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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냉해 (4) (27/341)

냉해 (4)

그 날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바닥에 깔려있던 푸른 양탄자부터,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얼굴 생김새하나하나까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그림이 되어 머릿속을 수놓고,

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펜을 잡고 지금은 독립선언서가 된 그 저급 양피지에 내 이름을 휘갈겨 넣을 때의 그 감각이 손끝에서 메아리친다.

리빙스턴, 프랭클린, 워싱턴, 해밀턴, 그리고 꼴도 보기 싫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 있었던 존 애덤스 그 재수 없는 놈 까지.

그 모든 사람들의 필체와 서명이 담긴 양피지가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새러토가에서 맡았던 화약의 냄새, 보았던 포연, 들려온 민병대의 함성에 대한 기억은 가슴을 뛰게 하고,

요크타운에서 맡았던 바다의 짠 소금냄새, 보았던 군함, 들려온 승전보에 대한 기억은 그 가슴의 전율을 몸의 말초까지 전달해 온 몸을 떨게 만든다.

그러나 눈을 뜨면, 그 달콤한 기억은, 그저 춘몽이 되어 하늘로 흩어져 버리고 말 뿐.

진정으로 자유롭고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고자 흘린 우리의 피와 땀과 이상은, 현실이라는 벽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창조주는 우리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자신과 동지들이 심혈을 기울여 쓴 독립선언서의 첫 문장들조차 그 현실에 가로막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영국인들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자 싸운 신대륙인들이, 이제는 주인이 되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핍박하다니.

자신의 목을 옥죄던 사슬을 풀어내니, 이제 그 사슬을 가지고 다른 이의 목에 목줄을 채우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이 얼마나 코웃음이 나오는 행태인가. 그것도 겨우 피부색이 다르다는 허접하고 비이성적인 이유를 가지고 말이다.

모두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급급한 탐욕스러운 자본가들과 악덕 노예주들이 만들어낸 현실이었고, 자기 자신만의 보신을 위한 민중들의 외면에서 나온 사태였다.

이런 세상은 자신, 토마스 제퍼슨이 꿈꿨던 이상향의 나라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렇다면 신대륙을 이성과, 상식과 보편에 의거한 제대로 된 나라로 바꾸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니. 영국을 가까스로 물리치고 이제 겨우 이어 붙인 미약한 나라다.

같은 미국인을 상대로 총칼을 휘두르고, 수많은 신대륙인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헌법을 휴지쪼가리로 만든다니, 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비도덕적인 행태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 선거다.

어차피 곧 선출될 첫 번째 대통령은 워싱턴이 될 것이다.

아, 물론 그의 게으른 성정에 ‘아 귀찮은데, 이거 꼭 해야 되나..?’라면서 대통령 같이 귀찮은 건 안하겠다고 말을 밥 먹듯이 하겠지만 어쩌랴?

그도 미국인들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와 응원을 알고 있으니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가 갑자기 미쳐서 왕이 된다고 폭정을 하지 않는 한은 두 번째 대통령도 워싱턴이 될 것이고, 세 번째 대통령도 워싱턴이 되겠지. 그가 원한다면 종신 대통령도 가능할지 모른다.

워싱턴이라는 이름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고, 그는 그만한 위엄을 달성한 영웅이며 미국 민중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수호자니까. 당장 제퍼슨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앞으로 약 12년 뒤 쯤에 치러질 네 번째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 나서야 한다. 아마 경쟁자는 존 애덤스 그 재수 없는 난쟁이 똥자루나 불행히도 M 자 탈모가 심하게 진행되고 있는 착한 메디슨이 될 것이다.

메디슨은 괜찮다. 그는 믿을만한 사람이고, 똑똑한 사람이니까.

존 애덤스 그 포악한 놈이 문제지. 만약 순박한 메디슨이 대선에 나간다면 그놈의 더러운 세치 혀에 꼼짝도 못할게 분명하다.

그러니 자신이 나가야 한다.

자신이 나가 애덤스 그 괴팍한 놈을 때려눕히고 진흙탕에서 빌어먹을 노예주놈들과 싸우며 자유와 이성이라는 발판을 닦아 놓아야 한다.

그 뒤 메디슨을 후임자로 세운다면 이 미합중국을 진정으로 헌법에 명시된 자유와 민주의 나라로 발돋움 시킬 수 있을 것 이다!

하지만 선거는 곧 투표의 싸움이다. 얼마나 자신의 뜻이 숭고한지는 상관없이 유권자들이 원하는 걸 만족시켜줘야 하는 싸움.

그런 면에서 나, 제퍼슨은 이미 반쯤 진 채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이미 악덕 자본가와 악덕 노예주라는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기득권을 쥐고 있는 자들과 척을 지고 말았다.

제퍼슨 자신이 만약 대선에 나간다면 그 탐욕스런 놈들은 온갖 힘을 다 써서 상대 후보를 당선시키고자 악이란 악은 다 쓸 것이고, 안타깝게도 순박한 민중들은 그런 놈들에 의해 뭣도 모른 채 이리저리 휘둘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믿는 이성과 도덕, 상식과 보편이라는 가치에 진정으로 동감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들이 부패한 놈들을 제치고 기득권을 잡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 사람들이야 말로 12년 후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해주고 진정으로 헌법을 준 수하는 사람이 될 테니.

그런 면에서 프랑스는 그의 적임지다.

디드로와 달랑베르, 루소 같은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의 말에 공감하지만 전제군주정과 구제도 앙시앙레짐이라는 시대의 한계에 부딪힌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그들 중 십 분지 일만이라도 보스턴 항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는다면 제퍼슨에게는 큰 힘이 돼줄 터였다.

그 중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이 바로 기욤 드 툴롱.

개인적인 조사를 통해 알아본 바로는 지방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나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수도 파리에서 큰 사업을 일궈낸 계몽주의자이자 다이아몬드원석이었다.

그의 신분에 보수적인 유럽에서조차 성공하여 자신의 빛을 내뿜는 그가, 자유로운 신대륙에 발을 내딛는다면 단숨에 악랄하고 저급한 자본가들을 밀어내고기득권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그도, 이런 답답한 구대륙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신대륙에서 차별과 억압을 벗어던지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걸 더 바랄 것이다.

***

“죄송하지만 그저 제안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방안을 자신의 카리스마로 가득 채운 190cm에 달하는 거구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며 난 조용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내 말에 제퍼슨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잠시 미간을 찡그렸으나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말했다.

“저의···제안이 갑작스러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기욤 씨. 그러나 우리 미합중국에는 당신 같은 인재가 꼭 필요합니다! 당신처럼 사람을 우선시하고 이 성을 우선시하는 그런 지식인이 이런 구대륙에 묶여있다면 그것만큼 낭비가 없을 겁니다!”

제퍼슨은 다시 눈에 이채를 발하며 날 설득시키려 하고 있었다.

아니. 아저씨 왜 나한테 그렇게 집착하는 거예요. 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아, 그것보다 제가 왜 미국에 가요 가긴. 기반도 없고 인맥도 없고 어디서 뭐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막말로 내가 미국 갔다가 미쳐 날뛰는 황야의 무법자 손에 들린 권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최소한 파리에서는 길가다가 권총에 맞아 죽을 일은 없다고!

그리고 난 프랑스에서 앞으로 뭔 일이 일어날 지는 대강이지만 알고 있다.

혁명이 다가 온다.

그리고 이미 난 그 혁명에서 살아남을 준비가 알차게 되어 있고 말이지. 만약 사태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해져서 도저히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된다면 그 때 짐 싸들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도 된다. 벌써부터 일궈놓은 기반을 다버리고 미국으로 갈 이유는 하등 없다.

내가 이 기반 만들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말이야. 아저씨 내가 야근만 며칠 연속으로 했는지 알아요? 어디보자 일단 두 자릿수는 넘어가고, 세 자릿수니까...

내 떨떠름한 마음을 눈치 챘는지, 제퍼슨 씨는 연이어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주겠다니, 구제도에 시름하는 일에 답답함을 느낀 적 없냐니, 아무튼 날 구워삶으려고 얼굴에 열이 오를 때까지 열띠게 입을 놀렸다.

그렇게 말해도 난 안 가요. 아저씨. 무엇보다도 내가 가버리면 내가 여태까지 혁명으로부터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데.

나폴레옹 형이야 뭐, 원래 역사에서도 황제까지 해먹었으니 혁명을 틈타 출세를 했으면 했지 죽지야 안겠지만. 아버지는? 세르주 주교 아저씨는? 플뤼에 부인은? 그루시 형은? 마티유 형은? 플로리앙 씨는? 우리 이삭의 민족 직원들은? 우리 평등 클럽원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내 곁의 일반인들도 거기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난 못 간다.

내 기반도, 사업도 모두 중요하지만 애초에 그 기반과 사업을 일군것도 그 사람들이 없었으면 못했고, 그 사람들과 나를 시대의 파도에서 지키기 위함이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고자 했으면 피에르와 조르주 그 두 호로새끼를 암살했으면 했지 이렇게 야근에 점철된 삶을 살았겠냐.

계속된 설득에도 내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제퍼슨 씨는 아까보다도 더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습니다... 기욤 씨 의견이 그렇다니 저도 더 이상 뭐라 왈가왈부할 수가 없군요. 그렇다면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제라도 좋으니 만약 미합중 국에 오고 싶으시다면 전 언제든지 절 찾아주십시오.”

난 떨떠름하게 말했다.

“예... 뭐, 알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럼 오늘은 늦어졌으니 하루 밤 자고 가시죠. 기욤 씨.”

여태까지 계속 싫다만 연발했는데 이것마저 거절하면 안 되겠지. 무엇보다 저 거구의 사내가 화가 난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예, 기꺼이.”

내 말에 제퍼슨 씨는 그제서야 웃는 낯으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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