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파 (5)
1788년 4월 초.
기욤과 나폴레옹, 듀퐁이 코르시카에 도착했을 무렵, 프랑스 중남부의 작은 도시 그르노블의 분위기는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나빠져 있었다.
때문에 기욤 일행을 파리에서 툴롱까지 태워다 준 마흔다섯 나이의 마부, 토마는 불과 며칠 전 그르노블을 지났을 무렵과 180도 달라진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길, 무슨 분위기가 이렇담. 독일 놈들하고 전쟁할 때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은 것 같은데...”
곳곳에는 희번득 거리는 총검을 소총에 단 병사들이 이열종대로 여덟 명씩 줄지어 순찰을 돌고 있었다.
가게란 가게는 대부분 문을 걸어 잠궜고,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 다른 이들과 시선 마주치기를 꺼려하며 서둘러 볼일만 보고 집으로 돌아갔다.
안 그래도 불황인 요즘, 오랜만에 손님을 받아 금화 두 닢을 챙겨 좋아하던 그의 모습은 이런 모습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20년 가까이 마차를 몰면서 이 길을 수도 없이 지나다닌 그조차 처음 보는 광경에 고삐를 잡은 손에서 땀이 삐질삐질 묻어나왔다.
‘대체 그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어떤 미치광이 귀족이 사병으로 쿠데타라도 일으킨 건가?’
토마는 참다못해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 하나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이보쇼. 거기 아재요! 내가 외지 사람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 데 먼 일이라도 났소?”
“이, 이거 놓으쇼! 난 갈 길이 바빠서 못 말해주겠으니 다른 사람 찾아보쇼.”
“아, 아니 이 양반이? 거 좀 알려주면 덧나나...”
하지만 행인은 토마의 손을 뿌리치고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지나갔다.
“여기 인심이 이렇게 더러웠나, 정말 너무 하는구만.”
토마는 결국 이렇다 할 얘기도 못 들은 채, 어쩔 수 없이 말을 몰아 계속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토마의 궁금증은 얼마 안가 자동으로 해결되고 말았다.
“아, 아니 저게 대체 뭐야?”
토마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져 눈앞의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 분노에 차 소리치고 있었다. 그건 문제가 없었다.
토마 또한 파리나 다른 도시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비싸게 팔아치우는 악덕 상인들에게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사람은 많이 봐 오지 않았던가.
토마의 말문이 막혀버린 것은 사람들이 분노에 차 소리치고 있는 곳이, 악덕상인들이 모인 시장통이 아니라 그르노블 시 고등법원 앞이었다는 것이었다.
“국왕과 재무총감은 꺼져라!”
“네케르를 다시 복귀시켜라!”
“정의로운 푸른 피 오를레앙 대공 만세!”
수많은 시민들이 고등법원 앞에서 다분히 반정부적인 말을 외치고 있었다.
토마는 마차에서 내려 개중 한명을 붙잡고 물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요? 왜 사람들이 이러고 있소!? 경찰은, 경찰은? 검사들한테 잡혀가면 어떡하오!”
그렇게 말한 토마는,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시오! 경찰과 법관들도 다 우리 편이니까!”
***
“으하하하하! 저 멍청한 평민들도 이럴 때는 또 도움이 되는군요!”
“어허. 멍청하다니, 순박하다고 말하시오. 우리 귀족들이 책임지고 저런 무지하고 순수한 평민들을 이끌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심하게 말하면 어떡하오?
하하하.”
“아이쿠, 이런. 제가 실례했습니다, 그려!”
“그래도 검사장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으니 뭐, 피차일반이라고 합시다. 하하하!”
“이렇게 제 말실수를 봐주시다니, 역시 판사님은 배포가 크십니다!”
그르노블 고등법원의 검사장과 판사는 와인이 담긴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옆에 있던 그르노블 경찰서장 또한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국왕이 정말 뒤로 물러나겠습니까? 전 아직도 이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러다가 국왕이 군대를 본격적으로 동원한 다면···.”
“음! 잘 말해주었소이다 서장.”
판사는 남은 와인을 목으로 넘긴 후 이어 말했다.
“사람은 변화를 싫어하는 법이오. 미물인 식물조차 뿌리를 뽑아 원래 살던 곳과 다른 곳으로 옮겨주면 죽어나는 게 부지기수인 것을, 사람에게 무언가 환경에 큰 변화를 준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오.”
“···.”
“쉽게 말해서 왕이 이번에 우리 귀족들의 영향력을 거세시키려고 한 짓은, 우리 귀족 뿐 아니라 평민들에게도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이라 할 수 있소이다.
우물 안 개구리들이 우물이 흔들린다면 당연히 두려워하지 않겠소? 자기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아도 그 조그마한 우물이 흔들린다는 건, 개구리들에게 굉장히 두려운 일이오.”
판사는 말을 마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의 말을 끝내자 옆의 검사장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말을 받았다.
“판사님 말이 맞습니다. 이번에 국왕이 재무총감의 말만 듣고 자신의 사촌인 오를레앙 대공 전하를 파리 밖으로 쫓아낸 것부터, 우리 고등법원을 없애고 ‘국왕 전담 재판소’니 ‘뭐니 하는 걸로 시끄럽게 만든 것까지 전부 다 무지렁이 백성들이 보기에는 평화로운 일상을 깨뜨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경찰서장은 그제서야 아! 하는 표정으로 두 명의 법관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즐기듯, 검사장은 상기된 채 다시 떠들었다.
“어차피 봉건제에 젖어있는 바보 같은 백성들은 귀족인 우리가 말하는 대로 믿을 테니 선동이야 쉽고, 부르주아니 뭔가 하는 그 졸부 놈들이야 뭐, 돈 좀 있어 봤자지요.
이대로 버티다가 국왕이 삼부회를 소집해주고, 우리는 거기서 평민들 얘기나 좀 들어주는 척하다가 우리 맘대로 의결해버리면 끝입니다.”
3 신분 평민들이 얼마나 많던 간에 각 신분 별로 1표씩이니, 1신분과 2신분인 우리 표를 다 합치면 2표니 말이죠. 검사장은 덧붙였다.
고등법원 건물 밖으로 보이는 평민들의 외침은, 그들에게 감미로운 세레나데나 마찬가지였다.
***
“···군대까지 동원해 봤건만 나에 대해 더 반항이 거세지고 있다고 했는가?”
“그, 그렇사옵니다. 폐하.”
재무총감 브리엔은 루이 16세의 말에 그저 땀을 뻘뻘 흘리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 16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짐이 오를레앙 그 자를 내쫓지 말았어야 했는가?”
“아니옵니다! 폐하의 결정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브리엔은 그런 루이 16세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겉으로만 단호한 것이 아니라 브리엔의 속 또한 그와 똑같았다.
‘왕족이라는 자가, 자신의 탐욕 때문에 이런 대혼란을 만들다니! 정녕 그가 이 프랑스의 앞날을 흐리게 만들었구나!’
브리엔은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프랑스의 재정은 이미 만성파탄 직전이었다. 곧, 1년 세입보다 1년에 낼 이자가 더 많아질 예정이었고, 이는 즉 국가의 대금 지불능력 상실이다.
IMF 당시의 대한민국은 애들 장난 수준으로 보이는 파산 위기가 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브리엔은 왕을 설득하고, 고등법원의 귀족들에게 빌고 빌어 4억 2천만 리브르에 달하는 돈을 경기활성화와 이자 대금으로 대출하려했다. 일단은 이 자라도 막고, 경기라도 부양시켜야 차후 세입이 늘지 않겠는가.
그 뒤,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 조금이나마 과세를 한다면 프랑스는 산소호흡기라도 붙인 채 살아날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 나, 오를레앙 대공은 왕족의 이름으로 현 재무총감이 저지른 4억 2천만 리브르의 대출이 불법이라고 생각하노라!
그러자 브리엔이 무릎을 꿇고 빌어 겨우 설득한 고등법원의 귀족들도 마음을 달리 먹기 시작했다.
- 어? 이거 잘만하면 오를레앙 대공의 이름을 방패삼아, 약속을 철회할 수 있겠는데?
- 게다가, 이러면 나중에 세금을 낼 가능성이 아예 0이 되는 거잖아?
- 각이다. 각! 지금 엎어버리면 우리 기득권은 지켜낼 수 있어!
- 우리 고등법원은 국왕과 재무총감 브리엔의 대출요청을 기각하는 바이다!
희희낙락한 얼굴로 판사봉을 두드리던 그 탐욕스러운 자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브리엔은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결국 사람 좋은 루이 16세도 이번에는 눈의 실핏줄이 터지면서까지 분노해, 오를레앙 대공을 파리 밖으로 추방시키고 그를 따르는 일부 인사를 감옥에 넣어버렸다.
그러나 한 번 가속을 받고 폭주한 귀족들은 오를레앙의 탄원을 요청하며, 각지의 지방법원들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민중을 선동해 반정부시위를 조장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파업에 자기들끼리 개별적인 삼부회를 만들어 반역수준의 반항을 하는 지역도 있었다.
‘주께서는 이 프랑스가 무너지는 걸 정녕 보고 싶어 하시는 건가!’
브리엔은 입에서 쓴맛이 났다.
브리엔은 부디 루이 16세가 무언가 신묘한 명령을 내려 이 사태를 해결해 주었으면 하고 그를 쳐다보았지만 루이 16세는 그저, 창밖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
그르노블이 소요사태로 위험해졌다는 알랭의 말을 듣고 게헨느로 잠시 몸을 피한 우리는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자대 복귀 일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게헨느에 온 다음날 떠났지만, 나와 듀퐁은 사태가 좀 진정 될 때까지 약 삼 사일간 게헨느의 우리 집에 묶여 있었다.
- 어떤가 알랭? 아직도 그르노블은 시끄러운가?
- 예 주인님. 아마 기욤 도련님과 친우 분은 하루 정도 더 걸리더라도 그르노블 쪽이 아니라 아비뇽 쪽 길로 올라가셔야 할 듯 싶습니다.
- 어쩔 수 없군. 지금이라도 출발해야 학교에 복귀할 수 있으니...
그렇지만 나와 듀퐁 또한 학업 때문에 조금 위험하더라도 길을 나서야했고, 그래서 조금 더 걸리더라도 아비뇽-리옹 쪽으로 길을 돌아가기로 했다.
“이야 얼마 만에 파리로 돌아가는 거야.”
“허, 참. 파리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자식이 집에 얼굴도 안 비치는 바람에 속 탄 애비 마음은 하지도 않는 게냐?”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버지, 샤를은 마차를 타고 출발하려는 내 뒤에 어느 샌가 와서 말했다.
이건 뭐. 빼도 박도 못 하게 내 잘못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죄송합니다아..”
그런 내 모습에 아버지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거 참 됐다.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네가 잘 컸는지만 확인하려 한 것이니.”
아아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전 정말 호로자식이 돼 버리는 데요...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며 별 탈 없이 도착하라고 말한 뒤, 저택으로 몸을 돌려 들어갔다.
내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앉아 있던 듀퐁이 킥킥대며 나에게 말했다.
“와 기욤 너 진짜 나쁜 녀석이구나?”
“시끄러.”
“왜 그래? 설마 남자가 이거가지고 삐졌냐?”
듀퐁, 이 새끼... 파리에 돌아가서 보자. 널 갈아 넣어서 에밀레 종을 뛰어넘는 공밀레 종을 만들어버릴 거다.
***
아들 기욤이 타고 있는 마차가 이제는 점처럼 작아져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샤를은 그제서야 창문에서 눈을 떼 집사 알랭을 보았다.
“···그래. 툴롱에서 항만장이 사고를 치고 있다고?”
“예. 항만장이 이제는 해군에게도 바가지를 씌워 뜯어먹는답니다.”
“하, 디디에 그놈. 돈독이 제대로 올랐나 보군. 모든 게 순조로워.”
샤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샤를의 얼굴을 본 알랭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주인님. 디디에 그자도 툴롱 가입니다. 그 자가 포악하게 굴수록 같은 툴롱 가인 주인님도 피해를 보시는 것 아닐 지요?”
“음? 아. 그건 상관없네. 난 어차피 툴롱에서도, 툴롱 가라는 곳에서도 쫓겨 난지 오래야. 툴롱 항의 시민들도 그건 다 알고 있지. 오히려 디디에 그 놈이 깽판을 치면 칠수록, 내가 나중에 툴롱에 돌아갔을 때 받아갈 수 있는 게 커질 걸세.”
그보다 이번에 기욤 그녀석이 데려온 친구들 봤나? 샤를이 덧붙였다.
“예. 모두 특출나 보이는 사람들이더군요.”
“하하! 그래. 장교에 학자까지. 이제는 정말 얼마 안 남았단 말이지. 내가 다시 툴롱의 항만장으로 돌아갈 날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