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살아가는 법 (4) (31/341)

살아가는 법 (4)

듀퐁 사.

세계 최대의 다국적 화학 기업이자 세계 최초로 나일론을 만들어낸 굴지의 미국 기업이다.

처음 듀퐁을 만났을 때 이름을 듣고 ‘설마?’했지만 아쉽게도 그는 프랑스인이다.

미국 기업이니 미국인이 만들었거나, 하다못해 신대륙으로 이주할 생각이 있는 사람일 텐데 우리 듀퐁은 프랑스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월척을 낚았나 싶어 좋아했지만 뭐, 그래도 공돌이는 공돌이니까.

“기욤 씨. 또 뭘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듀퐁은 예의 그 똘망똘망한 눈을 한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에게 물었다.

“아니, 뭐 요런저런 잡생각이죠.”

아는 어깨를 으쓱한 뒤 다시 탁자에 턱을 괴고 우리 앞에 놓인 저 가증스러운 골칫거리를 쳐다보았다.

“기욤아. 벨라도나를 그렇게 원수 보듯 봐도 달라지는 건 없어. 이 세상은 사랑의 눈길로 보기에도 벅차단다.”

그런 내 모습에 마티유 형은 불쌍하다는 듯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이 양반. 요즘 연애한다고 여기저기 쏘다니더니 아주 사람이 회까닥 맛이 가버렸지 뭐야.

썅. 갑자기 생각하니까 빡치네.

누구는 하루 종일 사무실하고 간이 실험실 왔다갔다하면서 일하는데, 누구는 팔자 좋게 여자친구 만들어서 놀러 다니고.

갸아아아악! 나도! 나도 놀 거야!

으어어어! 내 욜로 라이프! 내 안락한 삶! 제발 돌려줘어어!!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듀퐁이 말했다.

“즙을 짜는 건, 불순물이 너무 많고. 딱 성분만 빼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가열이라던가 그런 방법을 써보면 되지 않을까요?”

내 말에 듀퐁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해볼 수 있는 기본적인 실험은 다 해봤는데, 다 소용이 없더라구요.”

“쩝.”

난 입맛을 한 번 다신 채 의자에 머리끝까지 몸을 기댔다.

단순히 즙을 짜는 걸로 안 된다.

불순물을 여과하고 남은 걸로 제품을 만들면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 비싸게 팔 수 밖에 없고, 이는 곧 고객들의 지갑을 충분히 열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만다.

내셔널 쥐오우그래픽에서는 이럴 때 뭘 하더라.

가열도 했고. 단순한 추출도 했고.

전기?

전기는 무슨, 전기가 이 시대에 어디 있어? 이건 제외.

그러면 뭔가 화학 물질 같은 걸 끼얹나?

“듀퐁 씨. 뭐 다른 화학물질 같은 걸 막 섞어보고 그러면 안 될까요?”

내 말에 듀퐁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싶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어떻게 보면 지금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네요.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죠.”

“아!!!!”

그 때 마티유 형이 소리를 지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듀퐁은 깜짝 놀라며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왜 그래? 형. 뭐 방법이라도 찾은 거야!?”

“마티유 씨. 무슨 방법인지 빨리 말씀 해주시죠!”

“엥? 무슨 소리야 다들. 테르바뉴 씨 만나러 갈 시간이 돼서 일어난 건데? 다들 열심히 해! 난 가볼게! 으히히힣.”

“씨발 빨리 꺼져! 갸아아아악!”

마티유 형의 염장질과 내 일갈에 듀퐁은 그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 뿐이었다.

***

“그대 가슴에 ~ 얼굴을 묻고 ~ 으흠흠.”

이삭의 민족 1호점의 조리장. 마리 아줌마는 오늘도 화창한 날씨에 기분 좋게 빨래를 널고 있었다.

지난 3년 간 상당히 많이 팔자가 핀 탓이었을까, 이전과는 달리 어느 정도 삶의 여유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에 두세 시간만 일하면 공짜로 끼니도 챙겨주는 데다가 돈까지 받는 일자리는, 그것만으로도 4인 가족의 삶을 조금 더 풍족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사장님은 거기에 더해서 남는 간편식사는 가족 수 만큼 챙겨가 아이들에게 나눠 줄 수 있게 해주셨고 저번에는 딸아이의 생일도 손수 챙겨주시는 등 가히 예수님이 다시 내려오신 것 아닌가 싶은 분이셨다.

마리에게는 정말 가족만큼 소중한 일자리였다.

“이보시오, 부인. 내 길 좀 물읍시다.”

“아이구머니나!”

그런 행복한 상상에 잠겨 있던 마리는 뒤에서 들려온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뒤를 돌아본 마리는 그의 얼굴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저 가증스러운 얼굴을.

방금 전까지 헤실헤실 웃던 마리의 낯은 한순간에 어두워지고 말았다.

“···세금 징수관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아! 저, 저희 집은 이번 세금 다 냈어요!”

“음?”

마리의 말에 세금 징수관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외눈 안경을 쓴 얼굴을 씰룩이다가 ‘아!’하고 깨닫더니 말했다.

“하하하! 부인, 오늘은 당신에게 볼일이 있어 온 것이 아니오.”

마리는 그 말에 겨우 긴장을 풀고 말했다.

“그, 그렇다면 무슨 일로?”

“요 근처에 테오라는 성을 쓰는 집이 있소?”

세금 징수관은 어느 순간 웃음기를 싹 뺀 얼굴로 말했다.

마리에게는 그런 징수관의 질문과 얼굴이, 마치 감정조차 없는 사신이 생사부에 적힌 사람의 주소를 물어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저 멀리 작은 오두막을 가리켰다.

“아...아마 저 집일 거여요. 징수관님...”

세금 징수관은 천천히 머리를 돌려 마리의 손끝이 가리키는 오두막을 보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오, 정말 고맙소, 부인. 그럼 이만.”

세금 징수관은 씩 웃더니 그 오두막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리는 애써 놀란 마음을 다스리면서 다시금 빨래를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리는 갑작스럽게 세 사람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워 졌다. 마리는 잠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테오 부부와 예의 그 징수관이었다.

“나리! 나리! 이것까지 가져가시면 어찌합니까!”

“맞, 맞아요! 징수관 나리! 제발 한 번만 물러주셔요!”

“장 투앙 테오, 이번 인두세와 이십분의 일 세, 소금세 등 6가지 세금 미납.

심지어 미납한 횟수가 한 번도 아니군?”

“제...제발! 지난 해 공장에서 다친 다리 때문에 아직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건 내 알바가 아니오. 나 또한 국왕 폐하의 명으로 집행하는 것이니, 날 탓하지 마시오. 아무튼 당신들은 시골 농민들 보다야 낫지 않소이까? 듣자 하니 농민들은 영주에게 지대와 연공, 소작료까지 추가로 낸다던데, 당신들은 오히려 형편이 좋은 편이라오.”

“아, 아니 버는 것에 6할을 가져가시면서 그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난 그저 법이 정하는 데로 행동하고 말할 뿐이외다. 아무튼 이번이 마지막 경고요. 다음에 올 때까지 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국왕 폐하의 충성스런 병사들이 와서 뜨거운 맛을 보여줄지도 모르지. 그럼, 안녕히 계시오.”

갑작스런 소란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그를 보고 있었건만, 서슬 퍼런 징수관은 그것이 대수라는 듯 콧방귀를 뀌고 태연자적하게 몸을 돌려 왔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골목 끝을 지나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분에 못 이겨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저, 저 악독한 새끼!”

“젠장, 세금을 10가지 넘게 걷어가면서 기한을 미뤄달라는 말도 못 들어주나?”

“카악 퉤!”

남자들은 세금 징수관이 지나간 거리에 가래침을 뱉어댔고,

“테오 씨, 테오 부인, 괜찮아요? 이거, 우리가 만들고 남은 빵인데 좀 가져가요.”

“그래요. 이건 내가 뒷산에서 캐온 버섯인데 이것도 좀 가져가요.”

여자들은 거리에 주저앉아 있는 테오 부부에게 먹을거리나 땔감을 가져다주었다.

너무도 화창한 하늘과는 다르게, 땅은 너무나 거무죽죽했다.

***

“이런 개새끼들! 천하에 둘도 없는 도적놈들!”

붉은 벨벳으로 치장하고 금실과 순백색의 비단으로 만든 사제복을 입은 남자는, 복장과는 달리 걸쭉한 욕을 내뱉었다.

전임 재무총감 칼론의 뒤를 이어 자리에 앉은 브리엔 재무총감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은 지 몇 달 만에 완전히 얼굴이 삭아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 재무총감 브리엔이오. 우리의 재정상태로는 도저히 증세를 피할 수 없소이다. 그러니 명사회 쪽에서도 증세에 대한 법안을 통과시켜 주시오.

- 증세라고 하면 어떤?

- 귀족과 성직자에 대한 과세 시작 및 책과 종이를 구매할 때 부과할 인지세요.

- 뭐, 뭐? 귀족과 성직자 과세? 이보시오, 브리엔! 우리가 그러라고 당신 뽑아놓은 줄 알아!?

- 아니, 그러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란 한단 말이오!

- 안되면 되게 하라, 모르시오? 아무튼 되게 하시오!

- 이런 개ㅆ···!

며칠 전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브리엔은 다시금 머리가 아파왔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아무튼 다 안 돼!

자신은 말하는 대로 따르는 꼭두각시이자 산제물이지, 재무총감이니 뭐니가 아니었다.

경제적인 능력이 아무것도 없는 그가 뭐라도 극복하려 개혁안을 만들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를 난자하게 찢어버리는 명사회였다.

“하물며 아브라함이 제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 천사를 내려보내 막아주셨지만 나는 그런 천사도 없지 않은가.”

지난 몇 개월 동안 그가 한 것이라고는 당장 이자를 못내 파산할 상황이 되자, 겨우 명사회의 동의를 얻어 6,700만 리브르를 다시금 빌려 이자를 낸 게 끝이었다.

빚을 빚으로 돌려막는 중인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한 가지 뿐이군. 폐하에게 직접 간청 드리는 수밖에.”

브리엔은 그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왕, 루이 16세의 명으로 명사회가 해산된 건 그로부터 얼마 안 돼서 일어난 일이었다.

“브리엔, 이놈! 우리가 이렇게 물러날 줄 알아!”

“이 간악한 자가 충신들을 음해하다니!”

“우우우 브리엔은 꺼져라!”

재무총감 칼론을 내쫓던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브리엔에게도 같은 말을 던져댔다.

“사제님! 이제 어떻게 하죠? 국왕께서도 브리엔 저자의 말에 동조하는 듯 싶습니다!”

“흥, 아내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국왕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하다니.”

“사, 사제님! 듣는 귀가 많습니다!”

“하, 들을 테면 들으라지요! 어차피 여기 있는 푸른 피 모두 국왕을 그렇게 신뢰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 그야 그렇지만은.”

“국왕이라는 작자가 왕비가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눈이 돌아가 외간 남자와 만나는 것도 모르는데 더 말해 뭐 합니까?”

“큼, 크흠.”

“뭐, 됐습니다. 어차피 브리엔 그자가 무슨 생각을 하던 우리는 저지할 수 있으니까.”

“예? 어떻게..”

“그야 뭐 법관들이 다 알아서 해줄 거요. 하하하!”

그리고 똑같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고등법원은 새로운 세금 과세와 인지세 등의 신설은 모든 신분의 동의가 있어야 함을 법에 근거하여 선언하며, 이에 따라 전 신분이 모여 이에 대한 의결을 맡아야 한다고 판결하는 바이다."

귀족과 성직자로 이루어진 고등법원은 브리엔의 세금 개혁안을 기각하고 삼부 회를 소집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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