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파 (2)
“하하하! 요즘 그 오스트리아 잡년이 기가 팍! 죽어있는 꼴을 보니 속이 다시원합니다 그려!”
“으하하하! 이게 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우하신다는 거 아니겠소이까?! 저깟독일 것을 고상한 프랑스식 이름인 ‘마리 앙투아네트’라고 불러야 한다니, 이 무슨! 자기의 저급한 고향인 독일식으로, ‘마리아 안토니아’라고 부르라고 하라지요.”
“그럼요! 그럼요! 애초에 자기 혼자 별궁에 틀어박혀서 혼자 청승 떠는 꼴을 보아하니, 우리 프랑스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저런 오스트리아 촌년이 어울릴 턱이 없었습니다!”
“자, 자. 우리 귀한 손님 분들. 이렇게 좋은 날에 그렇게 성들 내지 마시고, 카드 한번 씩 뽑아서 즐겨봅시다! 창밖에도 저렇게 예쁜 함박눈이 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껄껄껄.”
“좋소! 내 어제는 5만 리브르 잃었어도 오늘은 꼭 그 배를 따갈 테니, 남작도 각오 단단히 하시오.”
파리의 한 사교회장은 오늘도 ‘오스트리아 촌년’, ‘합스부르크의 탕녀’, ‘프랑스의 국격에 맞지 않는 저급한 여자’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헐뜯기 바빴다.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잠재적 적국인 오스트리아의 왕가에서 시집온 것도 그녀가 당하는 조리돌림과 비아냥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큰 건, 바로 몇 년 전 있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었다.
욕심에 제대로 미친 여자사기꾼과 왕비에게 접근하고 싶었던 한 성직자가 만들어낸 희대의 스캔은, 프랑스를 가히 뒤흔들어 놓았다.
성직자에게 왕비가 수백만 리브르에 달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원하고 있으며, 이를 사서 자신에게 넘겨준다면 왕비에게 전달해주겠다며 말한 사기꾼은.
정작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받자마자 그걸 분해하여 암시장에 팔아버렸고, 결국 진상을 알게 된 왕비에 의해 채찍을 얻어맞고 수감되었으나 왕비를 지극히도 싫어하는 몇몇 세력에 의해 영국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영국으로 도망가고 나서도 사기꾼은 21세기의 연예계 인터넷 찌라시 급의 말도 안 되는 성적 스캔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공격했는데, 이는 그저 씹을 거리만을 원하던 기자들과 귀족들의 귀에 들어가, 마치 진실인양 일파만파 커지고 말았다.
결국 왕비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가히 ‘여자 가롯 유다’가 되어 온 세상에게 욕을 얻어먹게 되었다.
“···폐하. 소첩이 긴히 할 말이 있나이다.”
“내 지금은 마음이 편치 않아 나중으로 미루겠소. 부디 이해해 주시구려.”
“···폐하께서도, 설마 그 허무맹랑한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날이 많이 차오. 그러지 말고 들어가시오.”
“···.”
“왕비. 날씨가 많이 차오.”
“···정말 너무 하십니다.”
루이 16세는 그에게 몸을 돌려 멀어져만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뒷모습을 보고,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다시 목울대 뒤로 말을 넘겼다.
그렇게도 처량한 왕비의 뒷모습을. 차마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반대로 시선을 돌리자, 창문에 자신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얼굴인 선선대인 할아버지 ‘태양왕 루이 14세’의 근엄한 눈코입이 문득, 그는 생각났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와 루이 16세는 얼굴을 뺀다면 너무나도 달랐다.
그는 그 위대한 태양왕처럼 ‘짐이 곧 국가다’라 말할 만큼 배포가 큰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할 만큼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도 아니었고, 누구보다 명석하여 나라를 젖과 꿀이 흐르게 만들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범인 중의 범인이었다.
***
“벌써 휴가도 나오고 진짜 꿀이란 꿀은 다 빠는구만. 안 그래 마티유 형?”
“그러니까 말이야. 모름지기 군인이라면 자나 깨나 요새에 있어야지. 그루시형 봐봐. 자기 휴가도 반납하고 열심히 훈련하고 있잖아.”
물론 그루시는 이번에 또 거나하게 사고를 한 번 친 탓에 ‘자발적’으로 휴가를 반납한 거긴 하지만.
아니 이 왕실 근위대라는 양반이 영내에서 루소 얘기를 하고 다니다가 중대장한테 쿠사리를 먹을 정도면 대체 뭐하자는 거지. 사실 루소는 맞으면 누구나 열렬한 지지자가 되는 최면빔이라도 쏘고 다니는 거 아닐까.
“마! 내 지이인짜로 힘들었다 아이가? 이거는 말이제, 내가 고생한 거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다, 보상! 그리고 그루시 햄은 또 이상한 짓하다가 중대장한테 휴가 잘린 거라 카지 않았나? 그거랑 와 비교를 하나?!”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쏘가리 나리.”
“
우리의 친구 나폴레옹 씨는 장장 8년 만에 받은 휴가를 받아 파리로 돌아왔다.
“생캉탱은 어때? 살만해? 군생활은?”
“이 쉐리들, 그 동안 편지도 몇 통 안 써놓고 머 그리 들려달라고 하는 게 많나?”
“뭔 남정네들끼리 편지야 편지는. 궁상맞게.”
“에잉, 냉정한 쉐끼들. 마, 그래 그건 됐다. 군생활하는 게 그리 궁금하나?”
그때 플뤼에 부인이 다과를 가지고 우리가 모여 있는 방에 들어왔다.
“어머, 미래에 원수 되실 분인데 당연히 궁금하지. 호호호”
“아, 아지매. 쪼옴...”
역시 플뤼에 부인이야, 믿고 있었다구!
대(對) 나폴레옹 결전 병기 플뤼에 부인은 단, 한 문장으로 나폴레옹을 끙끙대게 만들어버렸다.
나폴레옹 형은 잠시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시작했다.
생캉탱이 양모 사업으로 유명해서 자기도 외투로 한 벌 해 입으려 했지만 너무 비싸서 포기했다 라던가, 병사들하고 시시덕거린 얘기, 아무리 쏘가리 초임 월급이라도 너무 짜지 않냐는 얘기, 좀 더 큰 도시인 아미앵으로 발령 났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등 흔한 잡담이었다.
“그러면 우리만 만나보고 바로 고향으로 가는 거야?”
내 말에 나폴레옹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이다. 너거들 말고도 만나야 할 사람이 하나 있다.”
“누구? 아, 그 수학 교수님?”
“그라제. 내 학교 댕길 때랑 공부할 때 신세 마이 졌다 아이가.”
“하긴 형은 수학을 되게 좋아했으니까.”
“니도 수학을 안 파봐가꼬 그런다. 하면 잘하는 아가 딱 점수만 받고 끝낼 생각하니까 수학이 재미가 없제!”
뭔 소리야. 이 세상에 수학만큼 어렵고 짜증나고 싫은 게 없는데. 어떻게 수학이 좋지? 이 형도 그루시 형처럼 누구한테 최면빔이라도 맞은 건가.
“아 그건 그렇고, 기욤이 너도 인제 비서 쓴다꼬? 마, 성공했네!”
“다 형이 준 아이디어 때문이지 뭘.”
내 말에 나폴레옹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 인마 사업 좀 오래하더니 아예 혀에 기름칠을 했고마. 킥킥. 아무튼 니도 인제 할 일이 쪼매 줄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 간편식사 가게도, 멀미약 사업도 다 정상궤도에 올라서 원자재출납 같은 기본적인 일만 하면 현상유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맞는 말이긴 하지. 그런데 왜?”
“아 별건 아이고, 한 번 휴가 겸 해서 우리 집이나 함 놀러 오라꼬. 코르시카는 완전 남쪽이라 여그 파리보다 훨씬 따듯하다 아이가.”
“휴가라. 휴가.”
난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했다.
파리로 올라온 지도 이제 거의 햇수로 5년이나 됐고, 그 동안 일이랑 학업에 치여 살면서 이렇다 할 휴식도 없이 쭉 달리기만 하긴 했다.
계속 이렇게 달리기만 하면 언젠가는 큰 사단이 날 수도 있고, 슬슬 한 번 쉬어줄 때도 된 건가.
“일단 플로리앙 씨랑 얘기 한번 해보지 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나폴레옹은 그런 내 모습에 좋아하면서 마티유에게도 물었다.
“니도 갈래?”
“아니. 난 연애사업에 투자하느라 좀 바빠서. 헤헤.”
“와, 마 기욤아! 마티유 얘 와 이리 됐나? 거의 뭐 공처가네. 등치 값 좀 해바라!”
추운 겨울날, 오랜만에 모인 우리 모임은 하루종일 웃고 떠들며 따듯한 시간을 보냈다.
물론 한 사람만 빼고.
“목소리가 작다!”
“소위! 에마뉘엘 드 그루시! 예! 알겠습니다!”
“목봉이 무겁나, 그루시!”
“아닙니다!”
“목봉 드는 거 가지고 그렇게 기분이 꼽나!?”
“아닙니다!!”
“꼬우면 니가 중대장 해라!”
“아닙니다아아악!!”
중대장의 시선은 그루시를 떠나 그루시의 뒤에서 같이 목봉을 들고 있는 중위에게 향했다.
“드제 중위! 힘든가!?”
“아닙니다!”
“혹시 지금 ‘내가 왜 그루시 이 새끼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있나?!”
“으닙니드아!”
“후임관리 제대로 안하나!”
“아닙니다아아악!!”
드제 중위는 그루시 소위가 너무나도 미웠다.
‘죽일 테다. 그루시.’
“”갸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말거나 오늘도 근위대 훈련교장에서는 고통에 젖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가득 찼다.
***
“오! 보나파르트! 내 둘도 없는 제자가 왔구나!”
“라플라스 교수님! 오랜만에 뵙심더! 잘 지내셨습니꺼?”
“나야 항상 파리에 있는데 뭘. 자네야 말로 객지에서 고생하니 잘 지내는지 궁금하군 그래.”
나폴레옹은 환하게 웃어보였다.
“자, 자 이렇게 서서 있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는 게 어떤가? 조교? 여기 커피 두 잔만 가져다주게.”
“···교수님, 저 조교 행님은 아직도 조교입니꺼?”
“응? 아 배울게 많으니 어쩔 수 있나. 하하하. 왜? 자네도 내 조교 해 볼 생각있는 건가? 자네가 들어온다고 하면 내 한 자리 여석쯤은 열어줄 수 있네만.”
“아, 아니요. 사양하겠심더...”
두 사람은 그렇게 한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래, 그래! 교장과 프랑스 역사상 유례없는 도박을 한 나폴레옹답게 생캉탱에서도 잘 지내고 있구만. 내 맘이 좀 놓이는 듯 하이.”
이 세상에 아끼던 제자가 커서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다는데 안 좋아할 교육자가 어디 있을까.
라플라스 교수는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때, 나폴레옹은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그런데, 요 근래 쪼매 몸을 조심히 하이소.”
갑작스러운 나폴레옹의 말에 라플라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보나파르트?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겐가?”
“생캉탱에선 지금 굶어죽는 사람과 얼어 죽는 사람이 생겼습니더. 저도 오랜만에 만난 날 이런 안 좋은 말을 하기는 쪼매 싫지만은 교수님이 워낙에 바쁘셔가, 지금 이렇게 말 안하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하는 말입니더.”
사람들이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
그 말은 상당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 말이었다.
단순한 빈민이 죽는 거라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이니 나폴레옹이 굳이 자기에게 말할 까닭도 없다.
즉, 죽은 사람들은 일반 소시민들이 분명하다. 그
리고 소시민들이 죽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불만이 폭증하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자네 말대로라면 조만간 소란이 있을 수도 있겠구만.”
수백 년 전 영국에서 있었던 시민들의 반란인 ‘와트 타일러의 난’이 생각나는 라플라스였다.
물론 18세기의 프랑스에서는 그만큼 큰 난은 생기지 않겠지만, 돈 많은 귀족들이 강도짓을 당할 수는 있다.
“자네의 말 유념해 두지. 고맙네 알려줘서.”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심꺼. 당연한 일을. 하하하.”
라플라스는 기특한 제자와 손을 마주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항상 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연재시간에 변경이 있을 것이라 이렇게 독자분들에게 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사업가로 혁명에서 살아남기]는 13일 월요일을 시작으로 저녁 7시에 올라갈 예정입니다!
모쪼록 연재시간의 변경 후에도 많은 사랑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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