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첫 장 (1)
“1분대는 이곳에서 그르넬흐 거리 전체를 감시하고, 2분대와 3분대는 각각 북쪽과 동쪽으로 300m씩 이동해 순찰을 돈다. 알겠나?”
“”예! 하사님!”
”
하사관의 명령에 소총에 착검까지 한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분대별로 쪼개져 군홧발을 내딛었다.
이삭의 민족 조리장 마리는 조리실 문을 살짝 열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한 병사가 자기 쪽으로 눈을 돌리자 놀란 나머지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마리 씨. 밖은 좀 어때?”
“아이고. 어제랑 똑같이 오늘도 아주 그냥 병사들이 서슬퍼래가지고 여기저기 저벅저벅 걸어 다녀!”
“어머머 정말로?”
“아유 정말 속고만 살았어? 자네두 한 번 봐봐!”
“어디...아이고! 무서버라!”
군대가 파리 시내에서 경계를 서는 것도 벌써 근 보름 째였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군인들이 무기까지 치렁치렁 들고 다니지는 않았건만, 며칠 전 있었던 폭동으로 인해 이제는 군인들이 총에 검까지 꽂아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당연히 시민들의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 아니, 폭동 일으킨 놈들만 잡아가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살벌하게 굴어?
- 그러니까 말이야! 이러다가 사람 잡겠어. 안 그래도 먹고살기 힘든데 이게 뭔 난리인지...
- 내가 듣기로는 디종하고 툴루즈도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던데 혹시 그거 때문에 더 경계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몇몇 사실과 거짓이 합쳐져 이런 불안은 더 커지고 있었다.
- 사실 왕이 네케르 재무총감을 파직시킨 건, 브리엔에게 홀딱 빠진 왕비가 네케르를 쫓아내고 브리엔을 대신 임명하라고 닦달해서 그렇다더라!
- 뭐? 그게 사실이야?
-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던데? 애초에 그 여자, 이미 보석 목걸이에 성직자하고도 정분나본 탕녀잖아. 아마 맞지 않을까?
왕가에 대한 말.
- 그르노블에서 국왕이 보낸 군대가 사람들을 쏴 죽이고 약탈한다더라!
- 뭐? 그게 사실이야?
-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던데? 애초에 그런 게 아니면 국왕이 군대를 왜 배치했겠어. 아마 맞지 않을까?
흉흉한 말.
- 오를레앙 대공 전하가 플랑드르 지방에서 거병을 하셨대!
- 뭐? 그게 사실이야?
-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던데? 애초에 국왕이 오를레앙 대공을 내쫓았잖아. 아마 맞지 않을까?
어디선가 시작된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까지.
그저 사람 좋은 성직자 브리엔과 독실한 신자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순식간에 간통하는 사이가 되고, 치안 유지와 혼란을 막기 위해 왕이 파견한 군대는 순식간에 시민에게 총을 쏴재끼고 민가를 약탈하는 매드맥스 수준의 아포칼립스군대가 돼버렸다.
오히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피해자였고 얌전히 치안유지를 하던 군대는 시민들이 던진 돌에 맞고 다친 병사가 속출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하는 카더라 통신의 위력은 날개를 단 듯 삽시간에 전국토를 불태우고 있었다.
1788년 봄과 초여름, 프랑스 전역이 혼란했다.
***
“개좆됐다.”
개좆됐다. 그게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아무래도 나는 개좆됐ㄷ, 에라이 씨발 몰라.
사실 이번 휴가를 끝마치고 파리에 왔을 때, 병사들이 갑자기 사거리마다 서 있는 걸 보고 직감하고 말았다.
아, 이거. 드디어 왔구나.
프랑스 혁명.
그리고 단두대가.
도착한 날 밤. 내 머릿속은 거의 한일전 당일의 상암 월드컵 경기장 수준으로 내 자아가 분열해 난리를 쳤다.
‘아, 이거 단순한 소동 아닐까? 벌써 혁명은 아니겠지?’
‘단두대 크래프트.1.16.1 립버전. 지금 무료로 다운로드하세요!’
‘자, 싸다 싸! 왕 모가지가 단돈 100 리브르! 단두대 특가 세일!’
결국 난 거의 이틀 간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초죽음이 돼버렸다.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는 날 보고 비서인 플로리앙은 걱정됐는지 말했다.
“···사장님, 어디 불편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요즘 통 안 좋아 보이시는데...”
“···별거 아니에요.”
그런 플로리앙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젠장, 이제 곧 왕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사람들 다 단두대로 올라가기 시작할 텐데 별거 아니긴 무슨.
내가 가만히 홀로 마음만 졸이는 건, 이런 걸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날 미친놈으로 보고 정신병원에 가둬버릴 게 분명하니까 그러는 거다.
설령 내가 말한 대로 실현된다 해도 아니, 무조건 실현되겠지만 날 무슨 악마보듯 바라볼게 뻔하지.
왕의 목이 떨어진다는 건 그만큼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니까.
“플로리앙 씨. 제가 말했던 건 어떻게, 잘 됐나요?”
“아, 물론입니다. 일단 지폐나 어음은 다 금화와 은화로 바꿔놨습니다만, 전 아직도 왜 사장님께서 이런 일을 시키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요즘 분위기가 좀 불안하니까 안전한 자산으로 바꾼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사회가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현물, 특히 귀중품은 믿음직한 자산이 된다.
돈 좋지. 나도 지폐로 채워진 수영장에서 수영해보고 싶고 그래. 시기가 이렇지만 않으면 말이야.
지폐는 정부의 신뢰가 의심받기 시작하면 가치가 급락하고, 어음은 주기로 한 회사나 개인이 파산해버리면 하늘로 붕 떠버리는 종이쪼가리가 돼버리기 일쑤다.
플로리앙 씨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 그러면 앞으로 마부조합과 상선조합에도 금화나 은화로 멀미약 대금을 치러 달라고 할까요?”
아, 참 우리가 출시한 멀미약은 이 무렵 마부조합과 상선조합에서 꾸준히 찾는 효자 상품이 되어있었다.
특히 상선조합 측에서는 멀미약을 공급받은 이후 탑승객들의 컴플레인이 눈에 띄게 줄어들자 칼레, 브레스트, 셰르부르 같은 지방 항구도시에서도 주문이 들어오고 있었다.
“네, 그렇게 해달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안되면 어쩔 수 없고, 대신 그렇게 되면 받는 대금을 은행에서 바로바로 금화로 바꿔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일단 이삭의 민족에서 벌어들이는 순이익이 월 2만 리브르 정도, 멀미약으로 벌어들이는 순이익은 월 1만 5천 리브르, 총합 월 3만 5천 리브르다.
그 만한 돈만 지금부터 계속 금화와 은화로 모아놔도 유사시에 급한 불을 끌정도는 될 거다.
그 다음은...또 뭔가 내가 해야 할 일 있나?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플로리앙이 말했다.
“아! 이번에 우리가 쓸 곡물을 실은 미국 상선이 도착하는데, 추가 발주나 주문을 하려면 지금이 적기일 것 같습니다. 나중에 급히 주문을 하려면 적어도 네 달에서 다섯 달은 걸릴 테니까요.”
씁. 곡물, 곡물이라.
잠깐만.
“플로리앙 씨. 툴루즈에 한 번 다녀와 주실 수 있습니까?”
“예? 갑자기 툴루즈요?”
“가서 오래 있을 필요는 없고, 농지가 어떤지만 빠르게 보고 와주셔야겠습니다.”
“지금쯤이면···. 6월 초니 당연히 호밀이 거의 익었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호밀 씨앗을 11월에 뿌리니까요. 다만, 이번 겨울이 너무 혹독하지 않았습니까. 그저 가셔서 호밀이 잘 자랐는지만 빨리 보고 오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플로리앙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프랑스 내에서 가장 따듯한 지역인 남부지방의 호밀이 잘 자라 추수 중이라면 별 상관은 없다. 우리가 계약한 거래처 한 군데가 문제가 생겨도 다른 곡물상과 거래하면 되니까.
그런데 만약 호밀이 한파 때문에 잘 자라지 않았다면? 심지어 그게 이번 한파에서 제일 따듯했던 남부라면?
더 이상 프랑스의 곡물 거래처에 기댈 수 없다. 너도 나도 다 같이 좆됐을테니까,
그러면 미국산 곡물을 무조건 확보하는 수뿐이다.
그렇다면 더 싸게 미국산 곡물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바로 미국인들이 그 사실을 알기 전에 계약을 해버리면 된다.
“씨발..먹고살기 존나 힘드네...”
제발 내 욜로 라이프를 돌려줘! 갸아아아아악!
오늘도 이삭의 민족 사무실은,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
“짐, 루이 16세는··· 고등법원의 결정을 존중하여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명하며, 전 재무총감 네케르를 다시 파리로 불러들이라는 명사회의 결정 또한 존중하겠노라...”
왕이 무너졌다.
장장 1년 여 간의 긴 정치적 암투 끝에, 귀족과 성직자들의 카르텔이 국왕을 무너뜨렸다.
“하하하! 우리가 이겼소! 우리가 이겼다고!”
“판사님의 혜안을 따르길 잘했습니다! 저 무시무시한 왕권도 이제는 종이호랑이나 다름없군요!”
“역시! 신께서는 우리 푸른 피가 치룬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으시는 게 분명해! 아아 주여! 저 저주스러운 왕과 간신들을 벌하신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귀족들과 성직자는 왕이 가진 권위의 추락에 환호했다.
“큼큼. 이렇게 우리가 승리했으니, 왕이 강제로 없앤 세금 몇 개를 다시 만들어도 되지 않겠소?”
“예? 아무리 그래도 왕의 인가 없이 해도 될는지...”
“떽! 왕이 무릎 꿇은 지금이야말로 적기요! 일단은 음... 그래! ‘비둘기세’부터 다시 만듭시다!”
“허허, 그 무슨 소리요! ‘소금세’부터 다시 걷읍시다!”
“거참 두 분 모두 그만하시지요. 둘 다 걷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귀족들과 성직자는 왕의 결정 또한 무시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평민들은 어쩌시렵니까?”
“음? 평민은 또 왜 얘기하시오?”
“뭐, 이번에 왕을 무릎 꿇린 것도 어떻게 보면 평민들을 조종했기 때문 아닙니까. 뭐라도 조금 쥐어줘야 하는 거 아닐 런지.”
“거 참 그 얘기는 됐소. 그 무지렁이들이야말로 우리 푸른 피가 친히 그놈들을 써준 거에 대해 감사해야 되는 거 아니오? 쓸모없고 게으른 평민 놈들이 일이나 잘할 것이지 에잉... 어차피 그놈들은 개돼지들이오. 잠시 짖어대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저절로 잠잠해지겠지.”
귀족들과 성직자는 자신들이 선동한 평민들 또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이...이게 무슨!!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망발이냐!”
“판사님이야 말로 무슨 소리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삼부회에서는 인당 한 표씩 행사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신분을 묶어서 한 표씩 행사하시면 우리 평민들은 들러리나 되라는 거잖습니까!”
“하! 고귀한 푸른 피와 동일하게 한 표를 행사하겠다고? 경비병! 당장 이 미친놈을 끌어내라! 한번만 더 내 눈에 띠면 그 때는 신성모독죄로 즉결처분하겠다!”
“이, 이! 판사는 무슨! 배때기에 순 기름만 낀 새끼가 평민들의 대표인 나를 협박해!?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분노한 평민들의 눈은 이제 귀족과 성직자들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고등법원은 수탈을 멈춰라!”
“우리는 인당 한 표를 원한다!”
“우우우! 우리에게 빵을 달라!”
고등법원에서의 집회 구호는, 이제 왕이 아니라 법관과 성직자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익! 이 밥버러지새끼들이! 이보시오! 대위! 당장 저 폭도들을 진압하시오!”
결국 귀족과 성직자들은 군대에게 폭동을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싫소.”
“뭐, 뭐야! 대위! 저 폭도들이 안보이나! 빨리 총을 쏘던 기병대로 짓밟던 하란 말이야!”
“내가 왜 그래야 하오? 난 국왕 폐하께 시민들의 안전과 도시의 치안을 유지 하라는 명령을 받았지, 같은 프랑스인을 쏘라는 명령은 못 들었소.”
“이, 이 개같은..!”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사견이다마는, 순박한 대중을 선동해 나와 내 중 대원들에게 돌을 던지게 만든 돼지들을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
“네, 네놈은 파면이야! 파면이라고!”
“하! 어디 할 테면 하시오! 나 다음으로 중대를 맡을 장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도 똑같을 테니.”
장교들은 고등법원의 명령을 거부했다.
“뭐? 대위님이 고등법원에게 해임당하셨다고?”
“이런 미친 새끼들! 대위님이 어떤 분이신데! 야! 다들 이렇게 당하기만 할 거야?”
“당연히 아니지! 다들 총 챙겨! 시위대에 합류한다!”
부사관들은 병사들을 이끌고 평민 시위대에 합류했다.
“우리는 국왕 폐하의 군대입니다! 절대 시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프랑스 만세! 국왕 폐하 만세!”
“와아아! 군인들이 합류했으니 이참에 고등법원으로 쳐들어가 다 엎어버립시다!”
“고등법원으로 가자!!! 프랑스 만세!”
혁명이라는 무대의 기나긴 막이, 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