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냉해 (2) (25/341)

냉해 (2)

“토마스 제퍼슨 씨는 신생국 미합중국에서 오신 외교관이시네. 소피가 운영하는 살롱에서 처음 뵈었는데, 똑똑하신데다가 서로 말도 잘 통하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해서 금방 친해진 분이지.”

“하하. 후작님, 절 너무 높여주시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저 기본에만 충실할 뿐이랍니다. 저보다는 조지 워싱턴 씨나 벤자민 프랭클린 선생이야말로 그런 수식어에 어울리는 분들이죠.”

제퍼슨은 그렇게 말하면서 부끄럽다는 듯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어, 조지 워싱턴이라면 초대 미국 대통령 아니었나? 이야 제퍼슨, 이 아저씨대단한 사람이구나.

“제퍼슨 씨는 조지 워싱턴이라는 분과 매우 가까우신가 보네요?”

내 물음에 제퍼슨 씨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미합중국의 독립을 위해 서로 동고 동락한 사이랍니다. 게다가 워싱턴 씨는 능력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라 옆에서 많이 보고 배우기도 했었죠.”

뭐, 가끔씩은 조금 게으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분이지만요. 제퍼슨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아하 게으른 천재, 뭐 이런 건가? 대강 알고 있었던 역사 속 인물들을 깊게 알아가는 건 항상 뭔가 신기하단 말이지.

잠깐만. 지금 이런 잡담할 시간이 없는데. 너무 정신을 팔아버렸어.

“큼큼. 후작님? 제가 아까 전에 말씀드린 도움 이야기 말인데요···.”

“음? 아! 그랬었지. 손님을 모셔놓고 내 할 말만 이렇게 하다니. 정말 미안하네, 기욤.”

콩도르세 후작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러면 무슨 문제가 있길래 찾아왔는가?

“저번 겨울에 있었던 한파 때문에 제가 거래하던 곳의 곡물 창고가 큰 피해를 입었다더군요. 그것 때문에 간편식사에 들어갈 곡물류가 크게 부족해져서 혹여나 후작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곡물. 곡물이라···.”

내 말을 들은 콩도르세 후작은 오른팔로 턱을 괸 채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흠···비축량은 얼마나 남았나?”

“아마...이제는 1주일에서 2주일 사이 정도 남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구만! 이대로 가면 내 점심이 사라지겠어. 어디보자, 밀이나 보리, 홉은 비싸니 못 쓸 테고. 그렇다면 남은 게···.”

음, 중간에 뭔가 이상한 걸 들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끙 소리를 내면서 콩도르세 후작은 어느새 턱을 괴고 있던 오른손을 빼 눈두덩이를 연신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콩도르세 후작은 찾았다!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기욤! 혹시 미국에 있는 잉여 곡물을 사오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안 그래도 제퍼슨 씨의 말로는 미국이 요즘 곡물 장사에 맛을 들였다더군!”

그러나 후작의 말은 나도 아닌 제퍼슨에 의해 부정되고 말았다.

“일리는 있습니다만 후작님. 보스턴에서 프랑스까지 도착하려면 기본적으로 두 달가량은 배를 타야합니다.

화물이 선적되거나 역풍이 불면 그것보다 더 걸릴 수도 있고요. 그나마 지금은 올해 초라 신대륙 쪽으로 바람이 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바다는 언제 어디서 급변할지 모르니 낙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겁니다. 더군다나 요즘 대서양 항로 근처 카리브 해 근방에 해적들의 출몰 빈도도 높아졌다는 보고도 있었구요.”

“그렇군요···. 걸리는 시간은 그렇다 쳐도 갑자기 해적이라니. 하···설마 또 영국이랍니까?”

콩도르세 후작을 질린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제퍼슨도 그에 동조하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후작의 말을 받았다.

“영국 놈들 인성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진짜배기 해군을 보내 민간 선박을 노략질하는 건 아무래도 눈치도 보이고 위신도 떨어지니, 해적들에게 푼돈이나 쥐어주고 지난 독립전쟁 때 패한 것에 대해 치졸한 복수라도 하는 것 이겠지요.”

“끙···. 정녕 뭐 방법이 없는 건가...”

환했던 낯빛이 다시 어두워지면서 콩도르세 후작은 연신 눈두덩이를 다시 꾹꾹 눌러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내 낯빛 또한 덩달아 어두워지고 말았다.

크흡! 네 이놈, 귀리야! 내 사업! 내 고객! 내 돈을 돌려다오!

에효.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왔건만. 역시 이분들도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나.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낭비하지 말고 미리미리 고객님들한테 박을 그랜절이나 연습해 놨어야 하는 건데.

몇 도 정도 허리를 꺾으면 고객님들의 화가 조금이라도 더 줄어들까. 흑흑.

그러나 그런 침울한 분위기 속 제퍼슨이 던진 한 마디는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잡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흠. 제 전속 요리사가 실력이 꽤나 출중한데, 한 번 그 친구에게 상담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

“미안합니다, 제퍼슨 씨. 미안하네, 기욤. 내 친구 된 도리로써 끝까지 도와주어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후작님! 원래 예정에도 없는 방문을 한 건 전데요, 뭘. 제퍼슨씨를 소개해주신 것만 해도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해볼 테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기욤 씨 말이 맞습니다. 후작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요즘 할 일도 없어서 따분했습니다 하하하. 제퍼슨은 덧붙였다.

콩도르세 후작의 바쁜 일정 때문에 제퍼슨의 집까지는 나만이 가게 된 탓이었다.

나는 제퍼슨의 마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고, 곧 제퍼슨도 안으로 들어와 마차 안을 그 거구로 가득 채워 넣었다.

허. 이 마차도 상당히 큰 마차인데 제퍼슨 씨가 앉으니까 거의 뭐 일반 마차만 한 것 같네.

언제 해가 내려갔는지 문득 본 마차 밖은 온통 붉은 노을빛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연구실로 갔으니 벌써 네다섯 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었다.

이대로 제퍼슨 씨네 댁을 갔다 집에 가면 밥 먹을 시간도 없겠네. 오늘 저녁은 쫄쫄 굶겠구나. 흑흑. 우리 직원들은 사장이 이렇게 발에 땀나게 뛰어다니는 걸 알까.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제퍼슨이 말했다.

“기욤 씨. 오늘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저희 집에서 식사까지 하고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오. 나야 완전 땡큐지! 이 세상에 밥 먹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있다고.

“실례가 안 된다면야 저야 정말 감사하죠.”

“하하. 저도 기욤 씨 같은 유망하고 젊은 사업가와는 식사를 처음 해보는 거라 기대가 많이 되는 걸요.”

아니 왜 이렇게 비행기 태워주시지. 기분 좋게. 헣헣. 그래도 여기서는 겸손한 방울 넣어주는 게 인상에 좋겠지? 사람 인상이라는 건 좋으면 좋았지 나쁠일은 없으니까.

“기껏해야 구멍가게 수준인데요 뭘. 이 프랑스에서 저보다 난다 긴다하는 사람도 엄청 많습니다.”

내가 말을 끝내자 제퍼슨은 뭐라고 하려 했지만 어느 덧 마차가 도착하는 바람에 제퍼슨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마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이야···. 역시 외교관 같은 높으신 분이 생활하는 곳 답네요.”

귀족들의 저택처럼 휘황찬란하지는 않아도 고풍스럽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저택은, 담을 휘감은 담쟁이넝쿨까지 합쳐져 그 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저택의 문을 열기 전, 제퍼슨 씨는 아! 하는 표정과 잠시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내 얼굴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기욤 씨.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었네요...”

“예?”

“제가 미리 언질을 드렸어야 하는 건데... 정말 죄송합니다.”

헐. 설마 이제 와서 밥을 안 준다던가, 사실 네 사업을 도울 방법 같은 건 뻥이었어 하는 건 아니겠지?

사탄도 그 정도면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하면서 다시 연옥으로 들어갈거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과는 아예 궤가 다른 말이 제퍼슨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제 전속 요리사가 흑인이라는 말을 미리 해드렸어야 하는 건데. 정말 실례했습니다. 식사를 거부하셔도 제가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기욤 씨.”

에...? 흑인이요?

“···아니, 흑인이 뭐 어때서요...?”

내 말에 제퍼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안녕하십니까. 제임스 헤밍스입니다.”

“안녕하세요. 기욤 드 툴롱이라고 합니다.”

난 그렇게 말하며 제임스 헤밍스라는 투박한 인상의 흑인 요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헤밍스는 그 손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그 손을 자신과 악수를 위해 뻗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란 표정으로 손을 마주잡았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헤밍스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난 간략하게 헤밍스 씨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차근차근 얘기해 주었다.

냉해, 빵을 만들 재료의 부족, 우리가 파는 간편식사의 판매 금액과 원가까지.

내 말을 들은 헤밍스 씨는 손으로 턱을 몇 번 쓸어내리더니 조곤조곤 말을 시작했다.

“흠···. 그렇군요. 기욤 님께서 처한 상황이 어떤 지는 대강 이해가 됐습니다.”

“헤밍스 씨. 혹시 방법이 뭐 없을까요?”

이대로 가다간 기껏 확보한 고객을 물량이 없어서 놓치게 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단 말이야.

헤밍스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잠시 시장으로 따라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

얼마 뒤, 시장.

헤밍스는 곡물상 안을 뒤져대다가 뭔가를 찾아내고서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욤 님! 찾았습니다!”

“오! 뭔데요!? 뭔데요!?”

난 부리나케 달려 나가 헤밍스의 손에 들려있는 농작물을 살펴 보았다.

“이거···옥수수잖아요?”

“네! 맞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던 가게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손님들, 그건 가축 사료용 말린 옥수수입니다. 일반 옥수수보다 당도도 식감도 상당히 떨어지는 놈이라구요. 심지어 귀리보다도 떨어져서 가격은 몰라도 사람 먹을 건 못 됩니다.”

“그...그런가요?”

난 가게 주인의 말에 짐짓 침울해져 내뱉었다.

그러나 나와 다르게 헤밍스는 작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글쎄요? 하하. 기욤 님. 일단은 한 5kg 정도만 구매해보시죠. 제가 마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헤밍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게 주인에게 동의를 얻어 조그마한 주방을 빌린 헤밍스는 옥수수의 낱알을 모두 까내 곱게 빻아 옥수수 가루로 만들기 시작했다. 헤밍스는 거기에 약간의 밀가루와 소금을 섞더니 오븐에 넣고 즉석에서 구워버렸다.

곧, 오븐에서는 옥수수의 색깔을 담은 빵이 구워져 나왔다. 헤밍스는 빵을 반으로 쪼갠 뒤,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무리 맛없는 곡물이라도 대충 빵으로 만들면 그럭저럭 먹을 만하답니다.

하하!”

난 그의 순박하고 환한 얼굴의 뒤로 마치 휘광이 번쩍이는 듯 했다.

헤밍스 그는 신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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