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법 (1)
1786년의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지나고 1787년의 새해가 밝아온 파리는, 1년의 시작을 준비하기 위한 사람들의 부산스런 움직임에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곡물 가게와 대장간은 새로운 곡물 품종이나 개선된 농기구를 사려는 농부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개중에는 신대륙에서 넘어온 감자나 고구마 따위를 심심풀이 삼아 기르고자 하는 귀족도 끼어 있었다.
물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베르사유 궁전의 후원에 취미 삼아 농사를 짓는다는 소문에 이끌린, 유행에 죽고 못 사는 귀족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고등법원에서는 신년 휴가를 받은 법관들이 오랜만에 무거운 벨벳 법복을 벗고,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 목공소에서 장난감을 주문하고 있었고.
감옥과 유치장에서는 왕의 배려라는 이름 아래 평소 먹던 말린 감자 같은 비실한 식사가 아니라 밀로 만든 빵이 죄수들에게 배식되었다.
이런 신년분위기에 이삭의 민족 사무실에서는.
“···그래서 단가가 얼마라구요?”
“병당 5 리브르입니다. 사장님.”
어이가 없다는 듯한 내 말투와 표정에도, 내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외눈 안경을 낀 중년 신사는 차분한 말투로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아니, 벨라도나는 요 파리 근교에도 많이 나는 풀 아닙니까? 아무리 배합 기술을 독점하고 계신다고 해도 이건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씨발 남겨먹어도 좀 적당히 남겨먹어야지 양아치 새끼야. 아무리 너네가 기술을 개발했다고 해도 선이라는 건 있어야 될 것 아니냐. 대충 들에서 나는 풀 뽑아다가 빻아서 즙 짜는 게 뭐 그리 비싼데?]
“저희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사장님. 이 벨라도나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또 예민한 생물인지, 저희도 수많은 노력 끝에 겨우 사람에게 무해한 수준으로 제조할 수 있는 것이랍니다. 그 노력의 값은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그래서 어쩔 건데? 꼬우면 사지 말던가. 아니면 그 독초 니가 한번 배합해볼래? 그러다 죽으면 난 모른다? 얌전히 돈 주고 사가라 꼬맹아.]
“씨입ㅂ···”
“···뭐라구요?”
“음? 전 아무 말도 안했는데요? 방금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던데 그 소리를 들으신 것 같네요. 하. 하. 하.”
내 변명 아닌 변명에 중년 신사는 눈을 얇게 뜨고 날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얼굴을 씰룩이더니 다시금 평온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개자식이 사람 등쳐먹고 싶으면 면전에 쌍욕 한번 박힐 생각은 하고 와야지.
뭐, 자기도 그걸 아니까 내 ‘본의 아닌 말실수’에 대해 더 왈가왈부 안하는 거겠지만.
작년의 냉해파동으로 인한 귀리 소동을 콩도르세 후작과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헤밍스의 도움으로 만든 옥수수빵에 의해 극복한 이삭의 민족은 정상화되어 굴러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올해인 1787년에 들어서면서 이삭의 민족은 더 활발하게 사업을 확장하면서도, 작년에 있었던 냉해파동으로 인한 재료 수급의 위험을 기억하면서 거래처를 여러 군데로 늘리고 미리미리 보험도 들어놓게 되었고,
때문에 우리 사업은 위험에서 벗어나 훨씬 안정적인 형태가 되어 있었다.
사람이 등 따시고 배부르면 별 생각이 다 난다고 했던가? 그 말이 맞다.
작년부터 구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진 못했던 ‘멀미약’ 사업은 그런 별 생각 중 하나였다.
저번에는 아이디어를 구체화 시키는 단계에서 갑작스럽게 닥쳐온 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했지만, 이번에는 사업도 상당히 안정되어 있으니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데 차질이 없었다.
물론, 오늘의 이 만남 전까지는 말이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죠. 저도 이렇게 원료 값이 크게 나갈 줄은 몰랐네요.”
“음, 뭐 좋습니다. 마음이 결정되시면 언제든지 저희 사무실로 와주십시오.
사장님. 그럼 이만.”
중년 신사는 내 말을 듣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플로리앙 씨.”
“예 사장님.”
“조리실 가서 소금 좀 가져와줘요.”
“예? 소금은 갑자기 왜···?”
“동방의 고대 주술사가 말하길, 재수 없는 사람이 지나간 곳에 소금을 뿌리면 길하다고 하더라구요.”
“···잡지에서 오컬트 기사라도 읽으셨습니까? 아무튼 가져오겠습니다.”
플로리앙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리실에서 소금을 가져와 방금 전 중년 신사가 지나간 복도와 사무실 문에 소금을 뿌려댔다.
아 좋네. 오랜만에 저런 모습을 보니까 고향인 한국에 온 느낌이야.
“그것보다, 이제 어찌한담?”
아트로파 벨라도나는 흔한 들풀 중 하나다. 대충 동네 뒷산에 가면 나무 밑에 막 자라있고 그런 풀이란 말이지.
게다가 재배도 그리 어려운 식물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농지를 하나 사서 재배한 다면 원자재도 쉽게 수급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냐?
“에이씨. 물이랑 조금이라도 비율이 안 맞으면 독성이 생기거나 효과도 없는 맹탕이 되어버리니 이건 뭐 울며 겨자 먹기로 저 재수 없는 놈들한테 돈을 바쳐야 되는 꼴이네.”
그 놈의 배합 비율이 문제다. 정확한 배합 비율을 찾으려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수천 번 반복해서 배합을 해봐야 하는데,
벨라도나 1kg을 사도 대여섯 번 정도 실험에 겨우 쓸 만큼 진액을 뽑을 수 있다 보니 이게 배보다 배꼽이 커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 공돌이 마렵다. 21세기의 공대생이 있었으면 마치 도X에몽처럼 뚝딱뚝딱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어느 때보다 R&D부서(회사 내 연구부서)에 대한 갈망이 커지는 날이었다.
그런 고민에 빠져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쾅쾅!
***
한편 프랑스 왕실 근위대가 사용하는 마굿간의 뒤편에서는 대위 계급장을 단장교가 소위 계급장을 단 신참 쏘가리를 갈구고 있었다.
“야, 너 뭐냐?”
“소위! 에마뉘엘 드 그루시!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씨발, 너 뭐냐고!”
“소위! 에마뉘엘 드 그루시! 정말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야, 너 선임 불러와.”
“소위! 에마뉘엘 드 그루시! 예! 알겠습니다!”
얼마 안 있어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넋 나간 표정으로 그루시와 함께 뛰어왔다.
“중위! 루이 샤를 앙트완 드제. 용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대위는 그런 드제 중위의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중위, 요즘 군대 거꾸로 돌아간다. 그렇지?”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대대장님이 뭐라고 훈시했지?”
“전시 상황에 물자가 부족할 것을 대비하여 말도 이틀 간 금식 훈련을 진행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이거 뭐야?”
대위는 그렇게 말하며 발로 드제 중위 쪽으로 무엇인가를 밀어냈다. 두레박처럼 생긴 나무통이었다.
드제 중위는 그 안을 보고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왜 씨발, 쏘가리 새끼가 지 말한테 여물을 주고 있냐? 저 새끼가 대대장님보다 위야?”
“어..억..!”
“중위, 엎드려뻗쳐.”
“엎드려뻗쳐!”
서슬퍼런 대위의 말에 드제 중위는 그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하나에 정신, 둘에 통일. 내가 그만할 때 까지 반복한다. 하나!”
“정신!”
“둘!”
“통일!”
대위가 입을 열 때마다 중위의 몸이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지탱하던 중위의 팔이 후들거림을 못 이기고 무너지자, 대위는 그제서야 움직이던 입을 멈추고 중위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드제 중위,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제가...헉헉...미처 교육하지 못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그에 답하는 드제 중위는 기진맥진한 채 말했다.
“좋아.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그리고 너 에마뉘엘인지 애마부인인지, 앞으로 잘해라. 내가 너 지켜본다.”
“소위! 에마뉘엘 드 그루시! 예! 알겠습니다!”
대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굿간에서 나갔다. 드제 중위는 대위가 나가자마자 건초더미에 지쳐 쓰러졌다. 드제 중위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그루시에게 말했다.
“왜...왜 그런거야...에마뉘엘...”
“죄송합니다! 중위님! 모든 게 제 탓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나에 정신.”
“예?”
“···둘에 통일.”
그날, 마굿간에는 온종일 젊은 남자의 비명소리가 가득 차고 말았다.
***
“아니 오늘 장부 다 까서 봤잖아요!”
“흥! 내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만 언젠가는 당신의 부정이 밝혀질 날이 올 거요!”
“이..이 씨발! 당장 나가! 몇 년째 이 지랄이야 도대체!”
내 축객령에 라부아지에는 혀를 끌끌 차며 사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저 미친새끼.
3년 전부터 여태까지 작성한 모든 세금계산서와 장부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걸 전부 확인해야한다고 고래고래 난리를 치질 않나, 그게 다 문제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는 나한테 유죄추정의 원칙에 의거해서 유도심문을 해?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나 이러다가 정신 나갈 것 같애, 정신 나갈 것 같다고, 갸아아아악!
내 반 쯤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플로리앙 씨는 살며시 다가와 말했다.
“소금···뿌릴 까요, 사장님?”
“···아까 뿌린 것 보다 두 배로 뿌려주세요.”
라부아지에 저 새끼 제발 꺼져줬으면.
***
“이...이게 사실인가?”
“유감스럽게도...그렇습니다. 총감님.”
“네, 네케르 이 미친 자가! 정녕 전임 재무장관이 이걸 다 숨겨 놓고 살았단 말인가!?”
재무총감 칼론은 손에 들어온 보고서의 내용을 믿을 수 가 없었다. 절로 보고서를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분노 때문에?
아니, 두려움 때문에.
“사, 사람이 어떻게 이런 내용을 알고도 태연자적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거지? 아, 아니야! 이건 거짓말이 분명해! 어···어억!! 머, 머리가!!”
“초, 총감님! 정신 차리십시오! 총감님!”
충격에 못 이긴 총감은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보고서를 쥔 총감의 손에서는 힘이 빠졌고, 그의 손에 들려있던 보고서가 바람을 타고 바닥에 펄럭이며 떨어졌다.
그렇게 떨어진 보고서에 쓰인 마지막 장에는 단출한 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예상 재무 손실 : 3,500,000,000 리브르]
그리고 재무총감 칼론이 쓰러진 다음날, 왕의 이름으로 고위 귀족들의 모임인 명사회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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