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빠른 면접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 점심이었다.
플로리앙은 간편식사의 마지막 조각을 입 안에 서둘러 쑤셔 넣고 우물거리면서 손에 남아 있는 부스러기를 탈탈 털어냈다.
마저 손을 털어낸 플로리앙은 공장으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 그러나 벽에 붙어있던 처음 보는 벽보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플로리앙은 벽보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 사람이 미래다! 가족 같은 기업 <이삭의 민족>과 함께하실 사무직원을 구합니다.
어느 순간 플로리앙은 벽보를 떼어내 아예 손에 쥐고 읽기 시작했다.
- 근무는 단순 사무이며, 근무 시간은 정오부터 오후 7시까지, 근무처는 그르넬흐 거리에 있는 <이삭의 민족>1호점입니다.
그리고 플로리앙은 벽보의 마지막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급료는 일급으로 지급되며, 3 리브르입니다. 언제든지 편할 때 면접 보러 오세요!
그 때 누군가 플로리앙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자기보다 열 살정도 더 먹은, 옆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이봐 플로리앙, 쉬는 시간 끝났어. 슬슬 들어가 봐야해.”
“....아저씨 이게 뭐에요?”
플로리앙의 손에 들려 있는 벽보를 본 노동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그거? 요 며칠 새 간편식사 팔고 다니는 아줌마들이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더라고.”
“그렇군요...”
“···플로리앙. 너 혹시 거기 써져있는 말을 믿는 건 아니지?”
“···.”
노동자는 플로리앙의 굳게 닫힌 입을 잠시 처다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플로리앙. 잘 생각해봐라. 넌 나 같은 일자무식도 아니니 더 잘 알잖냐. 부자 나리들이 머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니고 돈을 그렇게 막 뿌릴 리가 있겠어? 거기 있는 대로 가봤자, 고약한 귀족이나 사업가한테 그걸 정말로 믿었냐고 망신이나 당할 게 분명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들어와.”
그 놈들한테는 우린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만도 못하니까 말이야. 노동자가 덧붙인 말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노동자는 플로리앙을 밖에 세워둔 채 공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플로리앙은 생각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지금껏 만나본 사업가, 자본가라는 사람 중 고용인에게 이렇게 많은 돈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세간의 시선으로는 자신의 딱한 처지를 동정해주며 매일 받는 일급에 동전 다섯 닢을 더 얹어주는 자신이 일하는 공장의 공장장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될 정도니까.
이건 사기다.
사기가 분명하다. 보나마나 고약하고 괴팍한 자본가들이 순진한 평민들을 골탕 먹이려 판 함정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벽보는 불쏘시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플로리앙은 벽보를 쥔 손에 들어간 힘을 뺄수 없었다.
‘만약 이 글이 진짜라면.’
3 리브르. 지금 받고 있는 돈의 세 배. 거기다가 일곱 시간밖에 되지 않는 근무 시간. 그렇다면 남은 시간에는 자신이 그만두었던 학교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플로리앙은 누군가 공장 문 밖으로 나와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야! 플로리앙! 일 시작한지가 언젠데, 당장 안 들어와!?”
“네, 네! 갑니다, 작업반장님!”
플로리앙은 벽보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다시 매캐한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이 다 되가는 지금. 플로리앙은 아직까지 이삭의 민족사무실에 가지 않았다.
아, 정확하게 말하면 가지 ‘못’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인 플로리앙의 삶이었다.
하루라도 일터에 나가지 않으면, 당장 어미니와 자신의 다음 끼니가 걱정되는 삶이었다.
그래서 플로리앙은 하루에 1 수씩 돈을 모았다. 자신이 하루 일을 쉬어도 하루는 끼니를 때울 수 있게.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 플로리앙은 공장에 하루 휴가를 내고 이삭의 민족 사무실을 찾았다.
아직 이른 오전인 탓일까, 사무실은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으... 언제든지 오라는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었나?”
어느덧 과거로 가버린 청명한 가을 날씨 대신 찾아온 추운 겨울 날씨는 텅텅빈 복도를 찬 공기로 가득 채워 넣었다.
덕분에 플로리앙은 양 손을 겨드랑이에 꼭꼭 숨긴 채 복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하염없이 누군지 모를 면접담당자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가 없는 플로리앙은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창밖의 해가 떠있는 위치를 보고 대강 몇 시인지 가늠할 뿐이었다. 해는 하늘의 4분지 1 정도 되는 곳에 걸쳐있었다.
“겨우 한 두 시간정도 밖에 안 지났나.”
정말 더럽게도 안 가네.
플로리앙은 시간도 때울 겸 조금 자기로 했다.
***
“···요! ···저기요!”
뭐지. 누구지?
“아이고, 학생! 정신 좀 차려 봐요!”
“예, 예?”
“아유, 살아있었네! 다행이야 다행! 우린 학생이 죽은 줄 알았어!”
눈을 뜬 플로리앙은 복도에 수구리고 있는 자신을, 수 명의 아주머니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무슌, 어...왜...왜이래 모미...”
입을 연 플로리앙은 자신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덜덜 떨리고 윗니와 아랫니 가 쉴새없이 딱딱 거리며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따닥! 딱! 따닥!
플로리앙은 주인의 명령도 없이 움직이는 입을 손을 뻗어 움켜잡으려 했지만 굳게 굳어버린 팔은 플로리앙이 내린 지시를 수행하지 못한 채 삐그덕 거릴 뿐이었다.
“아니,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요?”
“도..도아..즈..세요..”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사람부터 구해야지. 마리 씨! 나 좀 도와줘봐! 이 학생 좀 일으켜보게. 그래 그쪽 잡고, 하나 둘 셋!”
우드드득
아주머니 두 분이 플로리앙의 양 팔을 잡고 들어 올리자, 근 세 시간동안 쭈구리고 있던 플로리앙의 몸은 공포스러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으..으아아아악! 끄아아아악!”
아, 플로리앙이 비명을 지른 건 덤이고.
***
“아하 그러니까 학생은 우리 꼬마사장님이 뿌린 벽보를 보고 왔다는 거구나?”
“ㅇ..예, 예 마자요오.”
플로리앙은 동태가 돼버릴 뻔 한 사고(?)에서 구해진 지 삼십 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턱 근육을 간신히 움직여 말했다.
그것도 뜨겁게 달궈진 오븐과 불판에 둘러싸여 담요를 둘둘 두르고 뜨거운 물까지 마신 덕에 겨우 그 정도까지 풀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지. 우리 꼬마사장님은 오늘 어디 가셨는데...”
“네...네?”
플로리앙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루에 조금씩 푼돈을 모으고 모아 겨우 시간을 내서 왔건만. 사장이 어디로 출타 했다고?
그렇다면 다음에 이곳으로 또 와야 한다는 건가? 그때는 며칠이 걸릴까. 한달? 아니면 그보다 더?
곧 1월이고 그때는 눈이 오기 시작할 것이다. 눈이 오지 않는 지금도 이렇게나 추운데 그때는 무조건 난로를 때야 얼어 죽지 않을 수 있을 거다.
안 된다. 지금이 아니면 한 달, 아니 다음 봄까지 기회는 없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저 자리가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아니. 무조건 채워질 게 분명할 테지. 아무리 사람들이 그 구인 광고를 헛소리로 여기고 본 체 만 체 한다지만 자신과 같은 사람 한 명이 안 나올까?
“···안됩니다.”
“응? 학생 뭐라구?”
“전, 오늘, 꼭, 사장님을 만나야 합니다.”
플로리앙은 아직 굳어 있는 턱 근육을 온 힘을 다해 억지로 비틀며 또박또박 큰소리로 얘기했다.
***
어느덧 해가 지평선 뒤로 넘어가고, 달이 그 백색의 몸을 빛내며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플로리앙은 아직 온기가 남은 조리실에서 아주머니들이 남겨준 담요로 다시 몸을 감싸며 아주머니들의 따듯한 온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 우리는 근무가 끝나서 먼저 가볼게요, 학생. 꼭 합격해서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 학생! 이 아줌마가 뭐 특별히 줄 건 없고, 여기 이거. 아까 점심에 팔고 남은 자투리 재료로 만든 거니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먹어요. 아침부터 나와 있던 거 같은데 출출하잖아요.
- 아이고. 이제 불도 더 못 때는데... 아! 학생! 이 담요라도 덮고 있을래?
“좋으신 분들이야.”
플로리앙은 이제는 완전히 풀린 입을 통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사장이란 사람. 오늘 오기는 하는 걸까.”
창밖으로는 벌써 달이 중천에 올라 있었다.
아마 어머니는 지금쯤 홀로 집에서 플로리앙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후···.”
플로리앙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어쩔 수 있나. 다음에 다시 기회가 있으면 좋겠ㄴ···.”
“일이다아~ 일이다아~ 몸에 안 좋고 맛도 싫은 일이다아~ 일이다아~.”
철커덕!
그때 누군가 기괴한 노래를 부르며 복도로 올라와 사무실 문에 열쇠를 꽂아돌렸다.
플로리앙은 바로 담요를 내팽겨치고 조리실 밖으로 달려 나가 사무실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앳된 얼굴의 청년이 문을 열고 나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여기가 이삭의 민족 사무실 맞습니까?”
플로리앙은 떨리는 마음으로 벽보를 손에 쥔 채 눈앞의 청년에게 말했다.
“여기 구인 공고 보고 찾아왔는데요.”
“아이고, 어서 오십셔!!!!!!!!!!”
청년은 플로리앙의 말을 듣자마자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
플로리앙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기다린 면접이었다.
혹여라도 사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떨어뜨릴 때를 대비해서 자신의 유용함을 알려줄 웅변까지 준비하고 있었던 플로리앙이었다.
그런데
- 전 플로리앙 알렉상드르라고 합니다. 사장님. 학력은 중퇴긴 하지만 파리대 학교 화ㅎ···.“
- 합겨어어어억! 플로리앙 씨! 내일부터 나오세요!
- ···예?
- 내일 오후부터 여기 사무실에서 뵙는 겁니다! 그러면 전 이만! 끼얏호우!
- 저, 저기요! 이렇게 면접을 끝내도 되나요?
- 퇴근이다! 퇴근! 으헤헤헤헤헤헿! 음후헤헤헤!
황당함을 이기지 못한 플로리앙의 말에도, 청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망치듯 사무실에서 뛰쳐나갔다.
플로리앙은 다시 한 번 곰곰이 그 ‘사장’에 대한 기억을 곱씹어보았다.
사장이면 모름지기 노동자의 고혈을 빨면서 젠체하는 게 일과 아닌가?
하지만 아까 본 청년 사장의 얼굴은 영락없는 노동자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였다. 피곤함에 찌든 다크서클은 눈 밑을 검게 덮고 있고, 언뜻 방문 뒤로 보인 사무실에는 서류로 만들어진 탑이 책상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게···사장이라고?”
플로리앙은 그날, 침대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 자신이 사기 같은 거에 당한건 아닌가 끊임없이 되뇌었다.
작가의말
항상 봐주시는 독자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ps. 요즘 연재시간을 바꿔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오후 1시 연재다 보니 투베에 들어도 사람들이 많이 보는 시간에 노출되는 빈도가 적더라구요.
그래서 오후 9시나 오후 10시 쯤을 새 연재시간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독자 분들은 몇시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지 댓글로 알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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