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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대한파 (1) (33/341)

대한파 (1)

20XX년 1월 대한민국 강원도 철원 GOP

“누구냐! 화랑!”

“북한군이다. 씨발.”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임기찬 상병님이십니까?”

“어, 그래. 오늘은 좀 어때?”

“좆 됐습니다. 십초만 서있으면 내복까지 뚫립니다.”

“아 지랄 하지마 진짜. 자, 인수인계 다 했으니까 라면 까먹다가 당직한테 걸리지 말고 빨리 가서 자라.”

“예! 상병님도 수고하십쇼.”

먼저 초소를 지키고 있던 두 병사는 내게 경례를 한 뒤, 비탈길을 서둘러 내려갔다.

그들이 다 내려가자, 초소 안에는 나와 후임병 둘만이 남게 되었다.

“야. 오늘 온도 몇 도라고 했지?”

“아마 영하 40도 인가로 기억하지 말입니다.”

씨발. 여기 대한민국 맞아? 모스크바도 이 정도로 춥진 않겠다. 진짜.

“임 상병님.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십니까?”

“그냥 존나 추워서. 와 철원 진짜 온도 실화냐? 북괴새끼들은 씨발 핫팩도 없을 텐데 걔들 어떻게 안 얼어 죽는 거야?”

난 내 건빵주머니에 쑤셔 넣어놨던 핫팩을 꺼내면서 후임에게 말했다.

평소에는 초소에 도착해서 5분 정도는 버텼는데 이 날은 유독 추운 탓에 방한 장비가 1분도 안 돼서 냉기에 뚫려버린 탓이었다.

“아, 이렇게 추우니까 담배 개 땡긴다. 진짜로.”

“그러다가 당직사관한테 걸리면 좆 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딱, 딱 한 대만 몰래 피면 되지 않을까.”

“그냥 꽁쳐놓은 젤리나 드십쇼.”

난 건빵주머니 안에 넣어 놓은 포장지를 열어 안에 든 곰모양 젤리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무슨 맛입니까?”

“사과 맛. 너도 하나 먹을래?”

“마! 하모, 내도 함 주바라.”

“에?”

내 어깨를 잡아채는 손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소위 계급장을 단 남자가 당직사관 완장을 찬 채 날 노려보고 있었다.

“마! 누가 경계 중에 딴 짓하라 그랬나!?”

“그런 사실 없습니다!”

씨발 걸려도 쏘가리 나폴레옹 저 미친놈한테 걸리다니.

“어? 나폴레옹?”

어느새 내 앞의 한국군의 디지털 군복을 입은 소위는 사라지고, 18세기 프랑 스 군의 멋들어진 군복을 입은 소위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마! 기욤이! 머 그리 쳐다보노!”

***

“으아아아아악!!”

씨발. 제대한지 이제 18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군대 꿈을 꾸다니. 18년이 지났는데 씨팔.

“굳건이 이 개새끼가 날 무간지옥에 빠트린 게 틀림없어.”

나도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한숨을 뒤로 한 채, 난 침대에서 일어나 주섬주섬옷을 갈아입었다.

문득 창 밖에서 들어오는 새하얀 빛에, 방금 전까지 감겨있던 눈이 저려왔다.

가뜩이나 남향으로 된 창문인데 눈에 햇빛이 반사돼서 체감 상 태양이 두 개는 떠있는 듯했다.

온 세상이 새하얗다.

그것이 1788년 1월의 파리를 본 사람들의 첫인상이었다.

파리의 남과 북을 가로질러 도시 전체에 물을 대던 세느 강은, 그 부드러운 물줄기를 배안에 꼭꼭 숨긴 채 희뿌연하게 얼어붙었다.

도시 안의 목자들의 안식처가 되어주던 노트르담 대성당의 드높은 첨탑은 곳곳에 고드름이 언 나머지, 곳곳에 짐승의 이빨이 돋아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며칠 전까지 쉽사리 사람과 우마가 오가던 길은 곳곳에 빙판이 생겨, 사람들이 미끄러져 다치거나 말의 발굽이 부러지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내가 프랑스에서 이런 겨울 날씨를 다시 느낄 줄은 몰랐는데.”

하필 이렇게 추운 날이 정기 자선사업 날이라니. 이미 예전부터 하던 거라 지금 와서 내뺄 수도 없고 진짜 죽겠다 죽겠어.

대충 준비를 끝내고 하숙집 문을 열자, 어마어마한 한기가 뿜어져 들어왔다.

“갸아아아아악! 씨이이발! 이거 진짜 철원이잖아!”

윽, 눈앞에 GOP 경계초소가 보여. PTSD, PTSD가 온다!

나는 서둘러 이삭의 민족 사무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그대 가슴에~얼굴을 묻고~호호호!”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낸 이삭의 민족 조리장 마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귀가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도 근속연수가 3년이 되어, 사장님이 말한 대리급으로 진급해 다른 사람들보다 은화 한 닢을 더 챙겨가게 된 탓에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쁨이 가득 들어있었다.

“아이고! 뭐가 이리도 춥담...?”

항상 빨래를 하던 강어귀에서 불어온 차가운 돌풍에 옷깃을 여미며 마리는 말했다.

그녀의 나이 쉰 평생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날씨였다.

벌써 이웃 중 몇몇 집은 쟁여놓았던 땔감을 전부 써버린 나머지, 이 추운 날씨에 나무를 베러간 사람도 나오고 있었다.

개중 누구는 동상으로 발가락 한 마디를 끊어내기도 했고 누구는 한파 때문에 춘궁기를 이겨낼 보리가 다 죽어버릴 거라며 기분 나쁜 소리를 일삼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프랑스 같이 넓은 땅에서 그깟 곡식 몇 알 안 나오겠어?”

마리는 추운 날씨 덕에 막힌 코를 팽 풀면서 말했다.

아무렴, 세계 최고의 평야를 지닌 프랑스다. 하물며 러시아 그 야만인들의 차가운 땅에서도 밀과 보리가 쑥쑥 자라나는데 프랑스에서 겨우 한파로 굶을 생각이라니.

“그리고 왕님이 우리를 그렇게 냅두시겠어? 참 걱정도 많지.”

짧은 식견의 마리도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

“빵 받아가세요! 빵!”

“추운 날 배라도 든든히 채우고 가세요!”

“나리들 정말 감사합니다!”

“기욤 형. 오늘도 고마워!”

“마티유 씨. 항상 신세만 지네요...”

나와 마티유는 들고 나왔던 빵 바구니를 모두 비워내느라 지친 나머지 잠시 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티유는 뭔가를 발견한 듯 날 불렀다.

“야, 기욤아.”

“어, 왜?”

“저기 저 사람들은 뭐냐?”

난 마티유의 손이 향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뭐야. 형은 저 사람들 본 적 있어?”

“아니, 나도 모르니까 너한테 물어보지.”

우리 둘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서른 중반의 아름다운 귀족 여성이 사내아이 하나와 딸아이 하나를 대동한 채, 빵바구니를 들고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나와 마티유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부인. 혹시 무엇을 찾고 계신가요?”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말에 부인은 움찔 하면서 능숙하지만 어딘가 억양이 좀 다른 프랑스어로 말했다.

“괘, 괜찮아요. 그보다 오늘 사람들에게 빵을 좀 나눠주려 했는데 사람들이 별로 없네요.”

“아.”

우리가 먼저 나눠준 것 때문에 사람들이 다 돌아 가버렸구나.

본의 아니게 선수를 쳐버렸네.

“아마... 저희가 먼저 사람들에게 먹을 걸 나눠준 것 때문에 그런 거 같네요.”

내 말에 부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본 초등학교 저학년 나이의 여자아이는,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당신들 지금 무슨 짓을 한 지 알아! 감히 이 나ㄹ···읍읍!”

그런 아이의 입을 빠르게 틀어막은 부인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해요. 신사 분들. 우리 딸아이가 좀...괄괄한 편이 있죠.”

교양 있으신 분이네. ‘우리애가 뭐 잘못했다고 그래욧!’하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라.

그런 내 눈에 앙증맞은 손을 덜덜 떨고 있는 대여섯 살 남짓한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부인. 아무래도 아이들이 많이 추워하는 것 같은데 잠시 따듯한 곳에 들렸다가는 건 어떻습니까?”

내 말에 부인은 덜덜 떠는 아이의 손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서둘러 끄덕였다.

***

“자, 다시 해보자. 난 ‘오빠’지 아저씨가 아니란다?”

“흥! 그렇게 말해도 아저씨다! 본녀의 마음은 확고하다!”

“이..익...나 아직 스물도 안됐거든? 다시 해봐 ‘오빠’!

“헹, 본녀는 절대 안 해 줄 거다.”

“이...이..”

마티유 형이랑 저 꼬마 여자애 거의 만담 콤비가 따로 없네.

나는 난로에 나무 한 토막을 더 던져 넣으면서 생각했다.

이삭의 민족 사무실로 부인과 두 아이를 데려온 것도 삼십 분 쯤 지났다.

남자아이는 부인의 품에 안겨 어느새 졸고 있었고 여자아이, 이름이 샤를로트였나. 그 아이는 마티유 형과 코미디 프로를 찍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를 경계하던 부인도, 이제는 편안한 얼굴로 나와 대화 하고 있었다. 물론, 품 안에 있는 왕자님이 깨어나지 않게 낮은 목소리이긴 했지만.

“기욤, 이라고 했나요? 청년은 참 따듯한 사람이군요.”

“뭘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죠. 그렇게 비행기 태워주실 필요 없습니다.”

“비..행기요?”

“아 그러니까, 막 그렇게 띄워주실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내 말에 부인은 싱긋 웃더니 아련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에서 쉴 수 있었던 게 얼마만인지...”

“뭔가...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내 말에 부인은 씁쓸한 미소를 띈 채 말했다.

“···사기를 당했어요. 전 그런 적도 없는데 누군가 제 이름을 더러운 곳에 썼더군요. 차마 말 못할 그런 일에요.”

“···저런.”

“남편은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나에게 화를 내더라구요. 참...”

그녀의 눈망울에 이슬이 맺혔다.

“아, 내 정신 좀 봐. 너무 오래 이렇게 궁ㅈ···아니 집을 나와 있었네요. 이제 가봐야겠어요”

부인은 손으로 우아하게 눈물을 훔치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문을 나섰다.

나에게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이 언뜻 처량해 보였다.

“사를로트! 난 아저씨가 아니라고!”

“흥! 본녀에게는 아저씨가 맞노라!”

그러니까 제발 산통 좀 깨지 말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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