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파 (4)
“그럼 부디 좋은 여행되길 바라오. 기욤 생도, 보나파르트 소위.”
“소령님도 부디 로슈포르까지 안전한 항해길이 되시길 바랍니다.”
트레빌 소령은 내 말에 흐뭇하게 웃으며 선실로 들어갔다. 곧, 커다란 코르벳군함이 닻을 올리고 돛을 활짝 피고서는, 코르시카의 아작시오 항에서 출발해수평선 너머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코르시카는 프랑스 본토가 아직도 추위에 시름하는 것과 달리 쨍쨍한 해가 내리쬐며 한국의 5월에 가까운 날씨를 뽐내고 있었다. 지중해성 기후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모, 다들 따라와라! 배 타느라 힘들었을 테니 빨리 가가 쉬어야 카지 않겠나.”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에 발을 딛고 나서부터, 계속 입이 귀에 걸린 채 우리를 재촉했다.
하긴 거의 10년 만에 고향에 다시 돌아온 건데 당연한건가. 그러고 보니 나도 이등병 때 첫 휴가를 나와 집에 갔을 때 저거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거 같네.
나는 미소를 띠고 신나서 방방 뛰는 나폴레옹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보나파르트 가의 저택인 ‘메종 보나파르트’는 우리가 내린 항구에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택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층마다 정문 쪽으로 창문이 다섯 개 씩 나 있는 꽤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폴레옹의 어머니인 레티치아 보나파르트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 너희가 우리 나폴레옹이가 말한 아들이구나, 어여 들어오라카이.”
그녀는 뒤에는 나이는 각기 다른 아이 다섯이 얼굴 반만을 내놓은 채, 숨어있었다.
“마! 이 나폴레옹이가 왔는데 왜 다들 어머니 뒤에 숨어있나? 오랜만에 얼굴 함 보자!”
“나폴레옹 오빠?”
“나폴레옹 형?”
나폴레옹이 목소리를 들려주자, 개중 제일 큰 두 아이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 말하더니 나폴레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엘리자, 루이 맞나!? 와 참말로 마이 컸다! 내 여기 떠날 적에는 너거들 다 쪼매났는데!”
그러나 나머지 세 아이는 그런 엘리자와 루이의 모습에도 레티치아의 뒤에서 섣불리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를 떠나고 나서 태어난 아이들이라, 같은 혈육임에도 나 폴레옹이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인 탓이었다.
그런 모습을 본 레티치아는 씁쓸하게 미소 짓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저 사람이 너거들 오빠고, 형이데이. 어서 함 가바라!”
그제서야 아이들은 주뼛주뼛 레티치아의 뒤에서 나와 나폴레옹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오, 오빠. 지는 폴린이라 카이.”
“내는 카롤린이라 카이.”
“내는 제롬!”
이제 네 살배기인 제롬을 빼면 모두들 수줍어하는 표정이었다.
“하모, 너거 들이 내가 편지로만 받아본 동생들이고마. 내 오빠랑 형이 되가 꼬 너거 들이 요로코롬 클 때까지 얼굴도 못 비추고, 뭣도 못해줘가 미안하데 이.”
나폴레옹은 그런 동생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부드럽게 흔들며 말했다.
***
“아, 큰형이랑 셋째 남동생은 본토에 있다고?”
“그렇제. 조제프 행님은 이제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 셋째 뤼시앵은 이제 오툉에서 공부하고 있다카이. 뤼시앵 가 까지 일하기 시작하모, 우리도 팔자 좀 피지 않캈나. 하하!”
저녁식사 후에 우린 테이블에 앉아 차와 함께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듀퐁은 네 살배기 제롬이 너무 귀엽다면서 거실에서 꼬마와 놀아주고 있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나와 나폴레옹을 둘러싸고 요런 저런 얘기를 주워섬겼다.
“행님! 파리는 어떤 기라? 참말로 사람들이 천만 명씩 사나?”
“하하, 아이다! 파리가 크긴 커도 그까지는 안크다카이.”
“기욤 오빠는 오데서 왔나?”
“아 나는 툴롱 옆 게헨느라는 곳이 고향이란다.”
이런 귀여운 질문부터 시작해서,
“행님은 학교에서 키로 몇 번째였나!? 행님처럼 크모, 무조건 10명 안에는 들었겠제?”
“큼큼. 거, 키 얘기는 안 하모 안되나...?”
“기욤 오빠는 사업한다 했제? 그라믄 돈 억수로 마이 버는 거 아이가? 그렇제, 카롤린?”
“엘리자 언니 말이 맞다! 내도 어머니한테 들었다. 어머니가 나폴레옹 오빠친구 중에 어마무시한 부자가 있다 캤다!”
“어···, 내가 돈을 벌긴 하는데 어마무시한 부자는 아닐 걸...? 그것보다 너희 왜 이리 돈에 관심이 많니...”
답하기 좀 껄끄러워지는 질문까지.
한창 궁금증이 많을 활발한 나이의 아이들은 가히 전성기 박지성 급 활동량을 가지고 손흥민의 날카로운 슈팅을 닮은 질문을 끊임없이 퍼부어 댔다.
아니, 11살하고 6살이면 좀 꿈과 희망이 가득한 텔레토비나 디X니 랜드 같은 공상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반배금주의적인 질문 좀 해주면 안 될까?
이 혼탁한 세상에 병든 아저씨, 아니 몸은 17살인데 그러면 아저씨는 아닌가.
아무튼 어어어른들의 세상에 찌든 나는 퓨-어하고 순-수한 아이들의 귀여운 동심으로 힐링하고 싶단 말이다!
난 너희가 궁금하다고 누르면 ‘퐁’하고 대답을 뱉어주는 자판기가 아니란 말이야.
아 나도 듀퐁처럼 네 살배기 꼬마랑 놀아줄 걸. 흑흑.
이런 대접은 싫어! 싫다고!
그렇게 질문공세에 혼이 빠져있는 나를 보고 말한 건지, 아니면 자기도 똑같이 혼이 빠져서 그런 건지, 나폴레옹은 손뼉을 짝! 치면서 말했다.
“흠흠. 그···내랑 기욤이 둘 다 오늘은 배를 타고 오느라 피곤하니, 내일 얘기는 마저 하도록 하는 기 어떻나?”
아 역시 나폴레옹이야! 제에엔장! 믿고 있었다고!
아이들은 ‘벌써?’하는 얼굴로 어머니 레티치아를 쳐다 보았지만, 레티치아는 단호한 말투로 얘기했다.
“착한 아는 싸게싸게 자고, 싸게싸게 일어나는 법이다카이.”
그제서야 아이들은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가 누웠고, 나와 나폴레옹은 겨우 자유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마, 기욤이... 참말로 욕봤다 아이가...”
“형도...”
어쩐지 몇 년 전 위고를 같이 줘 팼을 때의 전우애가 다시 살아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
우드득 뚜둑
“으엉어억! 애들 보는 건 힘들구나.”
침대에 앉아 팔을 쭉 뻗어 스트레칭을 하자, 온 몸에서 신음을 내질렀다.
“내가 롯X월드에서 알바 하는 것도 아니고 죽겠다 죽겠어 아주.”
“롯...X월드? 그게 머꼬?”
난 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나폴레옹의 8살배기 여동생인 폴린이 눈을 꿈뻑이며 서 있었다.
“어...? 언제 왔니?”
“오빠가 요상한 춤을 출 때부터 있었제? 근데 롯X월드가 머꼬?”
“롯X월드는...말이지..?”
음, 어떡하지. 그나마 좀 아이다운 질문이어서 좋아해야 하나? 아니 그보다 이걸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너 잘 때 아니니? 얘기는 내일 해주면 안될까?”
폴린은 내 말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날 쏘아보았다.
아, 안되는구나.
“음... 뭐랄까, 어린아이들을 위한 유원지?”
“유원지는 또 머꼬...?”
“그러니까 그건···.”
아 오늘 밤은 다 잤다.
그날 나는 폴린의 똘망똘망한 눈 때문에 새벽 세시까지 자리에 눕지 못하고 온갖 손짓발짓을 해야만 했다.
***
“···휴가 겸 왔을 텐데, 기욤 니를 우리 아이들이 너무 괴롭힌 거 아인가 미안하데이...”
“괜, 괜찮습니다.”
나는 반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레티치아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열흘정도의 휴가 동안 폴린은 매일 밤 내게 와서 별의별 질문을 다 퍼부었고, 나는 차마 여덟 살짜리 아이의 동심에 상처를 줄 수 없던 나머지 그걸 다 받아주고 말았다.
이솝우화에 헨젤과 그레텔에, 각종 동화책 내용부터 시작해서 겨울X국 스토리까지 얘기해 주었으니 이건 뭐.
와! 기욤의 구전만화극장! 24시간 절찬리 호황 중!
그런 내 모습을 본 나폴레옹은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려 줄 뿐이었다.
아, 듀퐁? 듀퐁은 첫날 네 살배기 꼬마 제롬과 어울려 다니더니 열흘 내내 힐링이란 힐링은 다하고 살까지 포동포동하게 쪄 있었다.
하기야 나머지 아이 네 명분의 활동량을 나와 나폴레옹 형이 감당했으니 힐링이 안될 리가 없지.
파리가면 무조건 굴려버릴 테다.
우리가 탄 툴롱 행 배가 아작시오 항을 떠나기 시작하자, 레티치아 아주머니와 나폴레옹의 동생들은 모두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중 제일 손을 빠르고, 많이 흔든 건 폴린이었고.
그런 폴린의 모습에 나 또한 하얀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뽑아 크게 흔들어주었다.
하긴 애한테 좋은 추억 좀 만들어주는 값으로 다크서클이면 나쁘지 않은 대가지 뭐.
***
“···다른 집 아이랑은 그렇게 친밀하시면서 집에는 발걸음도 안 하시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기욤 도련님?”
“아니...그건 뭐...”
“왜 그러십니까,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없습니다.”
집사 알랭의 서슬퍼런 말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툴롱 항에 도착한 뒤, 우리는 곧바로 파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 어? 알랭? 알랭이 무슨 일로 여기 기다리고 있어요?
- 가주님께서 도련님이 지금 파리로 바로 가시는 건 조금 위험하다고, 일단 게헨느에서 며칠 보내다 가시라고 하셨습니다. 전 도련님이 도착하시는 대로 바로 출발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왜요? 파리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 일단 자세한 건 가는 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련님의 친우 분들도 같이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납치 아닌 납치를 당해 게헨느로 가고 있었다.
“알랭, 무슨 일이 길래 위험하다는 거예요?”
내 질문에 나와 마찬가지로 영문 모를 납치를 당한 듀퐁과 나폴레옹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알랭은 덤덤하게 얘기했다.
“그르노블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났고, 육군이 그걸 진압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예?”
그르노블. 툴롱에서 리옹과 파리라는 큰 도시로 오고 가려면 지나야 하는 작은 도시다.
분명히 우리가 올 때까지만 해도 별 일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알랭은 말했다.
“···소요사태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얘기하지만, 군대가 들이쳤다는 건 분명히 위험한 수준으로 컸다는 걸 의미한다고 가주님께서 얘기하시더군요.”
게헨느로 가는 우리의 마차는 안 좋은 분위기로 가득 차고 말았다.
작가의말
연재시간 변경을 공지로 등록하지 않아 독자 분들께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ㅠㅠ
앞으로는 공지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흑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