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냉해 (3) (26/341)

냉해 (3)

21세기에서 살던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피꽈츄돈가스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TV를 틀고 애니메이션 채널에서 해주는 만화영화를 보곤 했다.

그때 정말 재미있게 봤었던 애니메이션 중 하나가 ‘따X따X 베이커리’였는데, 주인공이 제빵의 신인 나머지 손만 닿으면 빵이 황금으로 변하고 빵에서 과일맛이 나고, 아무튼 병맛이라는 게 제대로 느껴지는 만화였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제빵의 신을 현실에서 만나고 말았다.

헤밍스, 그는 신이야!

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본 헤밍스는 부끄러운 듯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신대륙 사람들과는 달리 프랑스는 남부 바스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옥수수를 가축 사료로 대부분 소비하고 주식으로 먹지는 않더군요.

먹는다고 해도 단순히 찌거나 구워먹을 뿐이구요.”

그러니까 옥수수빵이라면 사람들도 흥미가 동해서 한 번 쯤은 입에 대볼 겁니다. 헤밍스가 덧붙였다.

우리에게 잠시 공간을 빌려준 곡물 가게 주인도 흥미롭다는 낯을 한 채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난 헤밍스로부터 고개를 돌려 가게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디어도, 상품성도 검증 됐으니 아이템 구상의 역할은 끝났다. 그러면 이제는 조금이라도 수지가 맞게 조정하는 비즈니스맨의 시간이지.

이럴 때는 사업가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 비즈니스의 세상에서는 조금이라도 ‘아 이 사람이 여기에 사활을 걸고 있구나’라는 낌새가 내비치는 순간, 호구 잡히기 마련이니까.

그러려면 미안하지만 일단 헤밍스를 잠시 밖에 내보내는 수밖에. 지금은 그에게 이런 사업의 세상에 대한 얘기를 해줄 수도 없고, 만약 헤밍스가 옆에서 끼어들기라도 하면 협상이 뒤집힐 건덕지가 생길 수도 있다.

난 헤밍스에게 잠시 밖에 나가 있어달라고 말한 뒤, 그가 주방 밖으로 나가는 걸 본 후 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kg 당 얼마 정도에 파실 생각입니까?”

“음···얼마정도 구매하실 건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곡물 장수는 입맛을 다시더니 오른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어디 한번 제시해 보라는 눈빛으로 말했다.

“하루에 130kg 씩.”

“오···.”

내 대답에 곡물 장수는 마음이 동한 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데 주인 양반, 나 아직 패를 다 안 깠는데 벌써 그렇게 좋아하면 어떡해?

“그렇게 점포 7곳에 발주해주시면 됩니다.”

“예?”

가게 주인은 내 말을 듣고 잠시 얼빠진 표정이 되더니 계산을 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려댔다. 잠시 뒤, 계산이 끝난 가게 주인은 뜨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그러면 다 합쳐서 하루에 910 kg 씩 주문하신다는 말씀이신 가요?”

“네. 그렇습니다.”

“주···주소는 어디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종이 있으십니까? 제가 써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가게 주인은 헐레벌떡 카운터로 달려 나가 종이와 펜을 가지고 돌아왔다.

저저 입꼬리 봐봐. 입꼬리가 아주 그냥 귀에 걸렸네 걸렸어. 그렇게 감정을 막 내비치시면 나야 땡큐지 땡큐.

그런데 주인 양반. 우리 단가부터 한번 맞춰봐야지 않겠어?

내가 그저 종이와 펜을 받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딴청을 피우자, 가게 주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슬며시 말했다.

“왜...왜 그러십니까, 사장님? 뭔가 맘에 안 들으시는 거라도...”

“아뇨... 그냥 뭐, kg 당 단가는 얼마 정도 생각하고 계신가 싶네요?”

“어···아무리 그래도 1 리브르는 받아야하지 않을까요?”

하, 날 지금 세상물정모르는 도련님으로 보는 건가.

21세기의 공정거래법 같은 게 없다고 쳐도 너무 하네 진짜. 원래 내가 거래하던 거래처에서는 귀리 1kg을 지금까지 2 수에 팔았는데 겨우 대체재 따위에 10배 가격을 주고 거래하자고? 내가 미쳤냐?

게다가 저건 가축 사료용 옥수수다. 맛도 크기도 볼품없는 나머지 떨이로 가축들이나 먹으라고 파는 옥수수란 말이다. 멀쩡한 귀리보다 쌌으면 쌌지 비쌀이유는 하등 없다.

그럼 뭐 답은 하나구만.

이 새끼. 지금 나 벗겨먹으려고 작업 치냐? 내가 헤밍스한테 좋다고 막 맞장구 치고 그러니까 날 호구새끼로 본거구나?

난 종이와 펜을 가게 주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거래는 없던 일로 하시죠.”

“예, 예..?”

내 말에 가게 주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다급하게 말했다.

“아..아니.. 사장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허. 왜긴 왜야. 날 벗겨먹으려 들은 당신 때문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좀 세게 나가줘야겠어. 살짝쿵 뻥카도 좀 곁들여서.

“전 여기서 거래할 이유가 없는데요? 저야 원래 거래하던 곳에서 거래하면 됩니다. 옥수수야 그 쪽에도 있을 테니까요.”

아 물론 그 거래처가 지금 창고가 개박살 난 건 나만 알고 있고.

아마 저 양반 지금 똥줄 좀 탈거다. 어마무시한 크기의 거래가 성사되기 직전인데 눈 안 돌아가면 사람이 아니지.

가게 주인은 잠시 입을 꾹 닫더니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kg 당... 0.5 리브르, 그러니까 10 수는 어떻습니까...?”

“싫은데요?”

그가 말을 끝내자 마자 나온 내 단호한 답변에 가게 주인은 이제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kg 당 2 수에 팔아도 하루에 1,820 수, 91 리브르인데 왜 그렇게 호구를 잡으려고 하는 거지? 아 빨리 공정거래법 비스무리한 게 만들어져야 이 혼탁한 세상이 바로 돌아갈 텐데. 오호 통제라! 참으로 안타깝도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사장님.”

“원래는 1 수까지 낮춰 부르려고 했습니다만.”

뭐야 왜 그렇게 얼굴을 찡그러뜨려요. 사람 말 아직 다 안 끝났는데. 프랑스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이 사람아.

“kg 당 2 수에 합의하시죠.”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정도 양까지 옥수수를 끌어 모으려면 저도 상당히 힘들어서...”

아 좋아. 이제 좀 말이 통하시네.

“좋습니다. kg 당 3 수. 그 이상은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예...”

그제서야 난 종이에 우리 이삭의 민족 점포 주소를 써 내려갔다. 내가 쓴 종이를 받은 가게 주인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나와 종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자기가 먼저 호구 잡으려 했으면서 말이야. 이건 말이지. 정당한 심판이라고 심판.

그런 내 뜻을 읽었는지 가게 주인은 한 번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 한 번 이기셨으니, 저도 한 번 뭐 하나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뭐야 뭘 물어보시려고. 아 계약은 안돼. 못 물려줘. 돌아가.

“예, 뭐. 계약 말고는 안 될 거 없죠.”

그러나 그 뒤에 들려온 말은 내 귀를 의심케 하기 충분한 말이었다.

“사장님이 데리고 온 그 깜둥이 노예 말입니다. 어디서 사셨습니까? 제법 쓸모 있어 보이던데.”

“···예?”

“아, 뭐 사장님이 가지고 계신 그 깜둥이를 노리는 건 아닙니다. 저도 나름상도덕이 있지. 남의 물건을 탐내지는 않거든요. 그냥 어디서 사신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상도덕...? 물건...? 상도덕은 무슨 씨발. 사람 좋게 생겼으니까 호구처럼 벗겨먹으려 든 새끼가. 그리고 뭐? 물건? 헤밍스가 물건이야!?

“···.”

“에이 그러지 말고 알려주시죠? 저도 요즘 일이 많다보니 유능한 노예 한두명 정도 두려ㄱ···. 사, 사장님! 어디가세요! 그건 알려주실 수 있잖습니까!”

난 그런 가게 주인의 말에 역겨워진 나머지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문 밖으로 나갔다.

***

“주인님, 손님. 메인 코스인 송어 요리입니다.”

“고맙네. 여기 놔주게나, 헤밍스.”

“네. 주인님.”

“아, 헤밍스 씨. 전 여기 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기욤님.”

제임스 헤밍스는 능숙하게 코스요리들을 만들어 내 제퍼슨과 내 앞에 내 왔다.

헤밍스의 실력은 여간 뛰어난 게 아니었는데, 평소보다 두 배가량 요리를 해치우는 내 모습은 그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 때문에 제대로 음식 음미를 못하고 있었을 뿐.

“음식이···맘에 안드십니까, 손님?”

“아, 아니에요. 주방장님! 정말 맛있습니다!”

“기욤 씨. 괜찮습니까? 안색이 좀 안 좋은데...”

“하하···. 괜찮..습니다.”

괜찮긴 씨이이이바아아아알.

나도 안다. 18세기의 서양은 완전한 백인의, 백인만의, 백인을 위한 세상 인거. 하물며 21세기 현대에서도 KKK니 뭐니 하는 뇌대신 우동사리를 넣은 대갈 텅텅 레이시스트들이 활개치고 다니는데 지금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는 거.

그 생각이 아까 곡물상에서 있었던 일과 제퍼슨에게 말끝마다 ‘주인님, 주인님’ 붙이는 헤밍스를 보니 더 뼈 속까지 와 닿는다.

더 심한 건 뭔지 아나? 이 사람들이 나빠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 그저 이치일 뿐.

아, 곡물 가게 주인은 쓰레기가 맞다. 씨발럼.

“그냥 기분이 좀 그렇네요. 하하···.”

제퍼슨은 그런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주방장을 불러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예? 정말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하지. 오늘 수고 많았으니 남은 건 시종들한테 맡기고 일찍 들어가서 쉬게.”

“알겠습니다. 주인님.”

다소 놀란 표정의 주방장은 나와 제퍼슨에게 번갈아 목례를 올리더니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제퍼슨은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등을 쫓다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작 피부색이 다르다고 죽을 때까지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세상이 참으로 안타깝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난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예, 예?”

“기욤 씨는 계몽주의자죠? 저도 기욤 씨와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우월한 사람이 어디 있고 열등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누군가 악심을 품고 만들어낸 환상일 뿐. 제퍼슨은 잔에 담긴 와인을 마저 목을 통해 넘기며 말했다.

“저 말입니다. 이 토마스 제퍼슨이 1776년 독립선언서를 써내려갈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십니까?”

“···.”

“그걸 계기로 모든 만민이 평등해지고 자유와 행복을 영위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기욤씨, 그거 아십니까?”

“···.”

“전 노예제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론 제 말을 들으신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으시겠죠. 흑인 노예를 요리사로 쓰는 사람이 무슨-이라고요. 그렇다면 저도 나름 반론을 해보겠습니다.”

아까처럼 기분 좋게 웃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제퍼슨의 눈에는 이채가 서리고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기욤 씨는, 자유인 흑인의 삶을 아십니까?”

“모릅..니다...”

“대부분 자유인이 된 지 1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꽤 모으면 감히 깜둥이주제에 돈을 모아? 분명히 더러운 짓을 한 게 분명해!-라고, 돈을 못 모으면 역시나 깜둥이는 백인의 인도를 받아야 해!-라면서 죽입디다.”

“···.”

“그런 상황에서 제가 노예를 사서 자유민으로 풀어준다면 그 사람들은 얼마나 살 수 있을 까요. 물론 그 사람들을 풀어준다면 그 때만큼은 기쁘겠지요. 얼싸안고 기쁘게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요?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싶어 하는 그 일을, 나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정치인이니까요.

기욤 씨. 난 그런 썩어빠진 자들이 너무나도 싫습니다. 난 그런 자들을 위해 독립을 이끈 것도 아니고, 그런 자들을 위해 수십 명의 지식인들과 죽을 각오로 독립선언문을 쓴 것도 아닙니다. 맘 같아서는 미국에서 그들을 추방시켜버리고 싶을 정도에요.“

제퍼슨은 병에 남은 와인을 마저 잔에 따라 한번에 삼키며 말했다.

“후···. 아메리카는, 미국은 기회의 땅이어야 합니다.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고, 누구나 대접 받을 수 있고, 구세계의 질서에서 벗어난 곳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몰아낸 영국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제퍼슨이 덧붙였다.

“기욤 씨. 나에게는 당신 같은 깨어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미합중국에는 깨어있는 사람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홀로 세상에 맞서 성공을 이룩하는 그런 사람.”

제퍼슨은 그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거구인 그의 몸이, 내가 앉아 있는 바람에 두 세배는 더 커보였다. 그리고 그 거대한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기욤 씨. 난 당신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그 깨어있는 이성이라는 신을 믿습니다.”

난 나도 모르게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기욤 씨. 미국으로 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