게 가져왔다.
“어디 보자. 잡지 이름이... [인민의 벗]?”
씁. 이름이 조금 거시기한데? 약간 북쪽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하나.
“예, 요 근래에 새로 나온 잡지인데.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굉장합니다.”
“그래요? 누가 썼길래 그렇게 잘 팔린데요?”
“그...누구냐, 마라였나? 아 맞네요. 이름이 아마 장 폴 마라였을 겁니다.”
“장 폴 마라? 처음 듣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잡지를 펴, 기사를 한 줄 한 줄 읽어나갔다.
“베르사유, 혁명의 도가니! 기욤 드 툴롱 의원의 열정적이고 혁명적인 행동하나하나가 수구 반동들이 지닌 일체의 이기적인 마음을 깨부수었다...”
이건 뭔 씹...
이거 북쪽 맛 첨가 수준이 아니라 진짜 말 하나하나가 다 북쪽 맛 80%짜리는 되겠다!
게다가 잡지에 그려져 있는 그림에는 내가 의회장 단상에 올라가 산양의 뿔이 나있는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 검을 양손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내가 프랑스의 유비냐, 쌍고검을 휘두르게? 이제 곧 있으면 시에예스 사제님이 장팔사모를 뽑아 휘두르고 라파예트 사령관이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거냐?
나는 보던 잡지를 탁자에 던지고 다음 부를 펼쳐 읽어 내려갔다.
“이 시대의 양심! 시민의 방패, 시민의 얼굴! 기욤 드 툴롱, 탐욕스러운 왕에게 혁명의 나팔을 불다!?”
그 뒤로도 붉은 맛이 나는 잡지의 향연은 한참이나 계속 되었다.
그러나 가장 용납할 수 없는 건.
“뭐? ‘루이, 당신이 사람입니까?’ 이거 내가 한 말인데, 나한테 취재비도 안주고 잡지에 넣어서 그걸 팔아먹어?”
이 나쁜 새끼들아, 남 가지고 신나게 잡지 팔아먹었으면 당연히 뽀찌는 좀 떼줘야하는 거 아니냐?
“플로리앙 씨.”
“네 사장님.”
“얘네 이거 얼마에 팔아먹고 있습니까?”
“아마...한 부 당, 5수 내지 10수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생각보다 싸네, 뭐 윤전기라도 대량으로 돌린답니까?”
“윤...전기요?”
“그 왜, 막 돌아가면서 책 찍어내는 거 있지 않습니까.”
그 왜 조폐공사 같은 곳에서 지폐 찍어내는 기계 있지 않나.
그러나 플로리앙 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전 처음 들어봅니다만.”
“그..렇습니까?”
윤전기가 처음 발명된 게 언제지? 신문이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된 게...
“음...플로리앙 씨, 부탁하나만 할게요.”
“예, 사장님. 말씀하시죠.”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플로리앙 씨의 눈을 보면서 얘기했다.
“내일 무조건 왕립 아카데미나 특허청 쪽에 가서 ‘윤전기’라는 물건에 대해 알아보고 오세요. 이거 잘하면 대박 하나 건질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지요.”
윤전기 하나 제대로 특허 내고 만들어서 신문이나 잡지 찍어내면 가격경쟁력에서 윤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다른 인쇄소랑 게임도 안 되고, 나중에 지폐나 채권을 찍을 때도 윤전기를 사용해서 대량으로 찍을 수 있으니까 일석이조 아닌가.
“···사장님이 오랜만에 파리에 오신 게 처음에는 좀 반가웠는데, 이제는 어서 빨리 베르사유로 다시 가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네요. 일이 계속 늘어나니 원.”
플로리앙 씨는 삐죽 나온 입으로 투덜댔다.
“어허, 음해하지 마시라니깐. 월급도 이번에 올려드릴 게요.”
“차라리 저처럼 일할 사람을 한 분 더 뽑게 해주시죠.”
“음...하기야 지금 업무가 좀 많긴 하죠?”
“···많다 뿐일 까요?”
이건 뭐 안 뽑으면 때려죽일 눈빛인데.
“알겠습니다. 한 명 더 뽑도록 하죠. 대신 콩도르세 후작님한테 추천 받으세요. 조폐국장이시니까 제대로 된 사무직 한 두 명은 추천해주시지 않을까 싶네요.”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플로리앙 씨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감축드리옵나이다, 폐하!”
“루이필리프 오를레앙 폐하, 만세! 만세! 만세!”
“하하 고맙소, 고맙소! 내가, 아 이런 말실수를 했군. ‘짐’이 곧, 랭스에서 대관을 받게 된 것은 모두 경들의 덕이오. 짐이 이제 베르사유로 귀환하는 그날, 경들에게는 모두 마땅한 몫의 성은이 내려갈 것이외다!”
“““만세! 만세! 만세!”””
오를레앙 대공은 자신의 저택, 팔레 르와얄에 모인 특권층이 자신을 향해 손을 높이 뻗고 만세를 연창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사실 루이 16세에게 편지를 보낸 이후로도, 베르사유에 심어놓은 자신의 심복들을 통해 계속 국민의회와 루이의 동향을 전해 받은 오를레앙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오를레앙의 감시에도 이렇다 할 이상한 동태는 적발되지 않았다.
루이 16세는 하루 종일 궁전에 틀어박혀 있고, 국민의회는 세제 개혁안과 인권인지 뭔지 하는 선언 준비로 여념이 없는 상태다.
재무총감으로 선출된 애송이 놈과 루이가 몇 번 접촉했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으레 따라오는 내용은 재무총감은 잔뜩 열 받은 상태로 깽판을 쳤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의회에서 왕에게 옥좌 뒤에 숨었다니 뭐니 한 골수 반역분자 아니던가.
‘앞으로 네 달, 네 달만 있으면 랭스, 랭스 다음은 베르사유 정문. 베르사유정문 다음은, 거울의 방이다.’
“하하하하!”
오를레앙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참을 레야 참을 수가 없었다.
거울의 방!
그 얼마나 웅장한 곳인가. 그 곳에 앉게 될 오를레앙 자신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바람에 둥실둥실 떠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이 파리를 잠시 방문한지 4개월이 지나고.
1789년 12월 초순, 파리 동부 생 망데. 오후 11시 30분.
“흐아아암”
파리 경찰청 소속의 경장, 아니 3계급 특진으로 경감이 된 파트리크는 길게 하품소리를 내며 팔을 위로 쭉 뻗었다.
흡-하는 소리와 함께 끝까지 핀 팔에 힘을 주자, 수 시간동안 가만히 앉아있던 탓에 뻐근해진 파트리크의 몸이 두둑-하며 풀어졌다.
임시초소 벽에 걸어놓은 램프에 비친 그림자 또한 그런 파트리크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일렁였다.
“···나른하구만.”
파트리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나른하다고 불평을 부리다니,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불과 다섯 달 전까지만 해도 파리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나. 민중들이 몰려가 바스티유를 함락시키고 요새 사령관을 효수한 것도 모자라,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키던게 다섯 달 전의 파리였다.
파트리크 자신의 동료들 중 운 나쁜 경관들 몇몇은 그 소란에 휘말려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기도 했는데, 초소 지키는 게 나른하다고 말하다니.
게다가 경감이라는 파트리크의 계급도, 임시직 아니었던가. 상관이 줄줄이 도망 가버린 탓에 말이다.
“···내가 복에 겨웠어, 복에. 에휴.”
파트리크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초소 밖이 보이는 창문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러나 싱숭생숭해진 마음 탓일까, 파트리크는 가만히 있으면 있을수록 무언가 깊은 곳으로 점차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기분이 처졌다.
“···차라리, 이렇게 앉아서 궁상떠는 것 보다 순찰이라도 도는 게 훨씬 낫겠어.”
파트리크는 탁자에 놓인 경찰모를 다시 머리에 쓰고, 램프를 손에 쥔 뒤 초소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휘이이잉
“···젠장, 불안하게시리. 세이렌이 내는 소리도 아니고 이게 뭐람.”
파트리크는 괜시리 떨려오는 몸을 다시 움츠리고 램프를 들어 초소 주위를 저벅저벅 걸었다.
하늘에서는 진눈깨비인지 뭔지 모를 하얀 눈송이가 조금씩 내려오고 있어, 어느새 파트리크의 경찰모 일부에 흰 점이 군데군데 생겨났다.
늦은 오후의 밤. 초소의 근처는 오직 파트리크가 들고 있는 램프와, 초소 안에 피운 난로의 빛을 제외하고는 어떤 빛 비스무리 한 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느 때와 같은 칠흑처럼 새까만 어둠이, 오늘따라 파트리크는 소름이 돋아났다.
“제길, 이래서 죽은 사람 얘기는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건가.”
결국 파트리크는 다시 문을 열고 초소 안으로 들어가려했다. 물론 들어가기 전에 경찰모에 쌓인 눈을 터는 것도 잊지 않고.
“진눈깨비 주제에 뭐 이리 많이 쌓인 거야?”
파트리크는 투덜거리며 램프를 바닥에 놓고 손으로 경찰모를 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초소 뒤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덜커덕! 덜컹! 덜커덩!
파트리크는 경찰모를 털던 손을 멈추고 바닥에 놓은 램프를 서둘러 손에 쥔 채, 초소 뒤 쪽 길로 황급히 뛰쳐나갔다.
초소 벽을 돌아 나온 파트리크는 기겁하고 말았다.
“으, 으아악!”
보통 마차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될 만한 크기의 마차가 좌우로 덜컹거리면서 질주하고 있었다.
“비, 비키세요! 비켜! 비키라고!”
“듀퐁! 더 빨리 가야한다! 어서! 어서!”
결국 파트리크는 다리가 풀려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그런 파트리크의 코앞으로 그 거대한 마차가 덜커덩 거리면서 쏜살같이 지나갔다.
파트리크는 넋이 나간 채, 마차를 눈으로 쫓을 수밖에 없었다.
***
“선생님! 물 온도는 어떻습니까!?”
“아직 팔팔 끓고 있다! 어서 빨리 랭스로 가는 코너길마다 뿌려야해!”
말고삐를 연신 위아래로 힘차게 흔드는 듀퐁의 뒤로, 라부아지에는 펄펄 끓는 물로 가득 찬 오크통들을 보물단지마냥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