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프랑스
“생도! 받들어 총!”
어깨에 금술을 단 의장대 생도의 말이 떨어지자 수백정의 총기가 일사불란하게 철컥 소리를 내면서 생도들의 어깨에 그 몸을 기댔다.
18세기의 삐까번쩍한 군복을 입은 생도들 수백이 기수 별로 모여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물론 구경꾼들이 보기에는 장관이지 서있는 사람은 생고생인 게 문제지.
“나폴레옹 형이랑 그루시 형 때문에 이렇게 서있다니 맘에 안 드는 걸.”
“그러는 너도 나중에 저 자리에 서서 후배들한테 똑같은 소리 들을 텐데?”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입을 조금 열어 낮게 말하자 마티유 형이 말했다.
“흥, 난 군인 안할 거거든?”
“그래, 그래 어련하시겠어. 꼬마친구.”
마티유 형은 그렇게 말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낄낄 댔다.
“마지막으로 이번 졸업생 생도들의 계급장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우리가 잡담하는 동안 어느새 1785년 파리중앙군사학교 졸업식의 마지막 장이 올라가고 있었다.
곧 쏘가리가 되실 졸업생들이 주인공인 클라이맥스였다.
교장은 계급장을 들고 있는 부관과 함께 단상에서 내려와 한명 한명에게 계급장을 주며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 생도 --- 보병 소위. 생도 --- 보병 소위.···”
“나폴레옹 형이랑 그루시 형 차례는 언제지?”
“뭐, 나폴레옹은 포병이고 그루시 형도 포병이니까 곧 아닐까.”
우리의 바램처럼 곧 호명하는 소속이 포병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생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포병 소위.”
교장은 나폴레옹 형의 차례가 되자 잠시 형과 눈을 마주치더니 뭐라고 작게 조금 얘기한 뒤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나폴레옹 저 양반 얼굴이 안 썩은 것 보니까 그나마 욕은 아닌 것 같네.”
“흠, 일리 있는 말이야. 기욤.”
교장과 쇼부를 본, 학년조차 모독하는 최강의 천재 나폴레옹 형이 별 탈 없이 넘어갔으니 이제 한 시름 놨구만.
그러나 별 탈은 나폴레옹 형이 아니라 그 뒤에 일어나고 말았다.
“생도···. 에마뉘엘 드 그루시 ‘기병’ 소위. 아아아주 축하하네. 부디 부친 그루시 후작께 잘 지내시냐고 안부인사 좀 전해 줬으면 좋겠군.”
까드득
어, 방금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마티유 형 방금 들었어?”
“득츠그 즈용이 흐애.”
마티유 형의 말에 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근데 왜 그루시 저 양반이 ‘기병’ 소위지? 엊그제까지만 해도 포병이었는데.
···.
아 설마.
아니겠지?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루시 형은 교장의 말에 천진난만하게 답하고 말았다.
“네! 아버지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교장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시뻘게진 건 안비밀이다.
***
“으아아아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아주 그냥 날 개좆으로 보고 있는 게 분명해!”
행사 뒤, 집무실에 도착한 교장은 신경질적으로 외투를 벗어 던지며 말했다.
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별 이상한 생도들은 다 봤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사업을 하질 않나, 3년짜리 교과과정을 1년 안에 끝내버린다던가, 그래도 자신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장으로서 모두 너그럽고 따듯하게 이해해주었다.
물론 그 생도들이 특출나게 똑똑한 생도기도 했지만.
그런데 뭐?
“그루시 그 미친 새끼! 졸업하기 이틀 전에 보직을 바꿔달라고!? 그것도 안되니까 지 아버지를 데려와서 반강제로 협박을 해!? 대체 교관들은 뭘 가르친 거야! 프로이센하고 전쟁하던 때였으면 총살이야 총살! 갸아아아악!”
그날, 자칭 너그럽고 따듯한 교장의 집무실은 누군가 열심히 열을 내는 바람에 평소보다 조금 더 따듯해지고 말았다.
***
“자! 조금 이르지만 1785년의 마지막을 기리며, 건배!”
““와아아아!!!”
“
항상 모이던 하숙집에서 조촐한 뒤풀이를 한 우리 평등클럽은 술은 절대 아니고 아무튼 술맛이 나는 어떤 음료를 나눠 마시며 아직은 이른 연말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 물론 나와 나폴레옹 형, 마티유 형, 그리고 그루시 그 미친 사람은 제외하고.
“···그러니까. 형 말은 교장한테 보직을 바꿔달라고 했다. 그래서 바꿨다. 이거 맞아?”
“음! 그렇네! 하하하!”
“아니 씨발 지금 하하하가 나와 이 미친 양반아!?”
“하하하?”
“아주 그냥 돌아버린 게 분명해. 음음.”
그루시의 천진난만한 말에 우리 세 명은 아주 정신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아니, 교장실 문을 까 부셔버리고 드가가 교장한테 1대1로, 그것도 졸업하기 이틀 전에 보직을 바꿔 달라 캤는데 그걸 진짜로 바꿔준 기가?”
“아니네. 처음에는 교장님도 반대하셨지. 그러나! 이 몸, 그루시! 남부럽지 않은 열정과 날 알아주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결국 교장님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성공한 것이네! 하하하!”
“···사람들의 도움?”
“무신 사람들의 도움이고?”
“그러게. 열정은 그렇다 치고 도움?”
“아, 우리 아버지께서 내 잠재성을 교장님께 정중하게 알려주셨네!”
“···애미.”
“···그루시 햄. 혹시 미칬나?”
“···신이시여.”
그루시 형은 집안 빵빵한 귀족이다. 근데 좀 보통 빵빵한 게 아니다.
듣기로는 그루시 형의 아버지가 왕하고 농담 따먹기 하는 사이라는데. 그게 어디 보통 빵빵한 집안인가?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진 가운데, 내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준비나 해.”
“음? 기욤, 무슨 준비를 말하는 건가? 하하하!”
“씨발 앞으로 형은 존나 구를 일만 남았으니까 미리 준비나 하라고!”
그리고 얼마 후, 나폴레옹 형은 발랑스 근처의 라 페흐 포병 연대로, 그루시형은 ‘왕실 근위대’로 발령이 떨어지고 말았다.
***
사람은 살다보면 무언가에 딱 꽂힐 때가 있다. 게임일 수도 있고, 예능 프로그램일 수도 있고, 책을 수도 있고.
그리고 사업을 하다보면 ‘아 이건 무조건 된다’ 하는 아이디어에 꽂힌다.
그리고 나는 요 근래 꽂힌 물건이 있었다.
바로 멀미약.
세르주 주교 아저씨가 나에게 저지른 일은 저어엉말 한치의 용서도 해줄 수 없지만 뭐 어떠냐.
멀미약이라는 희대의 힛! 아이템을 얻었는데. 맘 같아서는 지금 당장 대량생산해서 팔아치우고 싶다.
아 물론 내 앞의 이 서류의 산을 밀어낼 수 있다면 말이지.
“갸아아아악! 연약한 기욤은 죽어버려욧!”
우리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었다.
아, 번창도 번창인데 보통 번창이 아니었다.
“와 씨 이러다가 진짜 과로로 죽겠다. 죽겠어!”
난 방금 전까지 들여다보던 세금장부와 펜을 아무렇게나 책상 끝으로 밀어버리며 말했다.
우리 사업은 ‘너무나도’ 나날이 번창하고 있었다. 파리 내 점포만 7개째니 말다했지 뭐.
“3호점까지는 내가 어떻게 해보겠는데 그 이상은 도저히 못해먹겠단 말이야.
후.”
새 학년에 접어들면서,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의 수도 늘어났지만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탄도학이니 뭐니 하면서 수준까지 높아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나는 지금 학교 공부에, 이삭의 민족 세무작업에 자선사업까지 도저히 새 사업을 할 시간을 내질 못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박카수나 줭관장같은 강장제라도 있으면 몰라, 맨 정신으로 저 많은 일을 다 맡아 처리하려니 허리가 휠 지경이네 진짜.
일을 분담하려고 해도 나폴레옹 형과 그루시 형은 졸업하고 발령 받은 지 오래고, 마티유 형은 소득세가 뭔지도 잘 모를 테니 결국에는 내가 다 도맡아서 해야 한다.
아, 듣기로는 그루시 형이 마티유 형한테 보낸 편지에 ‘살려주게’라고 적혀 있었다던데. 뭐 내가 알 바인가.
“그나저나 이제는 정말 비서나 조수 같은 사람을 하나 뽑아야겠어. 안 그러면 확장도, 새 사업도 못하겠네.”
돈 모아 놓고 뭐하겠나. 내가 과로로 쓰러지면 다 부질 없는 건데.
옆으로 굴러간 펜을 다시 손에 쥐고 나는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선 서류업무는 무조건 가능해야 하니 되도록 가방끈이 좀 길어야겠고, 근무시간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온 다음에나 가능하니까 오후 쯤.
돈은··· 아, 나폴레옹 형이 초봉으로 500 리브르 쯤 받았다고 하니 일급 3 리브르 정도면 너나 나나 다 올 것이다.
음 완벽해. 이제 곧 어마무시한 인재들이 쏟아지겠군. 으헤헤헤헤!
***
“···그런데 아무도 안 찾아 왔다고?”
“따흐흑. 마티유 형, 형은 나의 이 찢어지는 마음을 모를 거야.”
공고를 올리고 한 달째, 이삭의 민족 사무실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대체 왜? 아니 왜 안 오는 거지?
초임 장교가 연봉으로 500 리브르를 받는 시대다. 쏘가리 연봉이 500 리브르라고!
아니, 3시간 일하고 3 리브르면 거의 말도 안 되는 임금인데 진짜로.
이 정도면 야인시대 김두한도 오케이! 땡큐! 바로 나오겠다.
이건 말도 안돼. 이건 음모야! 그래, 내 사업을 견제하는 음모가 분명해!
설마 라부아지에 그 돈에 미친놈이 방해한 건가? 내가 틈을 보일 때 달려들어서 날 죽이려고?
그런 나의 상념은 곧, 마티유 형의 말에 흩어지고 말았다.
“그 기욤아. 내가 한 번 생각을 해봤거든?”
“어?”
“아무래도···. 사람들이 사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사기?”
“조금 일하고 받아도 너무 많이 받잖아? 아무래도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아. 지금은 18세기지.
노동자 인권이 역사상 최악 수준인 시대다.
노동자라는 명칭도 예쁘게 말해준 거지 막말로 거의 소모품이나 다름없는 게 지금의 노동자다.
“그러니까···조건이 너무 좋아서 사람들이 안 온다고?”
“그렇지.”
그저
대단하다! 프랑스!
***
한편 같은 시각 파리의 호화스런 저택.
“에마뉘엘 네가 그렇게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다니 나도 한 번 만나보고 싶은 걸?”
“하하하! 역시 누님이시라면 제 마음을 알아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루시의 이름을 걸고 기욤 그 친구를 만나보는 건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호호호. 진짜 군인이 되고 나서도 허세는 안 고쳐졌구나? 그래, 그래야 에마뉘엘 드 그루시지.”
“큼큼···누님도 참.”
누나 소피 드 그루시의 말에 에마뉘엘 드 그루시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소피는 잠시 생각하는 듯 싶더니 옆에 앉아 있던 자신의 약혼자에게 물었다.
“콩도르세? 당신은 에마뉘엘의 꼬마친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어, 어···? 아, 물론 좋은 친구 같네요, 소피.”
“콩도르세?”
“어?”
“또 내 옆에 있으면서 연구 생각만 하고 있었죠?”
“아···아니에요! 정말, 정말 좋은 친구 같아서 그래요, 소피!”
“흥, 됐어요! 이미 마차는 떠났어요.”
거의 스무살 가량 많은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약혼자 콩도르세 후작은 오늘도 20대인 소피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다.
둘 사이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영락없이 추한 모습이었다.
에마뉘엘 드 그루시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소피에게 말했다.
“그러면 누님. 기욤 그 친구는 언제쯤 집으로 부를까요?”
“흠···아니야. 집으로 부르지 말구 내 살롱에서 보는 게 좋겠어. 마침 오기로한 손님들도 계시니까, 그 아이에게도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니?”
“역시 누님! 바로 기욤 그 친구에게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하하하!”
그 말을 마치고 에마뉘엘은 고개를 숙인 뒤, 저택을 나갔다.
“참, 언제 봐도 활발한 아이라니까.”
그 모습을 본 소피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