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법 (3)
파리 바스티유 감옥의 병기창 옆, 주택.
“으흠흠~. 좋아~이걸로 준비는 다 됐구만!”
한참 휘파람을 불던 마흔 살 정도의 나이의 중년 남성은,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요새 일어나는 일 중 그의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던 그였다.
재무총감 칼론과 합의했던 ‘과학적인 근거에 의거한 농업계획’이라는 자신의원대한 계획이, 칼론이 모종의 이유로 퇴임당하면서 흐지부지 되어버린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상당히 자유로운 경제정책을 폈던 칼론의 뒤를 이은 새 재무총감 브리엔이 순어디 곰팡내 나는 책에서나 볼법한 구닥다리 경제정책을 민 탓에,
경기가 위축되면서 사람들이 낼 세금도 줄어들어 세금 징수관인 자신의 수입이 급감한 것이 제일 두 번째 이유이자 가장 큰 이유였다.
“하, 참나. 어디 말단 세금 징수관을 잡아다 앉힌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일평생 하느님만 찾던 멍청이를 재무총감이라는 자리에 앉혀놨으니 원. 쯧쯧.”
방금 전 까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남자는, 현 재무총감의 얼굴을 떠올리자 짜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 이러면 안 돼지.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후···.”
남자는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지우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든 뒤, 방금 전까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실험도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동안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계속해서 미뤄놨던 실험을 마침내 할 기회다.
이런 좋은 순간을 잡생각으로 망칠 뻔 하다니.
모처럼의 취미생활인데 기분을 잡칠 수는 없다.
이런 실험들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소싯적 지적 호기심을 위해 그 값비싼 다이아몬드도 말 그대로 ‘태워서’ 없애버린 그였다.
뜨거운 여름이든, 추운 겨울이든, 팔자에도 없는 세금 징수관 짓을 하면서 여기저기 욕을 얻어먹고 다닌 모든 이유가 그의 실험에 대한 욕구와 호기심 때문이었다.
“플라스크 하나하나가 어찌나 비싼지 원.”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실험 기구를 쳐다보았다.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귀에 걸리고, 빵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단순한 유리병과 주물일 것인데 그것들이 남자에게는 마치 금은보화처럼 느껴졌다.
아, 금은보화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장인들에게 일일이 맞춤 제작을 하다 보니 거의 같은 양의 금은과 맞먹는 실험기구도 있으니까.
“자, 그러면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으히히히힣!”
그러나 남자의 손이 플라스크에 닿기 직전, 누군가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라, 라부아지에 선생님! 콩도르세 후작님께서 찾으신다고···.”
어떻게 짜낸 시간 짬에 하는 실험인데 하필 이럴 때 방해를 받는 단 말인가.
라부아지에는 다시금 짜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려 소식을 전해준 청년을 보았다.
청년의 이름은 엘뢰테르 듀퐁. 친구인 피에르 듀퐁의 아들이자, 파리대학교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라부아지에의 조수로 있는 젊은 청년이었다.
“···조세국장님이... 난 갑자기 왜 찾으신다던가?”
조세국장 콩도르세 후작.
총명하고 넉살 좋고 인망까지 좋은 사람이지만 라부아지에에게는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껄끄러운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세금 징수관을 주된 부업으로 삼는 그에게, 조세국장이라는 위치에 서있는 콩도르세 후작와의 관계는 엄연히 상사와 부하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설령 상사가 자신을 좋게 봐준다고 해도, 이 세상에 상사를 껄끄럽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까.
라부아지에가 콩도르세 후작을 멀리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단지 그 때문이었고, 납득이 되는 이유였다.
“라부아지에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한 분이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쯧.
라부아지에는 혀를 한 번 차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듀퐁, 마차를 한 대 꺼내오도록. 어차피 갈 거라면 빨리 가야겠어.”
이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암. 아암. 그렇고말고.
라부아지에는 문을 나서며 애지중지하는 실험 기구를 아쉽다는 듯, 한 번 더 쳐다보고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
멀미약 제조 건으로 콩도르세 후작에게 손을 빌리러간 나는, 콩도르세 후작이 부른 ‘과학자’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힐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씨발 저 씹새끼가 왜 여기 있지?
난 악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맞은편 의자에 앉은 중년 남성을 쏘아보고 있었다.
물론 저쪽도.
라부아지에 또한 날 잡아먹을 듯 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저 돈에 미친 새끼가 과학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걸 믿느니 차라리 그루시가 사실은 멀쩡한데 말박이 흉내를 내고 있다는 걸 믿는 편이 더 낫겠다.
사실, 라부아지에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흥! 저 탐욕스러운 탈세범 애새끼가 물주라고? 하! 헛소리하는군. 콩도르세, 아무리 당신 부탁이어도 이건 못 들어주겠어.
저 놈이 물주라는 걸 믿느니 차라리 철옹성 바스티유 요새가 함락된다는 걸 믿는 편이 더 낫겠군.’
물론, 기욤은 실제로 있었던 라부아지에의 깽판 때문이었고 라부아지에는 심증에 불과한 내용을 믿은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콩도르세 후작이 응접실에 들어올 때까지 주먹다짐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네, 다들. 내가 요즘 통...이렇다 할 시간을 낼 여유가 없어서 말이지. 두 사람 다 인사는 나누었나?”
요즘 들어 안색이 안 좋아진 콩도르세 후작은 응접실 의자에 앉아, 여느 때와 같은 인자한 얼굴로 나와 라부아지에 두 사람에게 말했다.
“큼..큼..”
“어흠..흠..”
그런 부드러운 콩도르세 후작의 말에, 나와 라부아지에는 모두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콩도르세 후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음? 왜 그러나 둘 다? 아, 혹시 구면인 겐가? 하하, 그러면 일이 좀 쉽게 진행되겠구만. 하하하하!”
넉살 좋게 웃는 콩도르세 후작의 모습에 나와 라부아지에, 두 명 모두 차마 아무 말도 못한 채 묵묵히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
“쯧.”
콩도르세 후작의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들려온, 혀를 차는 소리에 나는 소리의 근원지를 쏘아 보았다.
라부아지에는 그런 내 모습을 보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왜 그러시오? 어디 불편한 점이라도?”
“그냥 어디서 쥐새끼가 ‘찍찍’ 대는 듯 해서 말입니다.”
내 말에 라부아지에 또한 날 쏘아 보기 시작했다.
뭐 어쩌라고. 씨발새끼야.
‘하, 탈세범 주제에 어깨를 참으로 당당히 피고 다니는군.’
그렇게 으르렁 거리던 우리는, 우리를 마중 나온 콩도르세 후작에 의해 헛기침을 연발하며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콩도르세 후작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손을 한 번 씩 마주잡더니 말했다.
“기욤 군. 라부아지에는 자네 같이 유능한 사람이니 그대와 잘 맞을 것이네.
꼭 염원하던 일을 성취했으면 좋겠구만.”
“예...후작님.”
“라부아지에. 기욤 군은 사고가 열린 총명한 사람이니 꼭 한 번 깊게 대화를 나눠보시게. 혹시 아나? 자네의 과학 실험에 도움이 될지.”
“예...조세국장님.”
콩도르세 후작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쯧.”
“퉤.”
물론 우리 또한 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한 건 덤이고.
라부아지에는 넌더리난다는 말투로 얘기를 시작했다.
“난 당신과 뭘 하고 싶은 생각 없소.”
“허. 우리가 마음이 맞는 날도 있네요? 나도 당신이랑은 뭐 하기 싫거든.”
“흥. 탈세범 주제에.”
“하, 영장도 없이 창문을 타고 텅 빈 사무실에 들어온 건 어떤 도둑놈이시더라?”
“그게 나라는 증거 있소?”
“당신도 내가 탈세범이라는 증거 있습니까?”
라부아지에는 질린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피차일반이군. 하지만 콩도르세 조세국장의 말을 거스를 수도 없는 일이니, 내 조수 하나를 붙여 주리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오.”
“누구더라도 당신 인성보다는 낫겠죠. 감사히 받겠습니다.”
라부아지에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안하더니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 또래의 청년에게 말했다.
“듀퐁, 앞으로 한 동안 저 놈의 일을 좀 도와주거라.”
“예?”
“일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어. 저 놈은 탈세범이라 네가 쓰는 돈은 다 검은 돈일 테니, 네가 하고 싶은 실험이든 뭐든 다 펑펑하거라.”
라부아지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저택 앞에 나와 듀퐁이라 불리는 청년만을 남겨놓은 채 홀로 마차를 타고 가버렸다.
듀퐁은 이게 무슨 일이지 하는 얼굴로 한참을 서 있다가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엘뢰테르 듀퐁입니다.”
“예... 기욤 드 툴롱입니다.”
어색한 첫 만남이었다.
***
프랑수아 마티유는 슬펐다.
생애 첫 사랑을 마주한 지 5분 만에 그 사랑이 깨져버린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렇게 요 몇 달 간을 하숙집에 틀어박힌 채 찡찡대다 보니 처음에는 측은하게 바라봐 주었던 친구들도, 하숙집 주인도
‘집안에서 그만 찔찔 거리고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해봐라.’
라며 마티유를 쫓아냈다.
“흑흑흑. 다들 너무해! 이런 내 맘 모르고 너무해!”
그렇게 파리 시내를 정처 없이 서성이던 마티유는 어떤 오페라 극장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흑. 차라리 오페라나 한편 보면서 시간 때우고 들어가면 다들 뭐라고 안하겠지.”
마티유는 극장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극장은 오늘 휴관인 듯 인기척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아마 경비원이 깜빡 문을 잠그지 않은 듯 싶었다.
그럼에도 왜일까. 마티유는 무언가에 홀린 듯 오페라 관객석에 앉아 멍 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무대 뒤편에서 어떤 여자가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뭐지? 오늘 휴관이 아닌 건가? 서..설마 귀신?”
마티유는 놀란 마음을 애써 누른 채 무대 뒤편과 관객석을 가르는 보라색 천을 옆으로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자, 안에 있던 숙녀는 깜짝 놀라며 마티유에게 말했다.
“에구머니나! 죄...죄송합니다! 오늘은 휴관인 줄 알고!”
“아...아닙니다! 저도 관계자는 아니고, 노래를 듣고 잠시 들어온 거라...”
그런 그녀에게 마티유 또한 손을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제 노래를 듣고 들어오셨다구요...?”
“네. 좋던데요?”
여자는 놀란 눈빛으로 마티유를 바라보더니 이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안 조세프 테르바뉴라고 해요! 신사 분은?”
“아, 전 프랑수아 마티유입니다.”
“혹시...한곡 더 들어보시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