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자
살롱
18세기 귀족, 그리고 지식인들의 사교의 장이자 학문을 나누는 배움의 장이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된 커다란 방이 배경이 되어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자신의 의견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사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무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이 펼쳐져 있으며,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는 다과와 차, 커피 등이 제공되는 이곳은, 가히 사교계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 보기만 해도 근대 귀족 뽕이 가득 들어차는 광경을 본 나는
졸고 있었다.
“야야 기욤! 일어나!”
“으어어. 마티유 형. 나 어제 4시까지 일하다 잤단 말이야···. 내 다크서클안보여?”
“애초에 니가 같이 오자고 한 거잖아. 니가 졸면 어떡해?”
“거, 그게 맞긴 한데···.”
나 진짜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단 말이지.
내 특급 구인 광고를 취업 사기로 보는 사람들 덕에, 난 광고를 낸 지 두 달이 되었음에도 홀로 그 어마무시한 서류작업을 감당하고 있었다.
난 잘 먹고 잘 살려고 돈 버는 게 목표지 돈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일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벌기만 하는 인생이라니, 이런 인생은 싫어요!
게다가 그루시 형의 누나는 사람을 이렇게 초대해 놓고 코빼기도 비추질 않고 계속 우리를 기다리게 만들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티유 형 외에 말을 나눌만한 사람도 없다는 점에서 내가 느끼는 피로감은 두 배가 되고 있었다.
아마 말동무 해줄 마티유 형이 없었다면 벌써 집으로, 아 아니지 집은 무슨.
사무실에 할 게 산더미처럼 많은데 가긴 어딜 가. 일해야지. 흑흑.
“···형, 우리 그냥 갈까?”
“그래도 초대장 보낸 사람 얼굴은 보고 가야지.”
“미안해요. 손님을 초대해놓고 이렇게 기다리게 만들다니.”
그때 우리의 뒤에서 맑고 고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와 마티유 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20대 초반의 갈색 머리의 미인이 우릴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그녀 또한 내 악수를 받아주면서 말했다.
“반가워요. 당신이 기욤 드 툴롱인가요? 전 소피 드 그루시라고 해요. 에마뉘엘에게 얘기 많이 들었답니다.”
“아 그래요? 설마 그루시 형이 험담이라던가 안 좋은 말은 안했나요?”
“험담이라뇨. 호호. 재밌는 사람이시네요.”
소피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 옆에 있는 마티유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쪽 신사 분이 마티유, 맞나요?”
“어, 에? 아, 예! 맞습니다! 제가 프랑수아 마티유입니다.”
“반가워요 마티유. 너무 긴장하지말고 편하게 즐기다가 가요?”
“네, 네! 감사합니다!”
“어머, 아주 혈기왕성한 분이시군요? 호호.”
마티유 형은 소피가 말을 걸자 발갛게 상기된 채 목소리를 덜덜 떨며 말하기 시작했다.
이 형. 설마?
“아, 내 정신 좀 봐. 두 사람에게 소개해줄 사람이 있는 걸 깜빡 했네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소피는 그 말을 마친 채 살롱 안쪽에 있는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마티유 형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 엄청난 미인!”
“···돌겠네 진짜.”
마티유 형의 말을 들은 난 낮게 읊조렸다.
***
다시 나타난 소피는 후덕한 40대 아저씨와 팔짱을 낀 채 나타났다.
아, 물론 마티유 형의 눈이 그 모습을 보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흔들린 건 안비밀이고.
“기욤, 이쪽은 제 약혼자 콩도르세 후작님이에요.”
“안녕하십니까. 게헨느에서 온 기욤 드 툴롱입니다.”
“반갑네, 기욤. 후작 콩도르세라고 하네.”
나와 콩도르세 후작이 악수를 나누자 소피는 마티유 형에게 콩도르세 후작을 소개했다.
“반갑네. 마티유. 후작 콩도르세라고 하네.”
“···예... 안녕하세요... 디종의 프랑수아 마티유입니다···.”
마티유 형은 자기가 언제 그렇게 신나했다는 듯 완전히 죽을상이 되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뒤 마티유 형은 날 보더니 상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몸이 안 좋아서··· 가서 좀 쉴게.”
“어···알겠어.”
그 말을 마치고 형은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이 정도면 5분 만에 컷 당한 건가. 에휴 불쌍한 마티유 형.
마티유 형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나를 깨운 건 콩도르세 후작의 말이었다.
“기욤. 나는 자네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다네.”
예? 후작님 같이 높으신 분이 왜 이런 불초소생에게 관심을 가지십니까?
“어···. 왜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겨우 열다섯에 파리라는 거대한 도시에 7개가 넘는 가게를 만든 인물한테 관심을 안가지면 쓰나. 하하하.”
“아니, 어떻게 그걸···?”
“나도 간편식사 자주 사먹는다네. 연구하다 보면 제때 끼니 때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서 말이지.”
콩도르세 후작은 그렇게 말하더니 펜대를 굴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긴, 간단하게 식사 때우는 사람들한테 샌드위치가 최고긴 하지.
“연구라니, 혹시 과학자이신가요?”
“아, 난 과학보다는 수학, 철학 쪽이라네. 과학 쪽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하네만. 왜, 과학자가 필요한 일이라도 있나?”
뭐. 지금 당장은 필요 없지만 공돌이는 항상 사업가에게 필요하긴 하지. 샌드위치 만드는 거야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멀미약 같은 건 아무나 못 만드니까.
“아뇨. 지금은 하고 있는 사업도 벅차서 따로 무슨 일을 벌일 수가 없네요.
하하.”
“그런가? 음···자네 같은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필요하다면 내 사람을 수소문해볼 테니 언제든지 필요할 때 말하게나.”
뭐야. 아저씨 왜 그렇게 나를 잘 대해줘요? 대가 없는 호의는 없고, 공짜 점심은 없다고 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그렇게 들들 볶으셨는데.
후작님 저한테 대체 뭘 원하시는 겁니까.
간편식사 평생무료권 같은 건 저도 못 드린다구요!
“어···저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시나요? 무슨 바라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내 말에 콩도르세 후작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껌뻑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인생의 선배 된 사람이 당연히 후배 된 사람을 도와야 되는 거 아닌가?”
아. 이 사람은 그냥 착하고 선한 분이시구나.
“그리고 같은 계몽주의자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예? 뭐요? 왕이 생각하는 가장 싫은 사람 1위인 루소 같은 계몽주의자?
“어···제가, 계몽주의자요..?”
“응? 에마뉘엘 그루시, 그 친구 말을 들어보니 자네는 완전 계몽주의자던데?”
아 정말 진짜. 어쩐지 고객님이라고 쳐도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신 거 같더니만.
그루시! 또 너야?
“후작님. 죄송하지만 전 계몽주의자가 아닙니다.”
내 말에 콩도르세 후작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 자네가 왜 계몽주의자가 아닌가?”
아니,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죠. 거참 사람 말 못 믿으시네. 전 그런 거 관심 없단 말이에요.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 지 콩도르세 후작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곳보다 훨씬 높은 임금에, 어디서 따왔는지 아니면 스스로 생각한건지 짐작도 안가는 수준의 직원 복지, 게다가 일주일에 세 번씩 친목 모임과 함께 빈민 자선사업. 심지어 친목 모임의 이름은 ‘평등클럽’이고.
이런데 자네가 왜 계몽주의자가 아닌가? 나보다도 훨씬 대중과 밀접한 것 같은데.”
어라. 나, 계몽주의자인가?
***
살롱에서 콩도르세 후작에게 한바탕 시달리고 난 뒤, 난 못 다한 서류 작업을 위해 이삭의 민족 사무실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에 들어온 나는 외투에서 지갑과 수첩을 꺼내 책상에 던지듯 올려놨다.
그 때문에 지갑에 아무렇게나 끼워 넣었던 명함 한 장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까 살롱에서 나올 때 콩도르세 후작에게 받은 명함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명함을 주워 다시 책상에 올려놓았다.
- 이건 내 명함이네. 거기 내 연구실과 집 주소 같은 건 다 써져 있으니까,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부담 갖지 말고 찾아오게나.
뭐,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괜찮겠지. 나중에 써먹을 일이 있으면 좋겠네.
“에효. 됐다. 일이나 하자 일.”
그러나 내가 펜을 쥔 순간,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쿵쿵!
아, 딱 맘 잡고 시작하려니까 또 누구야 대체.
“예. 나가요 나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서둘러 나가 문을 열자, 나보다 키가 좀 큰 20대 중후반의 남자가 서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여기가 이삭의 민족 사무실 맞습니까?”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손에 쥔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 구인 공고 보고 찾아왔는데요.”
“아이고, 어서 오십셔!!!!!!!!!!”
그 말을 듣자마자 난 90도로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 체면이 별건가!
이렇게나 기쁜데 말이야!
드디어 나도 인간다운 삶을 만끽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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