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임시정부 (2) (49/341)

임시정부 (2)

“아 달이 이리도 밝고 청명하니 참으로 세상이 아름답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그냥 평범하게 미친놈이 아니야.”

오랜만에 숙소에 일찍 들어와 흔들의자를 삐걱이며 달을 보고 풍월을 읊는 나를 보고 마티유 형이 말했다.

“어허 마티유 씨, 음해하지 마세요. 저는 와아아안전 이성적인 사람이라구요.”

“아, 예. 그러시군요?”

“고럼, 고럼. 난 완벽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반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요구를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미친놈일 수가 있겠나.

음음. 그래. 나는 죄가 없다. 죄는 대세파악도 못하고 콩고물 주워 먹는 것만 신경 쓰는 놈들이 문제지.

마티유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 형,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이 기욤의 여린 마음은 쉽게 상처받는다고.

“예, 예. ‘전직 재무총감’ 각하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거겠죠. 이 소위 나부랭이가 뭘 알겠습니까?”

“아아아니 뭐가 또 맘에 그렇게 안 들어서 그래?”

“의회를 그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가 지가 이성적이니 합리적니 하는데 웃겨서 그렇다, 왜!”

“그을쎄에. 그걸 그렇게 해석을 하면 안 되는데...?”

마티유 형은 이제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니 니가 개판으로 만든 걸 개판이라고 한 게 잘못된 해석이야?”

“뭐, 개판은 맞긴 한데...오히려 지금 필요한 개판일걸?”

“···뭐?”

“아잇 씻ㅍ···, 그런 눈으로 나 좀 그만 보고 잘 들어봐. 딱 까놓고 말해서 지금 우리 프랑스 재정상황은 맛이 간 정도가 아니라 썩어문드러진 정도라고.

그런데 여기서 그 돈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

“···증세?”

“증세는 무슨, 형 그러다가 몽둥이에 얻어맞고 죽어.”

“그럼 뭘 어떻게 해? 잠깐만, 너 설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귀족들 배를 가르지 않는 이상 재정은 절대 완화 못시켜. 나도 방법을 따로 생각을 해 봤는데 하나같이 실현성이 없는 방법뿐이야.”

이제 마티유 형은 팔짱을 끼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귀족들 중에서도 가난한 귀족들이 없는 건 아니야. 무분별하게 다 채간다면 더 큰 혼란이 올 게 분명해.”

“물론이지. 대강 계산을 해봤는데 10만 리브르 정도 자산 이상을 가진 쪽에 한해서 2할 내지 3할 정도를 뜯으면 약 7억에서 10억 리브르 정도는 바로 수급할 수 있어.”

“···그걸 귀족들이 순순히 용납해줄까?”

“용납을 해주고 말고 문제는 이미 떠난 지 오래야. 귀족들이 자기들 배때지를 싸고도는 순간, 이제는 시민들이 달려가서 배를 직접 따줄걸?”

“차라리 만기가 긴 채권을 대신 귀족들에게 판매하는 건 어때?”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채권을 판매한다? 뭐 좋다. 그런데 만약 외국이 프랑스의 재정파산사태를 알아채고 빚 독촉을 시작하면 그 즉시 제 2의 IMF사태, 아니 IMF사태는 저리가라 수준의 위기가 올 게 분명하지.

채권은 휴지가 될 거고, 대금 상환을 위해 지폐를 계속 찍어내다 보면 정말 프랑스가 원조 짐바브웨가 될 수도 있다.

1조 리브르짜리 지폐라니 어머머 세상에나. 이 얼마나 끔찍한 물건이람.

지폐의 불신은 곧 정부의 불신으로 이어지고, 정부의 불신은 곧 금과 은 등의 현물 시세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현물시세의 상승은 실물경제 파탄을 만들 거고, 실물경제 파탄은 곧 빵 가격이 10초마다 천만 원씩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거지.

이야 그때쯤 되면 비단옷 입은 사람 머리에는 다 납탄이 박혀있겠는데?

게다가 채권이 휴지가 돼버리면 귀족들은 날 가만두겠나? 결국 서민과 귀족둘 중 아무도 아군으로 못 삼고 온 세상이 좆 돼버릴 거다.

난 최소 80까지는 잘 먹고 잘 살 거라구.

내가 고개를 흔들자, 마티유 형이 다시 입을 열고 말했다.

“그것도 안 되면 오히려 너처럼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그 사이를 조율해봐야지!”

조율? 그게 조율이 됐으면 왕 모가지가 뿅-하고 원 역사에서 날아갔겠나.

“아니, 더 골이 쌓이기 전에 지금 터뜨려서 서로 마주보고 왈가왈부하는 게 더 나을 걸.”

“···난 잘 모르겠다. 기욤아...”

난 고개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마티유 형을 보고 말했다.

“쉽게 생각해, 형. 지금 우리가 왜 여기, 베르사유에 있는지부터 봐봐. 신분간에 딱 터놓고 얘기 한마디 없이 서로 속에만 담아놓다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음.”

“서로 속에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내고 진심을 확인하면 처음이 좀 힘들지라도 나중에는 편할 거야.”

마티유 형은 내 말에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뱉었다.

“후...이건 뭐 미친놈인지 아니면 미친척하는 놈인 건지.”

어허 음해하지 마시라니까.

***

“당신들이 도대체 왕하고 다른 게 뭐야! 아직도 지금이 중세시대인 줄 아는 건가!”

“뭐가 어쩌고 저 째? 이 평민 놈이, 몇 번 두둔 좀 해줬다고 내가 네놈 급으로 보이느냐!”

바스티유 요새 함락으로부터 닷새 뒤, 임시정부 수립으로부터 삼일 뒤.

1789년 7월 19일 베르사유 궁전, 국민의회.

엠마뉘엘 시에예스는 팔걸이에 한손을 걸친 채, 콧잔등과 이마를 연신 쓸어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기욤 군. 난 자네를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다 같이 만세를 부르던 국민의회장은, 임시정부 수립 하루 만에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이 사퇴하면서 험한 말이 오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이 사퇴하면서 말한 내용 때문에 험한 말이 오가고 있었다.

- 예, 안녕하십니까.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입니다. 시간이 아까우니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재무총감직을 그만 두렵니다. 다음 재무총감이 누가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쪼록 잘 헤쳐나가시길 빕니다.

- 아, 아니 기욤 총감! 부임 하루 만에 사퇴라니요?!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 아 그거요? 제 경제정책이 참 맘에 안 드신다고 어깃장만 놓으셔서 그럽니다.

- ···예?

- 영주의 봉건적 권리도 포기하기 싫으시고 10만 리브르 이상 자산가들에게 재산세 1할 부과도 싫으시다는 분들이 있어서요. 아무튼 잘해보시고 일 다 끝나면 불러주십쇼. 그럼 이만.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 아니 ‘전임’ 재무총감 기욤 드 툴롱은 그렇게 말하고는, 모든 의원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얼이 빠져있을 때 유유히 문을 열고 의회를 나갔다.

그 날 이후 의회는 모든 중세시대의 잔재를 치워버리자는 쪽과 너무 급진적인 변화는 힘들다는 쪽으로 의견이 갈려 갑론을박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물론 숫자는 2:1 정도로 개혁 쪽 인사가 더 많았지만 30퍼센트라는 숫자는 반대 또한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정말로 겨우 세운 임시정부와 국민의회가 자멸하고 말겠어.”

콧잔등을 쓸어내리는 시에예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기욤이 사퇴하던 날 밤, 기욤의 숙소에 찾아간 시에예스에게 기욤이 말해준 말이 생각났다.

- 사제님, 차라리 지금 말로 싸우는 게 나중에 총칼로 싸우는 것 보다 낫지 않을까요?

“음...”

시에예스는 낮은 신음과 함께 침을 한 번 목 뒤로 넘겼다.

“하기야...언제고 한 번 부딪힐 일은 맞지. 그래, 차라리 기욤 군 말대로 곪아터질 때까지 놔둘 바에야 지금 터트리는 게 맞을 수도 있겠어.”

시에예스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난 뒤, 갑론을박 중인 의원들을 지나 에기옹공작의 옆 자리에 앉았다.

척 보기에도 상당한 값이 나갈 법한 외투를 입은 근엄한 얼굴의 공작은 시에 예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했다.

“나에게는 무슨 일이오, 시에예스 대주교.”

“대주교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군요. 공작 각하.”

“흠. 그러면 시에예스 의원이라고 불러주리다.”

“훨씬 낫군요.”

공작은 시에예스를 곁눈질로 한번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의원, 다시 묻겠소. 나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소?”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각하.”

“으음. 그대도 알겠지만 나는 이미 내가 가진 봉건적 권리의 대부분을 포기했소. 내가 더 해줄 것은 없다고 보오만?”

시에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공작 각하께서 하신 명예로운 행동이야 알고 있지요. 다만 저는 공작각하께서 명예로운 행동을 한 번만 더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에기옹 공작은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흠-소리를 내었다.

“다른 이들이 아니라, ···내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소?”

공작은 이제 시에예스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런 공작의 모습에 시에 예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이 프랑스의 제일가는 영주이시자, 의회에 있는 푸른 피 중 가장 높으신 분아닙니까.”

“···좋소, 일단은 얼마나 큰 일이길래 날 찾는지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소.”

시에예스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귀족을 규합해서 봉건적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게 해주십시오.”

“하하하!”

에기옹 공작은 크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에기옹 공작은 눈에 고인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하아아···. 이보시오, 시에예스 의원.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고 있소?”

“물론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오?”

그러나 시에예스는 공작의 말에 씨익 웃을 뿐이었다.

“공작 각하. 사람은 분위기를 많이 탄다는 것, 아십니까?”

“···나보고 바람잡이 역할을 해달라는 거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이미 포기하신 특권 아닙니까, 한 번만 도와주시지요.”

에기옹 공작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소, 그러면 내가 그랬다고 치고. 나에게 뭔가 오는 것이라도 있소?”

“글쎄요. 전직 대주교가 내려주는 면죄부는 어떠십니까?”

“면죄부라, 무슨 뜻이오?”

시에예스는 에기옹 공작에게서 시선을 떼고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회의장 한가운데를 빤히 쳐다며 말했다.

“지방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는 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날 지금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전 지금 협박이 아니라 살 길을 찾아드리는 겁니다.”

“의원도 알잖소. 나는 이미 내 특권을 내려놓은지 오래요.”

“물론 에기옹 공작 각하야, 영주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시는 분이니 무사하실 테지요. 다만, 다른 귀족들 같은 경우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허, 나에게 다른 귀족들의 운명이 달려있다-뭐 이런 식으로 양심의 가책을지게 만드는 거요? 차라리 그대가 오자마자 쫓아낼 걸 그랬군.”

떨떠름하게 변한 얼굴의 에기옹 공작과는 달리 시에예스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맞습니다만, 공작 각하께서 제 말대로 바람잡이 역할을 해주신다면 후세에 어떻게 기록되실지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굉장히 명예로운 일 아닙니까.”

가장 높은 자리의 푸른 피가 진정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다!

시에예스는 마치 오페라 가수처럼 과장된 말투로 덧붙였다.

그 말에, 에기옹 공작은 오른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깊이 고민하더니 시에 예스를 보고 말했다.

“좋소. 내 한 번 그대 마음대로 연극 한 번 해보리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공작 각하!”

다음 날 1789년 7월 20일 아침, 국민의회.

“부패한 구시대를 개혁하고자 모인 우리 의회가, 조그마한 갈등 하나에 이렇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겠소이다.

애초에 나, 에기옹 공작이 받은 봉토와 봉건적 권리는 이제 시대의 뒷길로 사라질 구태의연한 제도에 불과한 바.

나는 우리 국민의회의 명예로운 뜻과 나 스스로 뒷세대에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내가 지는 모든 봉건적 권리를 포기하겠소.

부디 나의 행동이 나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스스로 고귀하다 여기는 모든 푸른 피가 이에 열광하고 행동해주었으면 하는 바요.“

에기옹 공작을 시작으로 국민의회의 의원들은 모든 봉건적 권리를 포기와 폐기를 선언했다.

***

"뭐야! 파리 놈들이 지금 우리 푸른 피를 뭘로 보고 있는 거야! 국민의회고 나발이고 다 좆까라고 해!"

물론 파리를 제외한 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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