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첫 장 (2)
불편하다.
그것도 너무나.
귀족과 왕의 알력다툼에서 귀족이 승리한 바람에 다시 재무총감으로 복직한 네케르는 이 시끄럽고, 더럽고, 추잡함이 난무하는 곳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눈앞에 펜인지 뭔지 모를 무언가가 부웅 하면서 허공을 날았다.
네케르는 펜이 공중을 어여쁘게 가르는 그 절경에, 왼손으로 얼굴을 반쯤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이익! 백작! 당신 지금 우리 법관들과 한번 붙어보자는 거야! 어딜 감히 펜대를 던져!”
벨벳 법복의 한 판사가 탁자를 쾅 치면서 일어나 말했다.
“하! 기껏해야 아비 대에서 알량한 재주로 귀족작위를 받은 근본 없는 놈이, ‘감히’는 무슨 ‘감히’? 네 놈이나 어딜 감히 근본의 푸른 피들에게 그런 말투를 지껄이느냐!”
그에 질세라 실크로 만든 고급스런 옷의 백작도 탁자를 쾅 치며 일어나 말했다.
“뭐, 뭐야?! 기껏해야 운 좋게 태어나서 귀족인 새끼가!”
다시 한 번 무언가가 허공을 날았다.
펜인지 아니면 잉크통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구두라도 던졌는지 이제 네케르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명사회는 대체 머리가 있는 거요, 없는 거요! 평민들이 지방에 있는 고등법원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고 있는데, 고작 삼부회에 평민 몇 더 넣어주겠다는 게 그렇게 고깝소이까?”
“그건 고등법원 당신들이 물러터진 거 아니요!? 군대를 동원하던 주먹패를 동원하던 해산시키면 될 거 아닌가! 고등법원과 법관들 당신들은 우리가 고작 평민들 따위한테 자리를 내주려고 왕이랑 한 판 붙은 줄 아는 건가!?
“어차피 신분 별 한 표 아니오! 평민들 좀 더 삼부회에 들어온다고 표결이 갈리는 것도 아닌데, 고작 그거에 대체 왜 그렇게 발작하는 거요!?”
“하? 바아알자아악? 니 놈들은 하루 온종일 법조문하고 씨름만 해서 잘 모르시나 본데, 평민들은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 둘을 주면 셋을 달라 투덜대는 게 기본이오! 쯧쯧 민생에 대해 뭘 알아야 대화를 하지.”
회의장은 이제 명사회 소속의 귀족과 성직자, 고등법원 소속의 법관들로 나뉘어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어느덧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가리고 그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네케르는, 그 누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말했다.
“씨...발...집에 가고 싶다...”
결국 온종일 좁혀지지 않던 의견 차이는 네케르가 과거처럼, 1614년의 삼부회와 똑같이 표결하겠다는 말로 겨우 마무리 되었다.
***
“어디로 갈까요, 재무총감님?”
마부는 뒷자리에 앉은 고용주 네케르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 10년 가까이 네케르의 마부로 고용된 그도, 고용주의 얼굴이 이정도로 넋이 나가 있는 건 처음 겪는 일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으로. 오후에는 폐하와 나눌 이야기가 있다네.”
네케르는 마차 안 의자에 완전히 기대 눈을 감고 힘없이 말했다.
“옙, 분부대로.”
마부가 손에 쥐고 있던 고삐에 위로 크게 반동을 주자, 말들이 푸르륵 콧소리를 내더니 다그닥 다그닥 발굽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네케르는 가만히 규칙적으로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겼다.
명사회의 귀족이란 놈들은 그저 무지성으로 평민들의 요구를 거부하는 수구꼴통들이고,
고등법원의 법관이라는 놈들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겉으로만 젠 채하는 쓰레기들이고,
얼마 전까지 국왕을 타도하자던 평민들은 이제 한입으로 두말하는 귀족들을 타도하자며 ‘국왕 만세!’를 외치고,
군대는 각 지방의 소요와 폭동을 멈추기는커녕 평민을 두둔하는 편과 고등법원을 두둔하는 편으로 나뉘어 나라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니.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군. 으히히.”
네케르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기뻐서가 아니라, 그냥.
그냥 웃음이 하염없이 나왔다.
모든 것이 좆같아서 그냥 웃음이 하염없이 나왔다.
그리고 네케르의 좆같음은, 베르사유에 당도해 최고조에 이르고 말았다.
***
“···소신 네케르가 나이가 들어 귀가 어두워졌는지 폐하께서 하교하신 바를 이해하지 못하였나이다. 청컨대 다시 한 번만 더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네케르는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왕, 루이 16에게 말했다.
“음, 그렇소?”
루이 16세는 그대로 네케르에게 뒷짐을 진 손만을 보여주며 차분하게 말했다.
“짐은, 왕국의 방방곡곡에서 이름 없는 백성이 모두 자기의 소원과 요구를 짐에게 말하길 윤허하겠다고 했소.”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구려.”
“다만, 신이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이 있나이다.”
루이 16세는 그제서야 몸을 돌려 네케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뭐요?”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그럼에도 네케르는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프랑스가 혼란하여, 지방에서는 세금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나이다. 신은 폐하께서 보여주신 선량하고 자비로운 뜻은 알고 있으나, 무지한 백성들이 이를 가지고 더 큰 혼란을 만들까 두려울 따름이옵니다.”
국왕은 네케르의 말이 끝나고도 아무 말도, 추임새도 넣지 않다가. 뒷짐을 하던 손을 풀고 네케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혼란이라, 혼란. 그래, 자네를 세운 그 ‘푸른 피’들은 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그토록 왕가에 적대적으로 행동한 게로군?”
“···.”
“왕비를 근거 없는 낭설로 헐뜯고, 그 낭설을 저잣거리에 널리 알려 왕가의 위신을 박살내며, 근엄한 왕명마저 오를레앙 그놈과 붙어먹으며 거부하고, 순박한 백성들을 선동해 지방각지에서 폭동을 일으킨 것이 모두 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 한 일이구료?”
네케르의 목 뒤로 식은땀이 한 방울, 굴러 떨어졌다.
루이 16세는 순한 왕이었다. 순박한 시골 양치기만큼 순하디 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수년간 계속된 국왕에 대한 무시와 견제, 그리고 악의적인 비방은 그 순한 왕이 안광을 시퍼렇게 발하도록 만들었다.
네케르는 열리지 않는 입을 겨우 열어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이제 백성들을 수단으로 삼으시려는 겁니까? 그건 너무 위험하옵니다. 폐하께서도 그들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폐하답지 않으십ㄴ···.”
루이 16세는 그런 네케르의 말을 환히 웃는 얼굴로 가로막고 말했다. 어떤 수사도 들어가지 않은, 범인의 말투로.
“재무총감, 대체 나다운 게 뭐요? 짐이, 아니 내가 그저 ‘허허’하며 웃기만 하는 인형처럼 되었으면 좋겠소?
나는 저잣거리의 광대도 아니고,
나는 그대들이 그리 씹어 돌려도 용서해 줄 예수님도 아니오.
무엇보다.
재무총감, 아니 네케르 자네가 보기에도 난 참을 만큼 참지 않았던가. 하하.”
나도 이제 왕 노릇 좀 해봅시다. 루이 16세는 덧붙였다.
네케르는 왕의 말에,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베르사유 궁전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좆같음의 연속이었다.
***
“···그러니까, 사장님은 거래량을 늘리고 싶으시다는 거요? 거, 지금도 쓰기에는 충분하지 않소?”
보스턴 상선 조합의 화물선 선장 찰리는 뱃사람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말투로 말했다.
“글쎄요, 앞날은 그 누구도 모르잖습니까. 사업가로서 보험이야 군데군데 들어놓을 수밖에요”
찰리의 말에, 난 그렇게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누가 보더라도 여유만만한 모습이었다.
물론 속은 안 그랬지만.
전능하신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공자님 조상님, 어 조상님은 툴롱 가 조상님한테 해야 하나 아니면 임씨 집안 조상님한테 해야 되나? 아무튼 한번만 살려 주세요!
출장 갔던 플로리앙 씨가 전해준 소식은 비보(悲報)중에 비보였다.
- 사장님! 우리 좆됐습니다!
- 아니 언제는 나보고 상스럽게 말한다고 뭐라 하더니...
- 툴루즈가 흉작이랍니다!
- 어, 우리 좆됐네?
가장 볕 잘 들고 따듯한 툴루즈가 흉작이면 뭐, 다른 곳은 이미 게임오버란 말이야.
저기요, 신님? 아니 신 새끼야, 인생 2회차면 상태창이라던가 막 뭔가 개꿀빨 수 있는 그런 거 줘야 되는 거 아님? 혹시 월급 루팡이신가? 왜 안주는데!
“그렇다면 늘게 될 거래량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찰리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해그리드처럼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음, 일단 우리 이삭의 민족에서 사용하는게 월 60톤 가량, 배가 한번 나가서 들어오는데 넉넉잡고 다섯 달. 만일을 대비해 비축분까지 고려한다면...
“아마 삼...”
“삼십 톤은 좀 적은 것 같은데...”
“백 톤 정도?”
“···뭐요?”
“삼백 톤 정도?”
찰리는 얼이 빠져서는 턱수염을 사랑스럽게 쓰다듬던 손마저 멈췄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거 사장님. 내 배가 실을 수 있는 화물이 몇 톤인지 아십니까?”
몰라, 내가 그런 거 어떻게 알아.
“얼마인데 그러시죠?”
“이백 톤이오. 이백! 삼백 톤이면 배를 또 빌려야 한다고! 그것도 반밖에 못채우는 화물 때문에! 그게 손해가 얼만지 아쇼!?”
“아니, 다음에는 1천 톤 쯤 주문할건데 그깟 배 한 대가 대숩니까?”
“···뭐, 뭐요?”
찰리는 이젠 아예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흠흠. 거 사장님. 농담도 참...”
“···농담 아닌데요. 다음 기항 때는 삼백 톤. 다다음 기항 때는 1천 톤 거래하겠습니다.”
찰리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음. 저 눈은 먹잇감을 노리기 전, 탐색하는 눈이로구나. 이게 먹어도 되는 먹이인지 아니면 먹으면 탈나는 건지.
“사장님.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 털복숭이 아저씨, 내가 왜 그걸 순순히 얘기해줘요? 원래 허허실실이라고, 아프지만 안 아픈 척, 안 아파도 안 아픈 척해야 하는 법.
“그러면 대체 왜...?”
“찰리 씨는 잘 모르시겠지만, 요즘 프랑스 내에서 소요사태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보험을 좀 들어둘까 해서 그런 겁니다.”
“음...”
거 참. 아저씨. 지금도 이득 많이 봤는데 뭘 그리 고민하는 거야. 한번 밀당해줘?
“뭐, 찰리 씨가 딱히 원하지 않으신다면야 제퍼슨 씨에게 다른 상선조합을 소개해 달라고 하면 되니까요. 그럼 전 이만.”
“어, 어! 잠깐, 사장님! 내가 안한다고 한 게 아니라~단순히 그, 뭐냐 배 빌리는 값 좀 계산 해봤수다! 에헤이, 가지마시고 참.”
“그래서 합니까, 안합니까?”
“뱃사람으로 30년을 산 이 몸 아니면 누가 그 많은 화물을 안전하게 배달하겠습니까? 나만 믿으십쇼, 사장님! 으하하하!”
찰리는 이 시대의 뱃사람답게 큰 소리로 웃고 내 손을 잡아 흔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