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임시정부 (5) (52/341)

임시정부 (5)

“···국왕께서 왕비님을 통해 저에게 부탁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왕비님 스스로 저에게 부탁하시는 겁니까.”

“온전히 저 스스로의 뜻이랍니다, 총감.”

“으음...”

나는 짧은 신음과 함께 책상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루이 16세.

아마 원 역사대로라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머리가 뎅-강하면서 루/이 16세가 될 사람이다.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 뒤를 따라 마/리가 되겠지.

이미 왕에 대한 사람들의 충성심도 용병대의 파리 진군 사건으로 인해 한 풀꺾인 상태다.

그럼에도, 아직 이 시대.

봉건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왕이란 사람은 무조건 있어야하는 사람이다.

21세기 현대에서 대통령이나 총리가 수도 근처에 독단적인 판단으로 군대를 끌고 왔다면 바로 탄핵이니 뭐니는 물론이요, 사회적으로 매장 당했겠지만.

파리 시민들과 의원들은 왕에 대해 실망은 표출할망정 머리를 자르자!-거나 머리에 피뢰침을 꽂고 통구이로 만들어버리자!-라는 말은 아직까지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분노케 하는 어떤 사건이 원역사에는 존재했다는 건데.

이완용처럼 나라를 영국이나 독일에 팔아먹기라도 한건가.

아무튼 이건 얽혀서는 안 될 문제고, 썩어 있을 확률이 압도적인 동아줄을 잡아야할 만큼 내가 빈곤한 처지도 아닌데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지.

게다가 나는 이미 국왕 면전에 대고 으르렁거린 적이 있는 사람 아닌가. 루이 16세가 보기에는 내가 자기한테 아아아아아주 반동적인 사람일 거다.

나는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만, 제가 굳이 국왕폐하를 만나 봬야 할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설령 왕비님의 부탁이여도 말입니다.”

“그런가요?”

아예 선을 딱 그어버리는 내 말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별로 동요하지 않는 듯 가볍게 답했다.

“···제가 왕비님의 부탁을 받아드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나보군요.”

“네, 어느 정도는.”

왕비는 기품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다시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내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라.

그걸 뻔히 짐작하고 있으면서 날 찾았다면, 내게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속에 품고 날 찾아왔다는 건가?

내 방을 채우던 톡톡 소리가 멈췄다.

“왕비님, 그렇다면 패를 한 번 보여주시겠습니까?”

“기꺼이.”

국민의회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과 프랑스왕국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선이 서로 맞닿았다.

***

“만약 재무총감이 국왕 폐하를 만나겠다면 전 프랑스왕국의 왕비로서, 모든 힘을 재무총감에게 실어주도록 하겠어요.”

“···글쎄요. 이미 전 국민의회의 인가를 받아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만.”

“어머, 그 것만으로는 총감이 생각하고 있는 개혁을 밀어붙이기엔 부족할 텐데요?”

“개혁이라, 이미 제가 의회에서 발의한 대부분의 개혁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재무총감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마리 앙투아네트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재무총감은, 교회와 성직자들의 재산에 관심이 많으시잖아요?”

“···.”

아니, 어떻게 알았지. 설마 독심술이라도 쓰시나?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본 듯, 마리 앙투아네트는 말을 이었다.

“설마 본녀를 마녀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후훗.”

씁. 이거까지 보시다니, 마녀가 맞는 듯 싶기도?

나는 잠시 얼이 빠졌던 얼굴을 원래대로 돌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글쎄요. 재무총감이라면 그럴 것 같아서요.”

“음...”

“본녀가 생각하기에 재무총감은 누구보다 따듯한 사람이에요. 그 누구라도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씨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걸 현실에 옮기기는 힘든 법이죠.”

그 현실이 혹독하면 혹독할수록 어려움은 그 배가 되구요. 왕비는 덧붙였다.

“재무총감은, 본녀와 만났던 겨울을 기억하시나요?”

“···예. 기억합니다. 많이 추웠던 날이었죠.”

“그래요. 그 추운 날에, 재무총감은 밖에 나와 사람들을 돕지 않았던가요. 오들오들 떨던 꼬마아이까지 보듬어주던 사람이 바로 재무총감 아니었나요.”

“···.”

아니 뭐. 그거야 저 살려고 하다보니까 어쩌다 그렇게 된 건데.

“그런 청년이 재무총감이라는 자리에 올랐으니 할 일은 하나뿐이겠지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일 말이에요. 그렇다면 재무총감은 분명 막대한 부를 쌓아 둔 교회에 눈을 들이고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제가 숨겨둔 패랍니다. 왕비는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왕비님 말대로 교회를 때린다고 가정하고, 왕비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절 어떻게 도와주실 건가요.”

“제가 직접 추기경을 만나 담판을 짓도록 하겠어요. 왕실의 지지가 있다면 교회도 반대하기 어려울 거랍니다.”

이야, 이건 좀 쎈데.

“그럴 경우에는 교회와 성직자의 비난이 왕비님에게 갈 텐데, 괜찮습니까?”

“호호, 어차피 본녀에게는 이제 떨어질 위신도 없답니다. 재무총감.”

아주 작정을 하고 오셨군.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그녀의 눈을 마주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이제 국왕폐하와 만나 뭘 해드리면 됩니까.”

내 말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눈이 잠시 흐려졌다.

“그건...”

잠시 입술을 꽉 물고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천천히 입을 열고 말했다.

“폐하를 멈춰주세요.”

“예?”

“폐하께서, 마지막 남은 용병대로 베르사유를 공격하려 하십니다.”

···예? 뭐요?

***

“왜, 이제 와서 짐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가?”

베르사유 궁전의 전쟁의 방. 고조부 루이 14세의 용맹한 모습이 조각된 장식 앞에 선 거한의 국왕은, 방문객에게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여간에 저러니까 대가리가 날아가지, 예비 듀라한 새끼야.

“뭐, 저도 딱히 폐하를 뵙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설마 또 의회에서처럼 짐에게 핀잔이라도 주려는 겐가? 옥좌뒤에 숨었다니 뭐니 하면서?”

“글쎄요. 핀잔이 될지, 뭐가 될지는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거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

“···.”

한참 서로를 노려보던 우리 두 사람은, 결국 왕이 먼저 입을 염으로써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그래 그만 싸우고 얘기하지. 무엇 때문에 짐을 찾아왔는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플랑드르 용병연대. 진짭니까?”

내 말에 루이 16세는 그 커다란 몸을 움찔했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쏘아보며 말했다.

“···자네, 어디서 들었나.”

하, 반응 보니까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한 게 진짜였네.

이런 미친 싸이코 새끼가.

니가 아즈모단이야? 죄악의 군단장이냐고.

“···그 군대로 대체 뭘 하려 한 겁니까?”

“알 것 없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당장 용병대를 원대 복귀 시키세요!”

“···그래. 이제는 짐에게 마지막 남은 연대마저도 빼앗아 가려는 겐가.”

루이 16세는 그 말을 마치고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오를레앙 놈은 이 병신같은 자리에 그렇게 집착을 한단 말인가!”

뭐야. 갑자기 무슨 소리래.

“그래! 재무총감! 웃기지 않은가? 내 사촌이란 놈들은 하나 같이 이 짐의 왕좌가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것인 마냥 군침을 흘려대는데, 정작 자리에 앉은 짐은 온종일 자네들에게 시달리기만 하니 말이야!

사실은 오를레앙 그 놈이 나에게 말하더군, 군대를 모아서 자네들을 무찌르라고 말이야. 뒤로는 갖은 더러운 수를 다 써서 날 공격하는 놈이 말이지.”

참으로 희극 그 자체 아닌가. 루이 16세는 덧 붙였다.

“총감 말대로 연대는 회군시키도록 하겠네. 다만 앞으로는 이렇게 늦게 들이닥쳐서 뺏어가지 말고 미리미리 내 손에서 뺏어 가줬으면 하네. 물론 이제 짐에게 남은 게 뭔 지는 잘 모르겠네만. 아, 다음은 혹시 왕관인가? 왕관은 넘기기 좀 껄끄럽네만, 이게 조부 대부터 내려온 왕관이라 말이네.”

루이 16세는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속사포로 말했다.

“···그... 좀 진정하시고 말씀하시지요...”

아저씨 나 좀 무서운데...그만해주면 안될까?

그런 내 말에도 불구하고 루이는 한참을 혼자 이러쿵저러쿵 떠들다가 지친 듯 의자에 턱 하고 걸터앉았다.

“···괜찮으십니까?”

“···재무총감. 내 하나 물어봐도 되겠는가?”

왕은 힘없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고 말했다.

“짐이, 무얼 잘못했는가...? 짐은, 아니 나는 정녕 모르겠네. 자네가 날 보고 옥좌 뒤에 숨었다고 했었지. 그래,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어.

고조부님처럼 군왕으로 군림하고자 할 수도 없고, 필리프 대왕처럼 간교하지도 않지. 그렇다고 앙리 대왕처럼 포옹력 있지도 않네. 옥좌 뒤에 숨었다-라!

이 얼마나 날 잘 표현해주는 말인가. 하하하!”

다시 한참을 웃던 국왕, 아니 루이 16세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2미터에 달하는 거한의 사내는, 이제 너무나도 작아보였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자리를 지켜낼 수 있겠나. 나는 이제 자신이 없네. 오히려 이러다가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네.”

나는 천천히 말했다.

“···굳이 그렇게 힘들어 하시면서까지 왕위를 지키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신기한 답변이로군. 그러면 내가 이 자리를 누구에게 넘기기라도 해야한다는 말인가.”

“제가 미리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하는 말이지만, 앞으로 왕권은 줄면 줄었지 더 늘어날 일은 없을 겁니다. 차라리 오를레앙이라는 그...”

“역적놈.”

“예, 그 역..적놈에게 줘버리시고 속 편히 사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루이 16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왕위를 포기하면, 난 대체 뭐가 되는건가? 대공?”

무슨 소리람.

“아뇨. 시민 루이 오귀스트가 되시는 겁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