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요새 (1)
[기욤아,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파리에 갔다 올 거다. 몸조심하고 혹시 무슨일 생기면 그냥 말 타고 도망가.]
[- 프랑수아 마티유 -]
“아니 그냥 말로 하지 무슨 종이 쪼가리에 달랑 몇 문장 써놓고 갔데.”
“음, 마티유 소위도 그럴만한 일이 있으니 그러지 않았겠는가?”
하기야 마티유 형 정도면 타당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 형이 그루시처럼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그것보다 기욤 군, 오늘 준비는 되었는가?”
사제님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준비랄 것 있나요. 오늘 전 그냥 듣기만 하렵니다.”
“허, 삼부회장을 홀랑 태워버린 주동자 되시는 분께서 웬일인가?”
그렇게 홀랑 다 태워버렸으니까 그렇죠. 제 성격에 나대는 건 딱 질색이라.
“어차피 오늘은 국왕이 나오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굳이 뭐 제가 나설 건덕지도 없을 것 같은데요.”
“그야 그렇긴 하네만. 좀 아쉬운 걸. 개인적으로 자네의 화끈한 불질도 좀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시에예스 사제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껄껄 웃어댔다.
거참 남 골려먹기 좋아하시는 분이야 정말.
“왕이 나오는데 불질하면 저 정말 죽는 거 아시죠?”
“농담이네 농담. 하하하!”
우리 사제님 정말 기분 좋아보이시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웃음이 떠나시질 않네요.”
사제님은 내 말에 눈썹을 위로 씰룩 움직이면서 웃더니 말했다.
“그럼! 국왕이 나온다는데 안 좋을 수가 있나! 그도 이제는 우리 국민의회의 힘과 의지를 알아본 게지.”
어...글쎄요?
애초에 그렇게 깨어있는 사람이었으면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가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지.
“···표정이 왜 그러나? 자네는 달리 생각하는 겐가?”
“뭐, 전 딱히 기대하고 있지는 않아서요.”
“에이, 매사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게.”
사제님의 말에, 나는 그저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따라서 짐은 세 신분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며, 과세는 모든 신분에게 동일에게 적용될 것이나 영주에게 바치는 지대 등 평민들의 봉건적인 의무는 과거와 같이 짊어져야 할 것이다.”
“미쳤군.”
“돌아버린 건가?”
“저게...왕...?”
“재산 또한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귀족이 지닌 토지에 대한 특권과 명예의 특권, 개인이 가지고 있는 봉토도 마찬가지다.”
“···하?”
“어이가 없군 그래.”
“우리의 말을 들어준다고 한 건 모두 거짓말이었나?”
“만일 의원들이 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짐만을 국민의 대표로 간주할 것이며, 짐의 특별한 승인 없이는 자네들의 어떠한 의결도 효력이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 이상으로 오늘의 회의는 해산하도록 하라.”
“···.”
“···.”
“···.”
국왕, 루이 16세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 황금실로 그려진 망토를 펄럭이며 회의장을 나갔다.
지가 불러놓고 자기 맘대로 사람들이 안 따라주니까 이렇게 대놓고 짜증을 내시다니. 캬 증말 대단하시네 우리 국왕님.
마치 편의점 알바 할 때 느꼈던 극성 개진상 고객을 만난 듯한 기분이야.
책으로 봤을 때는 왕 모가지 따는 게 좀 잔인하지 않나 싶었는데, 막상 내가 당해보니까 이거 왕 목 충분히 딸만한데?
21세기 미래에서 온 탓에 왕에 대한 존경심이 제로인 나도 이렇게 어이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화딱지가 났을지 상상도 가질 않는다.
“···사제님. 이건 뭐 우리보고 들고 일어나라고 고사를 지내는 건가요?”
“으으음...”
내 말에 시에예스 사제님은 신음만을 조용히 토해낼 뿐이었다.
그 말고도 자리에 앉아 있는 수많은 의원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사람의 목소리 대신 분노와 회한, 실망으로 가득 찬 신음소리만이 간헐적으로 고요한 회의장을 채워 나갔다.
왕의 폐회선언에도 우리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자, 화려한 궁중 복식의 관리 몇몇이 들어와 말했다.
그들의 수는 겨우 서넛이었지만 그 서넛의 목소리만으로도 적막했던 회의장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폐하의 명입니다. 모두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주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가 회의장 구석구석에 튕겨져 나가고, 끝내 허공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누구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폐하의 명입니다. 모두들 이제 자리를 떠나주십시오...”
끝내 그 적막함을 참지 못한 관리 하나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 순간, 땅딸막한 누군가 일어섰다.
“가서 당신들을 이리 보낸 자에게 전하시오. 우리는 국민 모두의 염원에 따라 이곳에 왔으니, 총검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고.”
***
“폐하! 지금이라도 소신에게 명을 내려주신다면 저 역도무리를 단칼에 응징해 보이겠나이다!”
한껏 붉어진 얼굴로 열변을 토하는 근위대장의 모습에도, 국왕 루이 16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저물어 가는 석양을 바라만볼 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요 며칠 간 있었던 일이 뒤죽박죽 섞여 거대한 종양이 된 듯 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 파리 시민들이 국민의회의 결정에 동요한다는 전갈이옵니다. 폐하.
- 아니, 대체 누가 파리에 그런 불순분자를 풀어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가! 그래, 선량한 파리 시민들이라면 저 역도들을 잡아넣어야 한다고 말했겠지?
- 소, 송구하오나. 파리 시민들은 전적으로 국민의회를 지지한다고...
다시 생각하자, 루이 16세는 왼쪽 눈 위 언저리가 저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오를레앙 대공이, 자신의 저택을 역도들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전갈이옵니다. 폐하.
- ···그 놈이 정녕 베르사유 궁전에 발을 디디려하는구나.
이번에는 오른 쪽 눈 위 언저리가 저려와, 루이 16세는 두 눈을 감은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시간이 이 이상 흐르면 흐를수록 역도들은 많아 질 터. 이제는 정녕 피를 봐야 이 혼란이 끝나겠구나. 내 결코 피를 보지 않으려 했건만 결국 당도한 곳이 자기 신민들의 안위를 해코지하고자 하는 왕의 자리라니.’
루이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근위대장을 보고 말했다.
“스위스 용병 연대와 독일 용병 연대에 비밀리에 명을 내리게. 내 명이 내려가는 즉시 파리로 진군하도록.”
‘파리가 역도들의 편에 선 이상, 프랑스인만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더 이상 믿기 어렵다. 설령 군대가 파리를 점거했다고 해도, 비열한 역도들의 선동 몇 마디에 칼자루를 바꿔 쥘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용병 연대를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구나. 하, 어이가 없군. 자국민을 타국인의 힘을 빌려 진압하는 꼴이라니.’
“소신, 절대 폐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나이다!”
루이의 명을 받고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군례를 올리는 근위대장과 달리, 루이는 쓰디 쓴 속 탓에 미간을 찌푸렸다.
***
“오이겐 공작 각하. 국왕 폐하께서 뭐라고 보내신 겁니까?”
“으음...”
독일용병 왕립기병연대장 카를 오이겐 공작은 파발이 보내준 명령문의 내용을 묻는 부관의 질문에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오이겐 공작 각하?”
그런 모습에 부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부관의 질문에, 오이겐 공작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했다.
“파리로, 진군하라는...폐하의 명이네.”
“···예? 잘못들었습니다?”
“그래. 나도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구만. 세상에서 가장 충직한 신민들이 가득한 파리가 역도들에게 점거 당했다는데...”
“역도라 하시면, 역시 오를레앙 대공 그 자 입니까?”
부관의 말에 오이겐 공작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닐세. 오를레앙 그 자라면 내 이리 시간 끌지도 않았지. 역도라고 하면 딱 그 자 아니겠나.”
“오를레앙 대공도 아니라면...소관은 누가 파리를 점거했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이겐 공작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명령문에 의하면 파리 시민들이 파리를 점거했다는 소식이네.”
그의 말에, 부관은 벙 찐 표정으로 오이겐 공작을 바라보았다.
“···예?”
“그래,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야. 그러니까 날 정신병자 보듯 보지 말아주게.”
“···어찌됐던 일단 폐하께서 내린 명이니 따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부관, 전 연대 즉각 완전군장하고 전투준비태세 갖추도록 하게. 행군속도는 급속행군으로, 파리까지 갈 길이 머니 말이야.”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연대장의 말에 부관은 군례를 올리며 답했다.
물론 부관이 그렇다고 그 밑에 병사들까지 아무 말 없이 따랐다는 건 아니고.
“씨발, 갑자기 무슨 전투준비태세야 전투준비태세는!”
“듣기로는 준비태세가 아니라 진짜 전투하러 간다는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파리에 역도가 나왔다더라고.”
“아니 그러면 근위대를 투입하면 될 거 아니야? 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부대야!?”
“어, 그러게?”
“거기 둘! 군장 싸는 도중에 잡담하지 않는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아무리 농땡이만 치고 있어도 프랑스 최고 전투력을 자랑하는 용병대답게, 기병연대는 수 시간 만에 행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발굽은 파리 근교에서 가로막히고 말았다.
“이보시오! 우리 기병연대는 폐하의 명을 받고 파리로 가는 길이오! 어서 길을 비켜주시오!”
다급하게 외치는 독일용병 왕립기병연대 소속 장교의 말에도 길을 막고 있는 프랑스군은 콧방귀만 뀌며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행군이 늦어지는가?”
“아! 여, 연대장님! 이 자들이 도통 말을 듣지를 않아서...”
연대장 오이겐 공작은 가운데 열에서 기다리다 못한 나머지 전열로 나와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래? 이보게! 나는 연대장 오이겐 공작일세. 그대들의 지휘관을 만나봐야겠네.”
그의 말에 방금 전까지 콧방귀를 뀌던 위병들이 깜짝 놀라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여, 연대장? 공작? 젠장 어쩌지?”
“지휘관을 불러 오랬으니까 그냥 중위님 데려올까?”
“그, 그래 그게 좋겠다. 어차피 연대장이면 우리가 막고 싶어도 못 막아.”
잠시 후, 젊은 얼굴의 중위가 위병소에서 나와 연대장의 앞에 섰다. 연대장은 그런 중위의 옷 생김새를 보고 말했다.
“···그 투구에 흑색 수술이면 용기병 연대인가?”
“그렇습니다. 연대장 각하.”
“음, 뭐 용기병 연대가 왜 위병소를 지키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연대는 지금 왕명을 받아 파리로 가는 길이라네. 자네 중대원에게 길을 비키라고 말해주겠나?”
그러나 나긋나긋한 말투와 웃는 낯의 오이겐 연대장의 얼굴은 중위의 대답에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안됩니다.”
“···뭐야?”
“전 아무런 명령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떤 부대가 이곳을 지나가기로 했다는 명령은 더더욱 받지 못했습니다.”
“···내가 지금 명령서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중위, 당장 자네 병사들을 물리게! 어서!”
“안됩니다. 상부의 명령 없이는 불가합니다.”
“이, 이런 미친놈이!”
오이겐 공작의 얼굴에 벌건 핏줄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문! 열으라고!”
“안! 됩! 니! 다!”
“억..어억! 뒤, 뒷목이!”
“이 몸 에마뉘엘 드 그루시 중위의 명예를 걸고! 적법한 상부의 명령문 없이는 절!대! 이곳을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루시의 주머니 안에는, 친우 마티유가 쓴 편지가 고이 접혀 들어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