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요새 (3)
“···부간수장.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아니요. 저한테도 보이는 걸 보니 헛것은 아닌 듯합니다.”
바스티유 요새의 사령관이자 바스티유 감옥의 간수장, 레네 드 로네이는 눈을 연신 꿈뻑였다.
도저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사실인지 의심스러워서, 그리고 믿고 싶지 않아서.
“···자네한테는 저게 뭐로 보이나?”
“붉은 기를 휘두르는 파리 시민들 말입니까?”
“아니, 그들의 손에 깃발과 함께 들려있는 것.”
로네이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은 두터운 바스티유 요새 꼭대기로부터 24m 아래에 진을 치고 있는 수백, 아니 수천 명의 인영을, 그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붉은 기를 휘둘러라 파리 시민들이여!
- 우리의 앞날을 막는, 국민의 앞날을 막는 적의 목을 베라!
- 적을 처단하려면 하나에도 용기, 둘에도 용기.
-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 자경단이다!
- 승리하면 무죄요, 실패하면 유죄이니 죽기 전엔 물러나지 않으리라.
“···다, 당신들 뭡니까! 여긴 군병원이오! 환자들이 있단 말이야!”
“죽기 싫으면 닥치고 무기창고 문이나 따시오. 군사시설이니 비상용 물자는 있겠지.”
“아니, 대체 그걸 가져다 어디에 쓰려하는 겁니까!?”
“의사양반은 더 알 거 없소. 10초 주리다. 여시오.”
레 앵발리드 군병원의 무기창고가 열렸다.
신원미상의 수천 명이, 손에 총과 검을 꼬나 쥐고 창고에서 나왔다.
“여러분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겠소! 우리 중에 누군가는 죽을 거요.
아니, 무조건 죽겠지! 하지만 죽지 않고서는 우리 발에 채워진 사슬을 풀 수 없소! 그렇다면 우리가 뭘 해야겠는가!?”
“““당통! 당통! 당통!”””
“일어서시오! 일어서서 손에 쥔 총으로 사슬을 쏴서 부숴버리시오! 저들이 우릴 군홧발로 짓밟고 죽이기 전에, 저 놈들을 우리의 발로 밟고 죽입시다!”
“““와아아아아아!”””
“우린, 바스티유로 간다! 왕이 만든, 파리의 발에 왕이 묶어놓은 그 흉물스런 사슬을 풀어내리라!”
그르넬흐, 마르스, 샹젤리제, 생 줴흐베, 루브르, 노테르담. 모든 거리가 인파로 가득 찼다.
- 푸른색은 자유요! 흰색은 평등이오! 적색은 박애일지니!
- 거기 가는 아낙네, 모자에 이 꽃 하나 꽂지 않겠습니까? 삼색꽃을 꽂고 우리와 함께 갑시다!
- 붉은 모자에 붉은 깃발, 우리는 모두 박애 밑에 하나다!
이제는 누렇게 바래버린 누런 상의를 입은 마흔 줄의 중년 남자가
이제 갓 사춘기를 넘긴, 얼굴에 솜털도 빠지지 않은 소녀가
자식들이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투덜대던 아줌마가
공장의 기계 벨트를 돌리던 여덟 살 꼬마 남자아이가
거리를 넘어 다음 거리로 붉은 깃발이 넘실댈 때마다 늘어났다.
누군가는 소총을, 누군가는 낫을, 누군가는 검을, 누군가는 빗자루를 들고.
민중이 바스티유 앞에 모였다.
***
“···이게 전부인가?”
“···예. 그렇습니다.”
로네이 간수장, 아니 바스티유 요새군 사령관 로네이의 말에 부관은 힘없이 답했다.
“다 합쳐서 병사는 백, 포는 열다섯 문뿐이라니. 하하하!”
로네이 사령관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런 그의 눈에, 요새 밖을 가득 메운 적색 깃발과 인영이 아렸다.
“···그나마 탄약은 많아서 다행이군. 하다못해 총검으로 저 숫자한테 돌격하지는 않겠어.”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면서 단단한 바스티유의 벽에 손을 댔다.
높이 24m, 길이 68m, 너비 27m의 좁지만 단단한 요새.
제대로 된 공성기구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날려버렸다던 오스만의 우르반거포같은 게 없다면 부술 엄두도 낼 수 없는 요새.
그 요새의 벽이, 오늘따라 로네이 사령관에게는 더욱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부관, 방어자가 공격자에게 비해 얼마나 유리한지 알고 있나?”
“예. 최소 세배, 최대 열배입니다.”
부관의 말에, 로네이는 성벽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부관을 쳐다보고 말했다.
“그렇지. 그런데 공격자가 민병이라면 또 어떤가?”
“···아마, 스무 배는 넘게 방어자가 유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로네이는 이제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제길. 빌어먹게 푸르기도 하군.”
“예?”
“아닐세...”
로네이는 부관의 말에 잠시 손을 올려 그의 입을 멈추고 하늘을 잠시, 그러나 또렷하게 눈동자에 담았다.
7월의 파리는, 여느 때와 같이 너무나 청명했다.
얼마나 되었을까, 로네이 사령관은 하늘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부관을 바라보았다.
“대포에, 산탄을 넣게나.”
“예. 사령관님.”
어쩐지 로네이 사령관의 말에는, 슬픔이 담겨있는 듯 했다.
***
“후우, 후.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왜인지, 남자 옷을 걸친 여자는 머리에서 벗겨질 뻔한 붉은 두건을 다시 한번 손으로 끌어내리며 말했다.
그러는 그녀의 두 손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나와 새끼손가락과 소총의 개머리판을 거쳐 땅으로 한 방울 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약혼자는 제발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했지만 자신이 언제 누구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던가.
한 시대의 정신이 이렇게 살아 숨 쉬는데 어떻게 사람이 집에 처박혀 있을 수 있겠나.
그래서 안 조세프 테르바뉴는 꿋꿋하게 사람들과 함께 외쳤다.
“““파리 시민 만세! 국민의회 만세!”””
“파리 시민 만세! 국민의회 만세!”
얼마나 외쳤을까, 요새의 성벽위로 누군가 걸어 나와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그러나 친근해 보이는 행동과 다르게, 요새 위의 남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파리의 시민들이여! 당장 집으로 돌아가시오! 이것은 마지막 경고요! 당신들은 지금 군사시설을 향해 위협을 가하고 있소이다!”
당연하게도 테르바뉴의 주변은 흥분으로 끓어올랐다.
“뭐야!? 당신들이나 당장 성벽에서 내려오란 말이다!”
“더러운 돼지들의 뒤나 닦아주는 게 군인이 할 일이냐!”
“국민의회 만세!”
성벽 위의 남자는 그 광경을 한참 쳐다보다가, 도로 모습을 감추었다.
“거봐! 저놈들도 우리한테 쫄은 게 분명해!”
“프랑스 시민 만세!”
“와아아!!!”
민중들은 손에 든 적기와 삼색기, 무기를 높게 치켜들고 환호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환호에 열중한 나머지, 나무판자로 막아놨던 요새벽의 포좌가 열리고 있는 건 눈치 채지 못했다.
“산탄 장전 끝!”
“이제 포좌 앞으로 밀어!”
덜커덕!
병사 셋이 흡!-하는 소리와 함께 대포를 볼록하게 나온 벽 사이의 포좌로 밀어 넣자, 나무로 만든 바퀴가 움직이고 육중한 대포가 묵직한 소리를 냈다.
“전 포대, 발사 대기!”
“대기!”
대포들 뒤에 선 장교의 말에, 포를 잡고 있는 병사들이 복창했다.
“전 포대는 저 역도들 한 가운데를 제대로 겨눠라!”
끼기기기긱
병사들이 포구를 돌려 제대로 조준을 하자, 나무바퀴가 돌에 비벼지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곧,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날 선 소리와 함께 뒤에 있는 장교가 검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전 포! 산탄 발사!”
“““발사!”””
콰콰쾅!
우렁찬 소리와 함께, 대포들이 뒤로 후퇴했다.
***
“···어, 뭐지?”
바닥에 쓰러진 테르바뉴의 첫 마디였다.
그녀의 눈에는 하늘이 빙빙 돌고 있었다.
테르바뉴는 저려오는 몸을 겨우 가눈 채,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사물이 세 개, 네 개로 흐릿하게 보이고 머리가 빙빙 돌고 마차를 탄 것처럼 목구멍에서 구역질이 수시로 올라왔다.
그럼에도 테르바뉴의 눈에,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보였다.
빨갛다.
“우웨에에엑!”
결국 테르바뉴는 참지 못하고 배 안의 내용물을 바깥에 쏟아냈다.
점차 돌아오는 그녀의 청력이, 눈앞의 광경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온 세상이 새빨겠다.
첫 번째 열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열의 사람들은 반쯤 보였다.
세 번째 열의 사람들은 몸의 어딘가가 한 군데씩 사라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네 번째 열의 사람들은 테르바뉴처럼 얼이 나간 채, 겨우 서있었다.
“어, 어서 도와야 ㅎ···!”
그 순간 테르바뉴의 옆에 서있던 남자는 그 말을 마치지 못하고 쓰러졌다.
타타타타탕!!!
그 남자의 뒤로 십수 명의 사람이 다시 뒤로 넘어졌다. 그들은 이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테르바뉴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성벽 위를 천천히 쳐다 봤다.
병사 수십이 다시 총알을 재고 있었다.
“···적을 부수려면 하나에도 용기, 둘에도 용기...”
테르바뉴는 옆에 쓰러진 남자의 손에 쥐어져있던 삼색기를 들고 천천히,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을 부수려면 하나에도 용기! 둘에도 용기!”
어느새, 그녀의 손에 달린 삼색기는 하늘 높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식은땀과 깃발의 원래 주인이 흘린 피 때문에 깃발을 잡은 부분이 미끌거리며 흘러내렸지만, 깃발을 든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테르바뉴는 온힘을 다해 깃발을 흔들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뒤에 있던 수천 명의 사람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나에도 용기! 둘에도 용기!”””
시민들의 피로 빨개진 땅을 박차고 달리면서, 그들은 외쳤다.
“““프랑스 만세! 파리 시민 만만세!”””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요새가 ‘폭도’들에게 함락됐다.
1789년 7월 15일.
바스티유 요새 사령관 르네이가 ‘혁명군’에게 사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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