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냉해 (1) (24/341)

냉해 (1)

한 잔의 커피.

우아한 브런치.

그리고···.

“여유로운 시간.”

크으으. 이거다. 이게 삶의 맛이지. 이게 인간다운 삶이지! 그래, 여태까지 내가 갈려 가면서 일한 게 이상한 거다. 난 사람이지, 누런 소, 검은 소가 아니거든.

비서 플로리앙 씨를 들인 지도 이제 근 삼 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근데 그 사람, 괜히 파리대학교에 입학한 인재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서류 업무를 맡기려 뽑은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을 해치우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더라. 일을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지나자 나에게 기초적인 세금 계산법까지 배워서 간단한 회계처리까지 맡길 정도니 말 다한 거나 마찬가지지.

그 덕분에 난 요 근래 파리에 올라와서 사업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홍홍 좋아용!”

“···그, 사장님. 다 좋은데 그 요상한 효과음 좀 안 쓰시면 안 되겠습니까?”

“으어어, 어...언제 왔어요?”

어느 새인가 내 옆에서 와 있던 플로리앙 씨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장님께서 이상한 효과음을 내시기 직전에요.”

“큼큼.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이상한 효과음이라니 너무하네. 게다가 못 볼 걸 봤다는 듯 한 저 얼굴. 마치 ‘이게...사장?’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흑흑. 이 기욤,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받은 것이에요.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로리앙 씨는

“아무튼 요새 일정은 모두 순조롭습니다. 1호점부터 7호점까지 다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구요, 새로 개업할 8호점의 조리장 임차도 차근차근 진행 중입니다.”

“역시 플로리앙 씨가 있으니까 일이 좀 쉽게 쉽게 풀리네요. 그 외에 별도 사항은 없나요?”

“아, 그러고 보니 1호점 조리실 분들 중 한 분 아드님이 이번에 애를 낳았답니다.”

“오 그래요? 적당히 한 5 리브르 쯤 봉투에 넣어서 아기 용품이랑 같이 보내 주세요.”

“···사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 아, 뭐. 네 뭐가 궁금하신데요?”

“고용인에게 왜 그렇게 잘 해주시는 건가요?”

“···어. 고용주가 경조사 정도는 당연히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예?”

“고용인이 즐거워야 사업장이 더 잘 돌아가잖아요?”

아니. 회사에서 애들 학비까지는 지원 못해주더라도 경조사는 축하해주고 슬퍼해줘야지, 안 그러면 누가 회사를 자기 것처럼 여기고 열심히 일하겠어. 다들 시간만 때우려고 하지.

플로리앙 씨는 그런 내 말에 무언가 감명을 받은 듯 한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말했다.

“역시···사장님은 정상은 아니십니다.”

어. 그거 칭...찬인가...? 저 얼굴을 보면 맞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아이고! 사장님! 비서님! 큰일 났어요! 큰일!”

“”예?“”

그런 우리의 대화는 조리사 아주머니 중 한 분이 사무실 문을 덜컥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깨지고 말았다.

***

“···그게 지금 무슨 말씀입니까? 이번에 귀리를 계약서에 써넣은 양만큼 제공하지 못하시겠다니요!? 갑자기 이러시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점포 하나가 소비하는 귀리만 해도 하루에 130kg 이나 된단 말입니다! 그런 점포가 7개에요! 7개!”

난 악에 받친 나머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아니, 거래처에 공급하기로 한 물건이 제대로 공급이 안 되면 미리미리 언질이라도 줘야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물건을 받으러 온 당일에 이따위 식으로 나오지?

“정, 정말 죄송합니다! 기욤 사장님. 저희도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하려고 있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주시지요.”

그렇게 말하는 방앗간 직원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내게 사죄를 청했다.

젠장. 저 사람 쪼인트를 깐다고 귀리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는데 더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에휴 막막하다 막막해.

조리사 아주머니가 가져온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우리와 거래하던 방앗간에서 갑자기 공급하던 귀리 양을 줄이겠다고 통보 아닌 통보를 넣은 것이다.

당연히 난 뒷목을 잡고 부리나케 달려 방앗간 문을 박차고 들어갔고, 영화처럼 ‘사장 나와!’는... 시전하지 못했다. 난 그 정도까지 불한당은 아니라구.

그것보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귀리 양이 부족하면 당연히 오늘 나갈 제품의 양이 주는 건 당연하고, 미리 공급 받은 신선한 고기나 채소도 자칫 잘못하면 폐기해야 한다. 거기에 오늘 일을 적게 한다고 해도 노동자들이 받아 가는 돈은 줄지 않는다.

그렇다고 생산하는 양을 줄여? 아니, 그게 더 악수지. 생산량을 줄이는 순간 2년 동안 아득바득 키운 충실한 고객들을 모두 잃는 거나 다름없다.

요컨대, 지출은 그대로인데 수입은 급감할 게 분명하다.

아니. 더 할 수도 있겠지. 만약···.

“알아왔습니다! 알아왔어요!”

내 생각은 허겁지겁 달려와 문을 열고 들어온 또 다른 방앗간 직원에 의해 멈춰졌다.

“그래!? 대체 무슨 일이야? 왜 귀리가 안 들어오는 건데! 지금 거래처 사장님까지 와 계신 거 안보여? 빨리 말해봐!”

“그···. 저번 겨울이 유독 춥지 않았습니까? 그 때문에 곡물 창고 몇 곳이 냉해로 피해를 입었는데, 그것도 보통 피해가 아니라 저장해 놨던 곡물이 죄 썩어버렸답니다.”

“아니! 그걸 어째서 오늘 아침에야 알아차린 거야!?”

“죄송합니다! 농민들이 대충대충 눈대중으로 수량만 맞춰 보는 바람에 미리 확인을 못하고 출하 직전에 안 것 같습니다.”

“이···이익, 이런 밥버러지새끼들! 추수도 대충대충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다음부터 그 새끼들이랑은 거래 끊어버려!”

젠장, 난장판이 따로 없구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까지 한 번 감안을 해봐야겠어.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알려주시죠. 이번 귀리 공급 문제 말입니다. 장기화 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사장님.”

나와 원래부터 얘기하던 직원은 양해를 구하더니 헐레벌떡 뛰어온 말단직원에게 물었다.

“이봐. 헨느믈랑은? 헨느믈랑 창고는 어떤가.”

“그쪽도···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날 다시 쳐다보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아무래도 원래 공급해드리던 양만큼 공급은 힘들 것 같습니다.”

최악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뭘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남은 귀리 양은 어느 정도 됩니까?”

“아마, 두 달에서 세 달 정도는 평소의 반 정도로 공급을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난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직원에게 말했다.

“평소처럼 같은 양을 공급해 주세요.”

“예? 하지만 사장님, 그렇게 되면 잠시는 괜찮을지 몰라도 다음에 귀리가 공급될 때까지 못 버티실 겁니다!”

“그건 제가 방도를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일단 오늘 치부터 빨리 공급해주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는데, 설마 한 달 동안 방법 하나 못 찾겠어?

***

“에라이 씨발! 도저히 방법이 없네!”

난 의자의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좆 됐다. 그것도 완전히.

한 달 동안 곡류란 곡류는 모두 조사해 봤지만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는 걸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플뤼에 부인의 도움까지 받았는데도 그런 거면 말 다했지 증말.

밀? 그거 아나? 밀로만 만든 빵은 귀족들이나 먹는 거지 돈 없는 서민들은 밀조금에 요것 저것 곡물을 짬뽕해서 만든 빵을 먹는다. 그 만큼 밀이 비싸다는 거지.

보리? 보리도 좋긴 하다. 근데 우리가 간편식사를 팔아먹는 값이 너무 싸다보니 그 보리조차도 쓸 수가 없다.

“···친구 분들에게 여쭤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장님.”

요 근래 나와 함께 연일 야근을 하는 바람에 피곤에 찌든 플로리앙 씨가 힘없이 말했다.

“그 사람들 죄다 일을 더 망쳐먹으면 망쳐먹었지 덜하지는 않을걸요.”

그루시가 날 도와준다고 생각하니 경기를 일으킬 것 같네 진짜로.

“···그러면 도움을 청할 다른 분은 없으십니까?”

“플로리앙 씨는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어요?”

내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전직 공장 노동자가 아는 사람이 있어 봤자죠. 아! 그때 말씀하셨던 후작님은 어떻습니까?”

“후작?”

“그 콩 머시기 후작님 있지 않습니까.”

“아 콩도르세 후작님이요?”

“저희야 뭐 이제 더 해볼 것도 남아 있지 않은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번 만나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달라고 하셨다면서요.”

그··· 도움이라는 게 빵 만드는 걸 얘기하는 건 아닐 텐데. 하긴 플로리앙 씨말 대로 우린 더 해볼 것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한 번 얘기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알겠어요.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그동안 눈 좀 붙이고 계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난 외투를 걸치고 사무실을 나갔다.

***

“이게···연구실?”

명함에 써져있는 주소를 따라 콩도르세 후작의 연구실에 도착한 나는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연구실은 개뿔, 저택이라고 해도 믿겠다.”

연구실은 대강 어림짐작해도 플뤼에 부인의 하숙집만한 규모였다.

겨우 한 사람이 쓸 연구실이 십 수 명이 거주하는 하숙집만 하다니, 후작이라는 작위가 괜히 주어진 건 아니구나.

연구실 문을 두드린 나는 곧, 콩도르세 후작을 보필해주는 고용인을 따라 텅빈 방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 후작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한 십 여 분정도 지나자, 콩도르세 후작이 환한 미소를 띤 채 방으로 들어와 악수를 청했다. 나 또한 웃으며 그의 악수를 받았고.

“기욤! 오랜만일세!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후작님. 혹시 바쁘신데 제가 실례를 드린 건 아닌지 제가 더 죄송하네요.”

“하하. 아니네. 난 괜찮네. 그런데 무슨 일로 왔나? 자네 같이 바쁜 사람이 안부를 묻는다고 찾아올 리는 없을 텐데.”

“다름이 아니라 사업에 관련해서 문제가 좀 생겼는데, 혹시 후작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와봤습니다.”

“그런가? 음···일단 응접실로 올라가세나. 자네 말고도 손님이 한 분 더 와 있거든. 무슨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친구도 똑똑한 사람이니 한번 의견을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걸세.”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하하하. 그래, 그러면 날 따라오게.”

콩도르세 후작은 내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방을 나섰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방을 나와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거대한 키를 가진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뭐야. 키가 얼마나 되는 거지? 180cm? 190cm?

거구의 사내는 날 보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 또한 손을 내밀어 마주 잡고 반가움의 표시를 보여주었다.

“반갑습니다. 청년이 후작님께서 말씀해주신 기욤 드 툴롱이겠군요?”

“아, 네! 맞습니다. 게헨느에서 온 기욤 드 툴롱이라고 합니다.”

“전 토마스 제퍼슨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토마스 제퍼슨?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작가의말

항상 봐주시는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귀욤둥이님 추천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추천글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라 정말 기쁘네요!

연재시간은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 공지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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