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3)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화려한 방이자, 17개의 거대한 거울이 모여 장관을 이루는 거울의 방에는.
2미터에 달하는 큰 키에 부르봉 왕가의 상징인 세 떨기의 백합꽃을 황금색으로 수놓은 휘황찬란한 망토를 두른 남자가 홀로 서 있었다.
십수 년 전, 모든 이들에게 박수세례를 받으며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던 그 자리에서 그는 차례차례 그 커다랗고 화려한 거울을 하나씩 하나씩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걸었다.
거울을 모두 눈에 담은 그는, 이제 고개를 들어 천장에 그려져 있는 웅장한 프레스코화를 천천히 눈에 담기 시작했다.
고조부, 태양왕 루이 14세가 독일인들의 땅인 마스트리히트를 용맹하게 정복하는 그림부터.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둘러쌓인 신성한 모습까지.
그 모든 모습을 천천히 자신의 눈동자에 머금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할바마마. 그러니까···.”
‘저에게도 그 대단하신 능력의 반만 물려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차마 뒤에 이어지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루이 16세는 목울대를 억지로 움직여 몸 안 깊숙한 곳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드넓은 유럽을 상대로 위업을 떨쳤던 고조부와 달리 손자는 이제 한낱 평민들에 의해 모든 권력을 빼앗길 위기를 겪고 있었다.
‘혁명군’이라는 자들이 그의 가슴팍에 반강제로 단 조악한 삼색기 휘장은, 그가 어떤 상황에 빠져있는지 여념 없이 보여줬다.
“짐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려 하면서, 정작 짐이 자신들과 함께하길 원한다니.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군.”
루이 16세는 가슴에 달린 삼색기 휘장을 잠시 떼어내 손에 쥐고서 피식 웃었다.
그는 다시 가슴팍에 휘장을 꽂은 뒤, 천천히 창가에 다가가 창 너머를 지긋이 바라보자, 베르사유 궁전의 자랑인 드넓은 정원이 그의 눈에 담겼다.
그러나 루이는 그 정원의 너머를 보고자했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파리에 있는 사촌 오를레앙을.
“···왜? 이 왕좌에 막상 눈앞에 아른아른 거리니까, 그 왕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게 영 맘에 안 들더냐? 탐욕스러운 놈.”
루이 16세는 오늘 새벽 모두가 잠들어 있던 시간, 오를레앙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되짚어보며 말했다.
[플랑드르 용병연대를 베르사유로 불러들이게. - 친애하는 사촌, 오를레앙이 -]
***
파리, 오를레앙 대공의 팔레 르와얄 저택.
오를레앙 대공은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한쪽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사촌이자 왕, 루이가 자신이 보낸 밀서에 대해 제발 긍정해줬으면 하는 걱정과 조급함 때문이었다.
‘루이, 너도 알지 않나.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거!’
국민의회인지 뭔지 그 역도들이 권력을 쥐고 폭주하고 있다.
봉건 권리 폐지라니! 세상에! 어떤 미치광이가 그따위 시대에 거스르는 짓을 한단 말인가. 이 나라를 미국이라는 그 거렁뱅이이자 거지 집단처럼 만들려는 속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영주가 없고 귀족이 없으면 지방은 누가 다스리고 발전은 누가 시킨단 말인가.
우매한 백성들이 그렇게 잘나고 능력이 있다면 왜 미국인들이 영국에게 그렇게 밀렸단 말인가.
그 허약한 미국인들은 고작해야 얼마 되지도 않는 영국군에게 쫓기다가 근본 넘치는 우리 프랑스가 도움의 손길을 건네 겨우 살아나지 않았나.
그러니 미국인들의 멍청한 민주주의니 뭐니 하는 건 미국으로 하여금 수백년, 수천 년이 걸려도 프랑스의 일개 주보다 못살게 만들 거다.
“그래도 그걸 내 입으로 말하고 다닐 수는 없단 말이지.”
오를레앙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민들을 후원해 바스티유를 무너뜨릴 수 있게 도와주고 계몽주의자들을 후원한 자신이다. 누군가가 본다면 왜 한입으로 두말 하냐고 묻겠지.
“내가 바꾸고 싶었던 건 왕좌의 주인이지 평민 나부랭이들의 생활 따위가 아니었단 말이다.”
오를레앙의 생각은 단순했다.
평민들과 멋모르는 계몽주의자들을 이용해, 루이를 흔들고 그 혼란을 자신이 수습해 왕이 된다.
계획은 잘 이어지고 있었다.
바스티유를 함락시켰고, 루이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다음 왕으로 추대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왕이 돼봤자 실권 하나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러니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루이를 도와 저 국민의회라는 미치광이들을 밀어 내야한다.
그리고 지금이 그 적기고.
“지방에서는 봉건 권리의 폐지에 대해 영주들이 들고 일어났고, 군대에서는 부대를 이끌고 탈영하는 귀족 장교들이 속출하고 있으니. 지금 루이가 결단을 내린다면 역도들을 베르사유에 가둬 모두 씨를 말릴 수 있다.”
물론 악명은 루이가 모두 안고 가고, 오를레앙 자신은 뒤에서 사태를 관망하다가 눈물 한 방울만 흘려주면 된다.
“그러니까 루이, 빨리 결단을 좀 내려주게. 그래야 나도 다른 방법을 생각하던 하지 않겠나.”
***
국민의회는 봉건 권리 폐지 선언 이후, 날 다시 재무총감으로 추천했다.
-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 뭐, 뭔가요. 기욤의원?
- 앞으로 빚에 대한 문제가 어느 정도 청산될 때까지만 저에게 힘을 실어주시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저 때문에 갈등이 많이 생겼던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바스티유를 잊으신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 ···알겠습니다, 의원.
“오홍홍 좋아용!”
아 살맛나네. 그래 진즉에 이렇게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줬으면 어디가 덧나?
나는 의회의 지지 아래, 강도 높은 경제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 일단 대물세 및 십분의 일세는 모두 폐지하겠습니다.
- 어···그러면 세수 확보에 문제가 생기지 않소?
- 아뇨. 소득에 따라 세금에 차별을 둘 겁니다.
- 아니, 그러면 너무 부르주아들에게 불리하지 않소...?
- ···?.
- 아, 알겠소. 재무총감 생각대로 하시오.
- 음, 그 다음에는 교회가 걷는 세금 중 십일조를 제외하고 모두 폐지하도록 하겠습니다.
- 뭐요?
- ···?.
- 아, 알겠소. 재무총감 생각대로 하시오.
- 잠깐만 비둘기세...? 이건 또 뭡니까 대체?
- 어...동네에 있는 비둘기 수에 따라 매기는 세금이오...
- ···예?
- 아, 알겠소. 재무총감 생각대로 하시오.
- 교통세...? 이건 또 뭡니까?
- 그건···.
- 설마 도로를 점유하고 돈을 뜯어낸다 뭐 이런 건 아니겠지요?
- ···.
- ···일반도로입니까 사유지에 있는 도로입니까.
- 일반...도로가 많소.
- ···?.
- 아, 알겠소. 재무총감 생각대로 하시오.
아, 달다. 이게 권력의 맛인가?
아니 그보다 별의별 세금이 다 있네, 진짜. 이러니까 반란이 나지.
“그나저나 맘 같아서는 성당 땅이고 돈이고 확 다 몰수하고 싶은데 뭐 방법이 없을까.”
이 시대의 성당과 성직자는 정말 답이 없다.
뭘 생산하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돈은 블랙홀마냥 호로록 다 먹어치우는데 이건 뭐 말 다했지.
제일 좋은 방법은 자기들이 알아서 헌납하는 방법뿐인데 이걸 어쩐다.
으으으음 고민이구만.
“또 무슨 사악한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연신 고민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에게, 어느새 다가온 마티유 형이 말했다.
“어허 음해하지 마시라니깐.”
“그래, 그래. 어련하시겠어. 그나저나 의원 중 한분이 널 만나보고 싶다고 찾아 왔어.”
“아 그래? 이름이 뭔데?”
마티유 형은 잠깐 미간을 찡그리고 생각하더니 말했다.
“막시밀리앙..로베스피에르라던가?”
“로베스피에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누구더라.
“아무튼 난 이만 자리 비켜줄 테니까 둘이 잘 얘기해.”
마티유 형은 그렇게 말한 후 문을 열고 내 방에서 나갔다. 곧이어 서른 즈음에 작은 키의 한 남자가 노크와 함께 웃으면서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의원님. 기욤 드 툴롱입니다.”
“하하하! 저야 말로 반갑습니다. 재무총감님. 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라고 합니다.”
난 의원에게 손짓으로 의자를 권하면서 말했다.
“의원님, 혹시 차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 괜찮습니다. 총감님. 차 대신 우유만 한 잔 주시면 됩니다.”
“오, 우유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하하, 좋아하다마다요. 아 고맙습니다.”
나에게 우유를 받은 로베스피에르 의원은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찾아뵙게 된 이유는, 제가 건의해보고 싶은 정책 때문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게 사람 일인데 도움이야 언제든 환영이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 한 번 들려주시겠습니까?”
“하하, 별거 아닙니다. ‘최고가격제’라고 일단 이름을 붙이긴 했-절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씨발! 좆 됐다!
***
1789년 7월 말, 프랑스 중남부 오툉 시.
라 페흐 포병연대 주둔지.
부사관 계급장을 단 남자는 킥킥 웃으면서 옆에 있는 장교에게 말했다.
“이야, 거 짬찌 병사들도 거의 안 당하는 걸 중위님이 당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마, 좀 조용히 안하나?”
중위 계급장의 장교는 뚱한 얼굴로 그런 부사관을 쏘아보았다.
“아, 나폴레옹 중위님도 저번에 저한테 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모, 도박에 돈을 꼴아박았으모 한마디 들어야 카지 않캈나. 내가 돈을 꼴아박은 것도 아인데 고마 들들 볶아 삐라.”
“예, 예. 알겠습니다. 휴가가 잘리신 우리 중위님. 그럼 저는 이만.”
한참을 골려먹던 부사관은 그렇게 말하고는 짤막하게 경례를 하고 저 멀리 사라졌다.
“와, 참말로 어이가 없고마.”
나폴레옹은 그런 부사관의 뒤통수에 대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 마디 한 뒤, 그대로 풀밭에 누워 풀잎 하나를 입에 물고 한참을 오물거리다 퉤-하면서 뱉었다.
“제엔장, 플랑드르 연댄가 머시긴가 왜 갑자기 지랄을 해가, 내 휴가는 왜 잘리는지 모르겠고마. 에효”
나폴레옹 중위는 한숨을 내쉬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