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임시정부 (1) (48/341)

임시정부 (1)

바스티유 요새 함락으로부터 이틀 뒤,

1789년 7월 16일.

- 기욤 드 툴롱! 드높은 프랑스 왕국의 고대 법률은 평민들이 세상에 관여하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 그런 짓을 하려 하다니, 뻔뻔하구나!

- 내 죄라면 정의를 실현했다는 것이다. 루이 오귀스트 카페, 넌 옥좌 뒤에 숨었지만 말이다.

- 닥쳐라! 네 죗값을 당장 치르게 해주마!

- 누가 나를 심판하는가! 내가 바로 프랑스 국민이다! 위정자에게는 더 큰 숙명이 있다. 무고한 국민들을 지키는 것이지. 그러나 그 잘난 법이 모두를 얽맨다면, 이제 구제도의 아래에 남지 않겠다.

- 신성 모독이다!

오늘 열린 의회도 이제 대부분의 안건이 결정되고 마지막 남은 임시정부의 자리를 배분하고 있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던 탓에, 서른을 갓 넘긴 나이의 젊은 남자는 의자에 기대어, 어제 이곳에서 있었던 그 꿈같았던 광경을 다시 머릿속에서 끝없이 재생시키고 또 다시 재생시키고 있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의 남자처럼, 루소의 책을 처음 읽었던 날처럼, 막 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그 강렬했던 기억을 계속 되뇌었다.

‘그저 호기로운 친구인 줄 알았는데,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어. 국왕이라는 작자가 이제 스물도 채 안된 새파란 의원에게 쩔쩔매는 꼴이라니!’

의회가 열리고 있는 공적인 자리라 필사적으로 입술을 다물고 웃음을 참으려 해봐도, 그의 입에서는 자꾸만 피식-하면서 공기가 빠져나왔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파리 시장에 장 바이 선거 위원을 임명하고 국왕군을 해산한 자리에 국민방위대를 창설하며 사령관으로 라파예트 장군을 추대하는 것에 이의 있으신 분 계십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국민의회 소집은 이만 마치도록 하ㄱ···.”

사회자의 마지막 말은 머릿속의 꽃밭에서 나닐던 로베스피에르를 깨웠다.

‘이런, 생각에만 잠겨있다가 가슴속에 품고 걸 하마터면 못 꺼낼 뻔했어.’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라스의 국민의원 로베스피에르가 할 말이 있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손을 들고 일어나자, 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로베스피에르 쪽으로 뻗으며 말해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저 로베스피에르는 임시정부의 재무총감으로 파리 시의 기욤 드 툴롱 의원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

“푸우웁! 쿨럭쿨럭!”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재무총감? 장난해?

“기욤 군, 자네 괜찮나?”

“잠깐 사래가 들려서...쿨럭쿨럭!”

시에예스 사제님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나한테 왜 이래. 니들이 미적지근해서 불도 대신 질러주고 총대도 대신 매줬잖아! 날 이제 그만 집에 보내줘!

아 이 게임 안 해. 나 던질 거야. 조별과제도 아니고 무슨 일이 계속 늘어난담?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시에예스 사제님이 눈을 얇게 뜬 채 말했다.

“···자네 설마 세상 꼴을 이렇게 만들고서 혼자 파리로 도망가려고 한 건 아니겠지?”

“···티 납니까?”

“아무렴 자네 얼굴에 ‘나 하기 싫어요.’하고 쓰여 있는데 그걸 모르겠나? 쯧쯧, 얼굴이나 그만 찡그리고 말하게. 사업한다는 친구가 왜 의회에서는 얼굴이 오페라 배우처럼 변하나?”

“그···하기 싫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의 차이점이랄까...요?”

내 말에 사제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기 싫으면 처음부터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했어야지. 이제 와서 자네가 그런들 누가 자네를 평범한 사람으로 봐주겠나?”

“큼큼...”

그으으건 제가 아니라 내 마음 속 작은 한국인이 그런 겁니다. 암, 그렇고말고. 난 잘못 없다 이거야.

“하아...기욤 군, 내가 예언하나 해보겠네. 물론 카산드라 뺨치는 자네만큼 용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별로 좋은 예언은 아닌 듯 싶은데 말이죠.”

“거 조용히 하고 듣기나 하게, 내 장담하는데 아마 자네 이름은 지금쯤 저어기 프랑스 반대편 툴루즈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졌을 걸세.”

“어···왜죠?”

“왜긴 왜야! 이 답답한 친구야! 방화범도 집 한 채가 아니라 한 블록을 태우면 온 동네방네 소문이 퍼지는데, 나라를 통째로 태워버린 희대의 방화범 소문이 안 나겠나? 아마 바스티유 요새를 파리 시민들이 함락시킨 것과 더불어서 자네가 한 말이 어디 잡지에 실려서 사람들 사이를 떠돌고 있을 게 분명하지.”

“···씁. 그건 좀...”

“왜, 이제야 좀 사태파악이 됐나?”

“제가 한 말을 잡지에 무단도용하다니, 저작권료는 안준답니까?”

“자네 미쳤나?”

***

“아야야, 아니 그렇다고 머리를 쥐어박을 것까지야 있나...”

난 달걀을 손에 쥐고 정수리부분을 문지르며 말했다.

사제님이 사업을 안 해봐서 모르시는데, 원래 밑에 직원들 먹여 살리려면 어디서든지 돈에 환장해 있어야 하거든요? 거 참 너무하시네 증말.

“···머리만 쥐어 박힌 게 난 더 이해 안 가는데...”

“아잇 씻팔, 마티유 형까지 이럴 거야?”

일주일 만에 돌아온 마티유 형은 팔짱을 낀 채 날 미친놈 쳐다보듯 하고 있었다.

“반란이니 뭐니 이런 일이 알고 있었으면서 말 한마디 안 해준 누구보다는 내가 낫지 않을까, 기욤아?”

“···마티유 선생님, 우리 잠시 사소한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시끄러 내가 너 살려보겠다고 얼마나 뛰어 다녔는지 알아?”

“거 다 같이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악! 거긴 멍든 곳이라고!”

“네가 말을 안 하면 내가 널 때릴 일도 줄어들 거 같아, 기욤아.”

이제 달걀을 두 손에 들고 머리에 문지르는 날 보면서, 마티유 형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말했다.

“대체 달걀은 머리에 왜 문지르고 있는지...도대체 어디 민간요법인 거야?”

“···어, 신비한 동양의 치료법이라고 생각해.”

“아니 그런 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음, 어...전생이요?

“됐다. 아무튼 너 그거 할 거야 말 거야.”

“뭐 말하는···, 아 재무총감?”

“그래.”

“그으을쎄...”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을 끌자, 마티유 형은 의아한 눈길로 날 쳐다봤다.

“글쎄라니, 재무총감이라구 재무총감! 왕 다음, 아니 니가 왕은 날려버렸으니까 프랑스에서 제일가는 자리라니까?”

“하고 말고는 무슨, 설마 의회에서 그걸 통과시켜주겠어? 추천한 사람은 한 명에다가 난 스물도 안 먹었는데 의원들이 제정신이면 이성적으로 나 안 시키지.”

“···이 녀석 이제는 자기가 이성적인 척 하네.”

무슨 소리람. 난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인데.

물론 사람이 가끔가다 조오오금? 씩은 감정적일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나.

“아무튼, 내가 무슨 재무총감이야 재무총감은. 꿈 깨 이 사람아.”

***

“씨이이이발...”

“음?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욤 총감?

“아, 아닙니다. 라파예트 사령관님...”

분명 아무도 못 들을 정도로 작게 얘기했는데 어떻게 들은 거지.

아니 그것보다 진짜 어이가 없네. 이 세상에 열여덟 살짜리한테 경제부총리를 맡기는 나라가 있다? 200년 뒤 뿌슝빠쓩 유X브 제목도 아니고 이게 뭐야 대체.

- 그러면 어제 의회 마지막에 나온 기욤 의원의 재무총감 겸직에 대해 찬반여 부를 묻도록 하겠습니다. 로베스피에르 의원 발언해 주십시오.

- 기욤 드 툴롱 의원은 우리 국민의회의 얼굴이자 선각자입니다. 또한 그는 사업가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법관출신보다 금전적인 문제에 해박하다는 뜻이지요.

- 나도 로베스피에르 의원 말에 찬성합니다.

- 나도요!

- 그가 우리 대신 짊어졌던 무게만큼 우리가 돌려줍시다! 나도 찬성이오!

와아아 너무 좋아~ 너무 좋아서 죽어버릴 것만 같은 걸. 떡 받을 사람은 생각도 안했는데 강제로 떡을 손에 들려주시다니 말이야.

“기욤 총감? 이제 총감 차례입니다.”

“아, 예.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 좀 하느라.”

라파예트 사령관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시정부와 국민의회가 만들어지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헌법의 제정이었다.

당연히 헌법은 수십 개 조항을 모든 의원들이 써내려가야 하는 바람에 최소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예정이었고, 헌법 제정 전까지 잠시 써야할 임시 시정명령을 내리기 위해 오늘 임시정부가 모인 것이다.

아, 왜 임시시정명령을 내리냐고? 이 프랑스가 ‘유럽의 중국’이기 때문이다.

국왕이 모욕을 당했다는 악의적인(?) 소식이 들리자, 아아아주 높으신 귀족출신 장교들은 집단으로 무장탈영을 하질 않나.

바스티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각지에서는 농민들이 쟁기를 가지고 영주를 패죽이는 건 예삿일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지방 곳곳에서는 귀족 출신 탈영장교들의 사병과 농민들이 부딪히는 일이 하루에도 수차례 임시정부에 보고되고 있었다.

이게 현세인지 지옥인지.

대단하다 프랑스!

“일단 모두들 알고 있으신 것처럼, 지금 우린 어마어마한 재정부채에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모두 잘 알고계신 듯 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영주’라는 직책과 모든 봉건적 권리를 없애고 그걸 세수로 끌어들인다면 어느 정도 파탄 지경인 재정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내 말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기욤 총감, 마음은 잘 알겠으나. 지금 우리 의원 중에는 귀족도 많고 귀족의 작위를 산 부자도 많소. 만약 기욤 총감 말대로 한다면···.”

“···그래서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그렇게 급진적인 방법은 조금 힘들지 않나 싶네만...”

나는 말을 꺼낸 의원 한명을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천천히 열었다.

“의원님, 지금 부채가 35억 리브르인거 아시죠?”

“···.”

“지금 제가 말한 건 예방조치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거죠. 이해하십니까?”

의원은 이제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조금 말미를 달라, 이 말이지요...”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지. 집에 빨간 딱지 붙기 직전인데 금목걸이 좀 가져다 팔겠다고 징징대는 거야 뭐야?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일정 재산 이상의 모든 사람에게 재산의 십 분의 일세 이상을 거두시죠. 일정 재산은 수중에 약 10만 리브르 이상정도 있는 사람에 한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10만 리브르면 약 150억 수준이니 중산층은 지키고 봉건영주들은 조질 수 있겠지.

누가 보면 공산주의자라고 하겠지만 낙수효과 따위는 바라지도 못할 프랑스의 수직적인 사회구조를 개혁하려면 어쩔 수 없다.

세상에 3%가 국가의 부와 토지의 7할을 먹고 있는데 이건 억지로라도 개혁해야지 뭐. 차후에 더 많은 이윤 창출이 가능한 곳에 감세와 보조금을 준다면 경기도 다시 활성화 할 수 있겠고 말이야.

나는 빨갱이가 아니에요!

그러나 나는 돌아오는 대답에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너,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오?”

극단? 극단은 무슨. 누구는 지금 하고 싶지도 않은 조장 맡아서 조별과제하려고 기를 쓰는데 거기에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장난해?

나는 웃음과 함께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난 재무총감에서 사퇴하렵니다. 알아서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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