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살아가는 법(2) (29/341)

살아가는 법(2)

베르사유 궁전의 한 응접실.

귀족과 성직자라는 이름이 물씬 풍기는 화려한 치장을 한 수십 명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운데 있는 연단을 중심으로 주변의 방청석이 ‘ㅁ’자로 연단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마치 영국의 웨스터민스터 의회를 연상케 했다.

“큼큼.”

자색의 벨벳 옷을 입은 귀족은 잠시 헛기침을 하면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익은, 오늘 꼭 있어야 할 파리의 유명 인사들이 제때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음 좋아. 일단 올만한 인물들은 다 온 것 같군.’

귀족은 오른손으로 잠시 턱을 쓸어내린 뒤,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지금부터 명사회를 시작하겠소이다. 이번 명사회는 샤를 알렉상드르 드칼론 재무총감이 폐하께 간청하여 열린 것이니, 재무총감이 나와서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곧, 좌중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와 가운데 있는 연단 위로 올라갔다.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온 그의 모습은, 쉰에 달하는 나이와 맞물려 뭇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 십상이었다.

그는 연단에 올라선 뒤, 좌중을 둘러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천천히 내쉬었다.

“대프랑스 왕국의 재무총감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이오.”

그렇게 말하는 재무총감의 어조는 어딘가 떨리고 있었다. 거기에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다급함도 느껴지는 말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지금 프랑스는 파산 직전이오.”

폭탄선언이었다.

곧, 재무총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곳곳에서 청중들이 일어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재무총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다,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시오! 파, 파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영국 놈들이 다시 신대륙을 공격하겠답니까!? 아니면 우리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를 공격한 겁니까!?”

어떤 사람은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물었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들은 게 정말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물었다. 누군가는 나름 타당해 보이는 원인을 추측해 자신의 예측이 맞는지 물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들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재무총감의 답변은 그들의 머리에 다시 한 번 거대한 충격의 해일이 몰아닥쳤다.

“빚이오. 빚이란 말이오. 빚! 영국 놈들 때문도 아니고, 식민지 때문도 아니 오. 우리 프랑스가 지고 있던 채무가, 이제는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선을 벗어났소.”

그의 말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빚이라니. 빚? 프랑스는 매년 1천만 리브르의 흑자를 보고 있는 경제 대국이었다. 물론 지난 태양왕 루이 14세 시절 네덜란드에게 빌린 돈을 좀 늦게 갚긴 했어도, 나름 어마어마한 빚도 감당할 수 있는 대국이란 말이다.

그런 프랑스가 갚을 수 없는 빚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재무총감!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우리 프랑스는 대륙 제일의 대국이오! 게다가 매년 1천만 리브르에 달하는 순이익까지 보고 있는데 어떻게 빚이 있단 말이오!?”

“맞습니다! 재무총감이 혹시 장부에 있는 숫자를 잘못 본 거 아닙니까?”

그렇게 날뛰는 자들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드는 건 한 문장으로 충분했다.

“프랑스의 국가 채무가 35억 리브르요.”

그의 한마디에, 한 순간에 그에게 딴지를 걸 던 사람은 한 명도 남김없이 조용해지고 말았다.

그런 냉랭한 분위기가 얼마나 갔을까. 1분? 10분? 아니, 그보다 더 할 수도 있었다. 아무도 시간이 얼마나 지나가고 있는지 그들 머리에 가득 찬 ‘35억리브르’라는 단어 때문에 신경 쓸 수 없었으니까.

냉랭한 분위기를 깬 것은 군복을 입은 서른 즈음 된 남자 귀족의 말이었다.

“재무총감 각하. 35억 리브르가... 확실합니까?”

재무총감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며 남자 귀족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며 조곤조곤 얘기했다.

“그렇소이다. 라파예트 후작.”

확인 사살이었다.

곧, 응접실은 도떼기시장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버렸다.

몇몇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제들끼리 무언가 주고받는가 하면, 누군가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천장을 그저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당장 전임 재무장관 네케르의 목을 베야한다고 날뛰었으며, 누군가는 그저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처음 개회를 선언했던 벨벳 옷의 귀족도, 재무총감 칼론의 폭탄선언에 얼이 빠져 있다가 그 소란에 정신을 차리고 판사 봉으로 탁자를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정숙!!! 정숙하시오!!!”

그 덕분에 시끌시끌했던 좌중이 조용해지자, 한 중년 남성이 일어서서 말했다.

“조세국 국장 콩도르세 후작입니다. 재무총감 각하. 혹시 생각해 놓으신 방도가 있으십니까? 아니면 채권을 발행한다던가...”

재무총감 칼론은 그의 말에 입술을 깨물며 잠시 생각했다. 곧, 비릿한 피 맛이 혀를 간질이자 칼론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현 재무 상태로 채권은...발행 못하오.”

명사회에 모인 귀족들은 다시 경악했다. 국채도 발행 못할 정도라니, 정녕 프랑스가 다시 살아날 길이 있단 말인가?

그의 말을 들은 콩도르세 후작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딱 한 가지 수만이 남아있군요.”

“···그렇소, 조세국장.”

그 말에 귀족들은 다시 화색을 되찾았다. 그래, 그래도 신이 프랑스를 버리지는 않았구나! 역시 대국 프랑스야! 믿고 있었다구!

그러나 재무총감의 다음 말에 귀족들의 안색은 폭탄선언을 들었을 때보다 창백해지고 말았다.

“튀르고 전 재무총감이 진행했던 것처럼, 제 1신분과 제 2신분에게 조세를 부과하도록 하겠소.”

제 1신분과 제 2신분에게 조세를 물리겠다. 그 말은 곧 여태까지 제 3신분인 평민들만이 부담하던 세금을 제 1신분인 성직자와 제 2신분인 귀족에게도 물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까가 폭탄선언이었다면, 이것은 핵폭탄을 떨 군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뭐? 우리가 천것들도 아니고 무슨 조세를 물린단 말이야?”

“재무총감! 헛소리하지 마시오! 분명 다른 해결책이 있을 텐데!?”

“옳다! 재무총감 칼론은 자신의 귀찮음 때문에 이 나라에 있는 충신과 신의사도들에게 고혈을 빨려 하고 있다!”

아까가 폭탄선언에 명사회장이 도떼기시장이 되었다면, 이제는 건달패들의 모임 수준으로 분위기는 격해졌다.

곳곳에서 재무총감 칼론을 향해 잉크나 펜대 따위를 던져대는가 하면 큰 소리로 외설스러운 말을 내뱉는 자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조세국장 콩도르세 후작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나 말했다.

“당신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이 나라에서 3 % 밖에 안 되는 자들이 50 %이상의 부를 독점하면서도 한 푼도 안내다가, 국가가 위험하니 도와달라는 말을 그저 헛소리로 치부해!? 네 놈들이 그러고도 프랑스 인이냐!!!”

“하! 이보시오! 조세국장! 평소에 질 낮은 평민들 따위와 어울리느라 머리가 이상해졌나본데, 우리 푸른 피들이 조국에 흘린 피에 비하면 그깟 조세 면제는 세발에 피요!”

“그럼. 그럼! 조세국장, 당신도 당신이 잘나서 그 조세국장이라는 자리에 앉은 게 아닌 거 잘 알잖소? 국가의 위협이 되는 루소니 뭐니 하는 ‘반동분자’들과 어울릴 바에야 국가를 위해 헌신하라는 폐하의 말 때문에 얻은 자리일텐데, 그런 당신보다야 우리가 훨씬 애국자 아닌가?”

“우우우! 푸른 피로서의 사명감도 책임감도 져버린 콩도르세는 꺼져라!”

콩도르세 후작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자, 맞은편에 있던 라파예트 후작이 일어났다.

라파예트 후작.

미국독립전쟁의 영웅, 프랑스의 검. 둘도 없는 미국의 친구.

아무리 콧대 높은 귀족들이어도 라파예트가 일어서자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만들 하시지요. 지금 다들 너무 격해져 있으니 며칠 유예기간을 가지고 감정을 추스르시고 다시 만나 뵙는 걸로 합시다.”

그의 말에 판사봉을 쥔 벨벳 옷의 귀족도 고개를 끄덕이며 휴회를 선언했다.

그리고 얼마 뒤, 명사회의 이름으로 재무총감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의 해임이 결정되었다.

***

“하아아암.”

“왜 그러십니까, 소위님?”

늘쩍지근하게 하품을 하는 꼬마 소위의 모습을 본 병사 한 명이 말했다.

“그냥, 뭐. 심심해가꼬 그란다.”

발랑스에 부임한 지 근 1년이 지났음에도 나폴레옹은 이렇다 할 일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그저 포병 장교 교육과 부대 내 시설을 점검하는 것 뿐.

따분했다. 모름지기 군인이라면 국가의 적과 싸워 이겨 명예를 드높여야 할 텐데, 이렇게 이렇다 할 공도 없이 흘러가는 데로 살게 되는 건가? 그런 건 싫다.

그런 나폴레옹의 마음을 읽었는지, 병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뭐, 장교님들이야 일이 터지고, 전쟁이 나고 그러면 좋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 같은 하꼬 병사들은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참 맘에 듭디다.”

“하모, 그라겠제.”

병사와 장교의 시선은 다르다. 병사는 자기와 가족을 부양하는 걸 바라고, 장교는 공을 세워 더 올라가는 걸 바라기 마련이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소위님. 좋은 하루 보내십쇼!”

자기보다 열 살은 더 먹은 병사의 경례에 나폴레옹도 경례로 답하자, 병사는 저 멀리 병영으로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인영이 없어지자, 나폴레옹은 낮게 읊조렸다.

“아, 전쟁 찍쌀나게 하고 싶다 아이가. 뭔 일 안 터지나?”

참으로 따분하고 지루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포병 소위의 일상이었다.

***

“어찌,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라파예트 장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콩도르세 후작은 분노에 찬 눈으로 응접실에 앉아 있는 라파예트 후작을 쳐다보았다. 그날 있었던 일로 콩도르세 후작은 명사회에서 반쯤 추방 아닌 추방을 당했고, 라파예트 또한 분위기에 못 이겨 명사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라파예트 후작은 그런 콩도르세 후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말도 안 되는 처사지요.”

재무총감 칼론이 해임되었다. 그리고 그의 자리를 툴루즈의 대주교인 브리엔이 차지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런 경제적 대 위기에 경제인을 해임시키고 종교쟁이를 재무총감에 임명하는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인가?

콩도르세 후작은 아까까지의 화는 다 어디로 갔는지, 침울해진 표정으로 얘기했다.

“프랑스는...프랑스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거겠지요?”

“···제가 미국에 있던 때 만났던 친구들은 이것보다도 악조건에서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우리라고 그 신대륙인들 보다 못 할 이유는 없죠. 어느 때가 되었건 나라가 위기에 빠진다면 제가 이 한 몸 불살라 지켜내겠습니다.”

콩도르세 후작은 그 말을 듣고 조금이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라파예트 후작의 말은 무거웠다.

‘나라가 위기에 빠진다면 자신이 나서 지켜내겠다.’

프랑스의 빚은 대부분 다른 나라의 거대 금융권에 지은 빚이었다.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신성로마제국까지. 만약 자기들 나라에 있는 은행가 들이 프랑스에 돈을 떼먹힌다면? 그 모든 나라가 프랑스를 갈기갈기 찢으려 들 거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둘까?

아니. 절대 아니다. 자존심과 체면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프랑스인이, 조국이 찢겨 나가는 걸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프랑스는 빚을 모두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유일한 방법은 명사회라는 귀족과 성직자 집단에 의해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콩도르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라파예트 장군은...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서른 살의 미남 전쟁영웅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에 답했다.

“물론입니다.”

난세가 닥쳐오고 있었다.

작가의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확인했어야 하는 건데. 진짜 정말 죄송합니다.

못난 작가가 정말 죄송합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