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4)
나폴레옹 중위의 휴가가 잘리기 며칠 전의 베르사유 궁전.
“이것이 현재 파악한 각 부대의 실태와 주둔지 목록입니다.”
“음, 고맙습니다. 대위.”
“아닙니다, 사령관님. 저야말로 사령관님 같은 영웅을 모시게 되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국민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는 앳된 얼굴의 대위의 말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날 그 정도로 띄워주니 좀 쑥스럽군요. 아무튼 오늘 대위가 할 일은 끝났으니 이제 퇴근해도 좋습니다. 어차피 남은 일은 내가 직접 읽어보고 결재할 것 뿐이니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그, 그렇지만...”
“괜찮습니다. 요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던데, 피곤할 거 아닙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그럼 내일 봅시다, 대위.”
계속되는 라파예트의 말에, 대위는 결국 경례를 올리고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복도에서 울리는 부관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자 라파예트 사령관은 카라를 손으로 잡아끌어 헐렁하게 만들고 외투도 벗은 채 가벼운 옷차림으로 자리에 앉았다.
라파예트는 이제 남의 눈치 안 보고 의자에 허리를 쭉 기댄 채 대위가 가져온 보고서와 지도를 대조하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르세유 보병연대에서는 대위가 자기가 지휘하는 중대를 이끌고 탈영을 했고, 칼레 항구에서는 해군 장교 열 명이 도버 해협을 거쳐 영국으로 망명이라.”
개판이 따로 없군.
라파예트 국민방위대 사령관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프랑스의 군대는 보통 혼란한 상황이 아니었다. 봉건 귀족 출신의 장교들은 병사들을 사병처럼 부리면서 무장탈영을 주도해 나갔고, 곳곳에서 산발적인 약탈이나 방화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는 한숨과 함께 보고서의 첫째 장을 넘기고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독일용병 기병연대는 제 2용기병연대가 붙어서 감시하고 있다-라, 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보고서를 책상에 턱, 내려놓고 옆에 펼쳐진 지도를 횡방향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칼레, 릴, 아미앵, 파리 등 프랑스의 북부 도시들을 계속 읽어 내려가던 그의 눈이 어느 지역에 가서 움찔하고 멈추었다.
“···플랑드르.”
플랑드르 용병연대.
왕이 가지고 있는 충성스런 용병근위대 중 하나이자 혁명군의 눈에서 벗어난 유일한 용병근위대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정예부대인 그들이다. 만약 왕이 저번처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 파리를 급습한다면?
“···아니. 파리보다는 베르사유로 올 확률이 높겠군.”
라파예트는 턱을 양손으로 괸 채 말했다.
파리 60만 시민은 이미 총포로 무장한 상황이다. 아무리 정예병이라고 해도 겨우 수천에 불과한 1개 연대가 파리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을 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베르사유로 진격시켜 국민의회의 목을 노리는 게 상책이다.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겠어.”
라파예트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보고서를 들고 부대를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최소한 연대 급은 돼야 할 거고, 파리 부근 고지를 감제한 채 효과적인 억제력을 보여주려면 포병 연대를 대기시키는 게 낫겠군.”
라파예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펜으로 보고서에 쓰여 있는 한 연대의 밑에 몇 마디를 써 넣었다.
[라 페흐 포병연대, 오툉 주둔 중.]
- 상시 출동 가능하게 대기할 것
나폴레옹 중위가 1년 만에 받은 휴가가 잘리는 순간이었다.
***
같은 시각. 베르사유 궁전의 또 다른 방.
최고가격제와 로베스피에르, 두 단어는 내 잠자던 잠재의식 저편의 20년 전 기억을 꺼내오기 충분했다.
- 고3 수험생 여러분 프랑스혁명에서 기억해야 될 거 로베스피에르입니다. 알겠죠?
- 자, 최고가격제란 무엇인가. 최악의 경제정책입니다. 보시죠, 이 수요와 공급곡선에서···.
씨발! 좆됐다!
아! ‘최고가격제’ 아시는구나! 저어어엉말 갓정책 입니다!
와! 단두대! 와! 로베스피에르!
프랑스혁명의 최종보스 로선생께서 왜 나한테 강림하신 것이지? 설마 벌써부터 내 목을 단두대에 넣을 생각을 하는 건가?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재무총감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잠시 생각 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로베스피에르 의원에게, 나는 억지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최고가격제란 무엇인가. 정부가 상품에 대해 가격한도를 책정하는 걸 말한다.
즉, 정부가 딱 가격을 정하면 그 이상은 절대 돈 받고 팔 수 없다는 거지.
물론 보통 쓰레기도 아니고 분리수거도 안 되는 개쓰레기같은 정책이다.
생각해보자, 당신이 우유를 만들어서 파는데. 예를 들어 원가가 천 원이다.
그런데 정부가 그걸 오백 원까지만 받고 팔라고 하네? 그러면 그 누가 우유를 생산하려고 하겠나, 생산하면 할수록 손해인데.
그런데 생산을 안 하기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저 법의 가장 엿 같은 점은 암시장을 만들어 낸다는 거다. 수요는 있는데 공급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 수요가 다 어디로 가겠나.
결국 정부의 눈을 피해 암시장이 형성되고, 법과 질서가 통하지 않는 암시장에서는 가격이 들쑥날쑥 왔다갔다하면서 민생을 해치기 마련이다.
요컨대, 물가를 잡기는커녕 물가를 작살내는 게 ‘최고가격제’라는 정책이다.
그러니까 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있는 한 그따위 정책이 실행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 의원님? 말씀하신 최고가격제 말입니다. 조오금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가요, 재무총감님?”
내 말에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실망한 듯 한 낯으로 말했다.
나...이러다가 밉보여서 단두대로 가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경영학도의 양심을 걸고 최고가격제 같은 흉물스러운 걸 이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단 말이야.
그렇다면 이 단두대 마스터 로씨를 어떻게 해서든 설득시키는 수밖에.
나는 달달 떨리는 손을 한번 쥐었다가 펴서 진정시킨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의원님도 아시겠지만, 이 수요와 공급 곡선이라는 게 사실 인위적으로 조절하기가 까다롭단 말이죠.”
“예? 수요와 공급이라니요?”
“수요와 공급 곡선 말입니다.”
“···예? 그게 뭡니까?”
“···.”
···아저씨, 아니 미스터 단두대님. 수요와 공급 몰라요?
그러고 보니까, 마셜의 경제학이 언제 나왔더라.
“의원님, 혹시 애덤 스미스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 그 영국인 학자 말하는 겁니까? 영국 어디 교수라고 하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아직 살아있습니까?”
“뭐, 죽었다는 말은 아직 못 들어 봤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총감님?”
“아, 아닙니다.”
애덤 스미스가 아직 살아있는 세상이라니, 우리 학교 교수님이 왔더라면 기쁨에 혼절하셨겠어.
그나저나 이 미스터 단두대를 설득시키려면 일단 기본적인 경제학은 머리에 넣어줘야겠는데.
나는 종이 한 장을 꺼내 펜으로 X자를 그렸다.
“자, 의원님 바닥과 수직인 쪽을 수요라고 보고 바닥과 수평인 쪽을 공급이라고 보겠습니다. 여기 X 그래프의 가운데 만나는 점이 바로 수요와 공급량이 일치하는 지점입니다.”
어서오세요, 학점 4.3 임기찬, 아니. 기욤 드 툴롱의 간단 경제학 교실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그러니까! 만약에 최고가격을 정해놓고 정책을 편다면!?”
“···아무도 공급을 해주지 않겠군요! 이런...”
“자 한계효용이라는 걸 이제 아시겠습니까?”
“하기야 총감님 말대로군요. 사람마다 중히 여기는 것은 틀리니 말입니다!”
“채권이란 화폐가 아닙니다!”
“그러면 회수한 뒤에 바로 없애야합니까?”
“그야 씻ㅍ...큼큼 당연하지요!”
“오오!”
“자, 이자율이란···.”
“오호라!”
근 2주일에 달하는 시간 동안 나는 우리 미스터 단두대, 로베스피에르 의원의 머리에 내가 전생에 대학교에서 배운 기본적인 경제지식을 때려 박고 있었다.
엣헴. 내가 이래봬도 전공 필수로 들은 경제학개론 A+출신이다 이거야.
물론 학교 공부랑 실제 사업이랑은 괴리감이 많긴 했지만.
크흡, 또 안 좋은 기억이.
“총감님이 계속 재직하시는 동안에는 경제에 대해 별 걱정 없겠군요.”
“아니 뭘 그렇게까지 말씀하십니까.”
로베스피에르는 활짝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총감님. 제 식견이 많이 얇다는 걸 알겠더군요.”
“사람마다 전문분야가 있는 거죠. 너무 심려치 마세요. 저도 법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지 않습니까.”
나 참, 이렇게 젠틀한 사람이 어떻게 단두대에서 수백 명의 목을 자르는 잔혹한 사람이 됐다는 거지.
어디서 뒤통수라도 세게 후려 맞은 걸까.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총감님. 오늘도 신세 많이 졌습니다.”
“예, 살펴 들어가세요. 로베스피에르 의원님.”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고개를 까닥 움직여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아, 이제야 좀 쉬겠구만. 역시 쉬는 게 제일 좋단 말이지.
그러나 그런 나의 기대는 불과 십여 분만에 깨지고 말았다.
***
에, 예? 어? 이게 뭔 일이지.
다른 왕족들의 옷과 비교하면 수수한 드레스를 입은 서른 네 살의 아름다운 숙녀는 자리에 앉아 내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처음 봤을 때는 긴가 민가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맞네요. 그 추운 겨울로부터 오랜만이에요, 따듯한 청년. 아니, 재무총감.”
“···설마 그때 그 부인이, 왕후마마셨습니까?”
마리 앙투아네트는 내 말에 대답 없이 다시 싱긋 웃었다가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청년과의 추억도 좋지만, 오늘은 재무총감에게 부탁을 하러 왔답니다.”
“···무슨 일이시길래...”
왕후는 내 말에 웃음을 싹 감춘 뒤, 진지한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국왕 폐하를, 남편을 만나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