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살아가는 법 (5) (32/341)

살아가는 법 (5)

“으으으.”

듀퐁은 요즘 들어 부쩍 건조해진 날씨 덕에 뻑뻑해진 눈을 손으로 문지르며 낮게 신음했다.

그는 잠시 쉴 겸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눈에 담았다.

11월이었지만 올해는 벌써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몇몇 해가 잘 들지 않는 응달에는 벌써 눈이 소복이 쌓여, 아이들이 예년보다 이르게 눈사람을 만들고, 서로 눈을 던져대며 놀고 있었다.

문득, 듀퐁이 처음 이 이삭의 민족 연구실로 왔을 때의 무더웠던 7월 날씨를 생각하면 시간이 참 많이 흘렀구나 싶었다.

“···후. 벌써 4개월이나 지났는데 도통 진전이 없네...”

듀퐁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가 방금 전 까지 앉아있었던 자리에 난자하게 어질려진 벨라도나와 각종 화학기구, 그리고 수북하게 쌓여 있는 다 마신 커피잔은 그가 얼마나 이 일에 열심히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라부아지에 선생님의 말대로, 기욤을 그저 ‘탈세범’ 수준으로 여기고 좋게 보지 않던 그도.

4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기욤의 옆을 지키면서 그가 선생님이 해준 말처럼 악독하고 간악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그 정반대임을 알게 된 듀퐁이었다.

동갑인데다가 서로 생각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보니 아예 친구를 먹어버린 탓이었다.

“뭐, 기욤이 걔는 계몽주의자라고 쳐도 좀...많이 자유스럽긴 하지만.”

슬슬 본격적으로 추워진 오늘도 빵 보따리를 들고 빈민가로 향한 기욤을 생각하며, 듀퐁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에게는 벨라도나 추출도, 요새 즈음에는 그저 물주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기보다 친구와 함께 연구하는 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자 그러면 다시 시작해볼까.”

계속 의자에만 앉아있어 뻐근해진 팔다리와 허리를 몇 번 뚜둑 소리 나게 푼듀퐁은, 다시 자리에 앉아 화학약품을 뒤적거렸다.

“이제는 조합 해볼 차례가 탄산나트륨인가?”

이전 실험들처럼. 듀퐁은 말려서 가루로 만든 벨라도나에 탄산나트륨을 일정량 붓고 가루와 잘 섞이게 저어주었다.

“흠... 뭔가 더 넣어봐야 하나?”

화학은 경험론의 산물이다. 모든 것을 일단 부어보고, 그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화학자의 일이다.

그런 듀퐁의 눈에 에테르가 들어온 것은 어떻게 보면 운명이었다.

***

“으어어어 추워! 추워! 졸라게 추워어!”

“아니, 겨우 이게 춥다고 찡찡대? 그래서 형이 여자 친구 지켜줄 수 있겠어?”

“그게 졸라 추운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상관있다고!”

“기욤, 너 또 솔로라고 괜시리 심술부리는 거지? 그런 나쁜 마음씨로는 여자들 다 도망간다? 킥킥.”

“갸아아아아악!”

장장 한 시간의 자선사업 활동이 끝나고 이삭의 민족에 돌아온 나와 마티유형은 추위 때문에 빨개진 볼과 손을 난로에 녹이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언젠가는 내가 꼭 더 커져서 엉덩이를 발로 까버릴 거니까.

젠장, 누구는 180cm에 여자친구까지 있는데 누구는 이제야 170cm에 맨날 일에 치여 살다니. 인생은 불공평한 게임이다. 아, 이런 좆망겜 수준. 진짜 게임이었으면 벌써 던질 각 쟀다 진짜.

그렇게 우리가 낄낄대는 사이, 누군가 마루로 만든 복도를 쿵쿵거리면서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를 내던 사람은 우리가 있는 조리실 앞에 멈추더니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듀퐁? 뭐야, 무슨 일 있어?”

듀퐁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숨도 헐떡였다. 입꼬리는 조커만큼 찢어져서 거의 귀에 걸려있다 싶었고.

“찾았어!!! 찾았다고!!!”

“뭐, 뭐라고?”

“벨라도나! 내가! 찾았다고!”

실제 역사보다 40년 빠른 아트로핀의 순수 생추출이었다.

***

듀퐁이 할 일을 끝낸 이후, 나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우리 제품을 선전했다.

제일 호응이 좋았던 곳은 마부조합.

예전에 겪은 바로, 18세기의 도로는 그저 최악 중 최악이다. 당연히 손님들 중 멀미에 시름하는 사람은 부지기수고.

그러니 마차 이용객들은 우리 멀미약의 가장 충성스런 고객이 돼 줄 것이다.

거기에 마부들도 평소 손님한테 받는 돈에 더해서 부가수입으로 멀미약 판매액의 일부를 가져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순탄하게 첫 계약을 따낸 나는 바로 제퍼슨의 저택으로 향했다.

더 큰 계약이 남아있거든.

“그러니까 기욤 씨는 이 ‘멀미약’이라는 걸, 우리 미합중국에다가 팔고 싶다는 건가요?”

“아뇨. 정확히는 미국과 프랑스 사이를 오가는 배에 팔고 싶은 거죠.”

이 시대의 배는 돛을 단 범선들이다. 거기에 기본 항해시간도 거의 두 달은 기본이오, 세 달은 예삿일이며, 역풍을 맞으면 간간이 네 달도 걸린단 말이다.

21세기 첨단 기술로 만든 거대한 여객선에서도 뱃멀미 환자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하물며 이런 범선 탑승객들이 오죽할까? 토하다가 탈진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쩝. 저는 기욤 씨가 절 찾아오셨길래 드디어 제 제안을 받으시는 줄 알고 설렜는데 말입니다.”

제퍼슨 씨는 입맛을 다시더니 물에 빠진 강아지마냥 날 쳐다보았다.

아, 미국 안 간다구요! 안 간다고! 안 가아아!!

“그건, 조금...”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제가 왕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의 의지를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제퍼슨 씨는 크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음. 농담이라기에는 좀 진심이 담긴 눈빛이었는데 말이지.

제퍼슨 씨는 웃음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저도 공짜로 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신대륙인들은 신의를 최우선으로 친답니다.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다. 뭐 그런 것이죠.”

흠, 요컨대 뭔가 제퍼슨 자신에게나 미국에 이익이 좀 가야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판매 수익의 2%를 가져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오?”

내 말에 제퍼슨 씨는 오른손으로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단, 제퍼슨 씨가 수배해주신 배에 한정해서요.”

“하하하! 이것 참, 한 나라의 외교관을 이렇게 굴리셔도 되는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저와 우리 직원들 다들 몇 개월 이상씩 갈아 넣은 제품인데, 그 정도는 해주셔야 수지가 좀 맞죠.”

제퍼슨 또한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하고 손을 한번 활짝 폈다.

승낙의 표시였다.

“좋습니다. 제퍼슨 씨! 우리 이삭의 민족과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손을 마주잡은 뒤, 세차게 흔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일이 하나 더 있었는데.

“제가 잠시 깜빡한 게 있네요.”

그런 내 말에 제퍼슨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음? 무슨 일인가요?”

“이번 년도에 한해서 신대륙과 곡물 거래를 좀 해보고 싶은데, 혹시 관련자와 자리를 마련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퍼슨은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더니 말했다.

“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곡물은 지금도 충분하시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합니다만.”

보험으로 곡물상 네 군데와 계약을 하고, 구제 보험도 하나 들어놓긴 했지만.

그래도 유비무환이란 사자성어도 있지 않나.

“뭐 재난에 대비하는 건 얼마나 해도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제퍼슨 또한 내 눈을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11월인데도 눈이 펑펑 내리는 모습으로 가득 차, 마치 흰색 벽돌로 도시를 지은 듯한 모습이었다.

“···기욤 씨, 예전 일 때문에 이번에 있을지 모를 냉해를 경계하시는 겁니까?”

“그것도 그런데...”

“?”

“예감이 별로 좋지가 않아서요.”

1785년의 12월과 1786년의 1월보다 올해의 눈은 더 빨리,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

“폐하! 죽여주시옵소서!”

“되었네. 그만하고 고개를 들게나, 재무총감.”

국왕 루이 16세의 말에 무릎을 꿇고 있던 재무총감 브리엔은 일어설 수 있었다.

소위 ‘푸른 피’라는 것들이 저지른 일에 격분한 상태인 브리엔의 얼굴은 홍당무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그래. 고등법원의 법관들이 거부했다 하던가? 그리고 삼부회를 소집하라고?”

“아,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맞사옵니다.”

“허어, 통제라. 참으로 안타깝구나. 참으로 안타까워.”

왕은 날씨 때문에 차가워진 창문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차가움에 손가락이 아려왔다.

“그자들,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아직도 짐과 왕비 사이의 일로 시끄럽다지.”

루이 16세의 말에 브리엔의 붉었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폐, 폐하!”

“괜찮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니.”

왕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충성스런 재무총감을 다독였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으로 인해 왕실의 권위는 땅에 추락...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무너지고 말았다.

이 나라의 왕인 루이 16세가, 왕비가 일개 바람둥이 귀족과 불륜관계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위신의 무너짐이었고.

피를 보기 싫어하는 그의 유순한 성격 탓에 불륜 사건의 주동자를 바로 처형하지 않고 감옥에 수감시켰다가, 그 사람이 탈옥하여 온 유럽에 불륜사건의 추문을 뿌리고 다닌 것이 두 번째 위신의 무너짐이었다.

만약 그가 ‘잔인한 왕’이라는 칭호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왕비를 홀린 바람둥이 귀족의 목을 쳤다면, 몇몇 사람들이 볼멘소리를 내더라도 왕의 위신은 단단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유약함 덕분에 이도 저도 아닌 방법을 썼다가 왕가의 위신이 무너진 것이니, 누굴 탓 할 수 있겠는가.

루이 16세는 그저 이 안타까운 현실이, 시간이라는 약에 의해 서둘러 치유되기만을 빌 따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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