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고민 (2)
“실례가 많았네. 기욤 군. 자네 덕에 많은 생각을 하고 가네.”
“뭘요. 저도 오랜만에 가슴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요. 하하.”
시에예스는 그렇게 말한 내 어깨를 대견스럽다는 듯 몇 번 토닥이더니 마차에 올라탔다.
어우 사람 참 대단해. 팔팔한 14살짜리인 나도 밤을 꼴딱 새니 피곤해 죽겠는데 서른 중반 넘은 아저씨는 아주 쌩쌩해서 나 몰래 잠이라도 자고 온 건가 싶다.
자, 쌩쌩한 사제 아저씨와의 용무는 끝났으니. 이제 정산시간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직 마차에 타지 않은 세르주 주교를 쳐다보았다.
얼씨구? 이 양반 지금 졸고 있는 거야? 아아아니 새벽에 계속 얘기한 건 나랑 시에예스 사제님인데 아저씨가 왜 지금 졸고 있어요?
“큼큼!”
“어? 어, 어! 나 안 졸았네. 기욤.”
세르주 주교는 내가 큰 소리로 낸 헛기침 소리에 놀라서 깨며 말했다.
“···뭐 저한테 할 말 없어요?”
“할···말? 아아···. 우리 사이에 꼭 무언가 말이 오가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어라? 이 아저씨. 지금 끝까지 모른 척 하겠다, 뭐 이런 거야?
“도대체 제가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를 왜 생판 모르는 남이 알고 있는 거 죠? 그것도 조금도 아니고 저어어언부 다?”
“아··· 그건 말이지. 어···어쩌다 보니까, 하···하.”
“주교님.”
“어? 어, 어! 듣고 있네!”
“만약에 말이죠. 주교님. 마아아아안약에. 저어어기 법원에 있는 판사나리나 경찰관이 제가 한 얘기를 듣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어···. 음, 어. 큰일이 나지 않을까 싶네만.”
“그런데 그걸 왜! 다른 사람들한테! 떠! 벌리고! 다니냐고! 요!”
“내···내가 경솔했네. 기욤 군, 한 번만 용서해 주게나!”
이 시대의 나라는 아직 왕이 떵떵거리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곳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아 님 정치 개좆같이 하는 거 보니까, 곧 민란 맞으실 듯? 쿠쿠루삥뽕.’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뭐긴 뭐야. 김두한 대장한테 잡힌 심영이겠지. 아, 오히려 그것보다 심하려나? 닷씨는 안하겠다고 빌어도 최소 단두대 행 아닐까.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냐고요! 갸아아아악!”
“내···내 다시는! 밖에서 말하고 다니지 않겠네!”
“밖에서? 그러면 안에서는 말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가 밖이지 안입니까?”
음, 좋아. 철원의 얼어붙은 GOP 위에서 단련된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제대의 갈구기 스킬은 아직 살아있구만.
우리 세르주 아저씨가 안절부절하는 모습도 재미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 갈궜으면 할 만큼 했다. 그래 이만 용서해주지 뭐.
“후,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주교님.”
“물론이지! 내 다시는 기욤 군을 실망시키지 않겠네!”
얼굴이 활짝 피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다 마음이 좋네. 역시 세르주 아저씨는 활짝 웃고 다니는 게 보기 좋단 말이지.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기욤 군. 집주인 분께도 차 정말 잘 마셨다고 말해 주시게.”
“네. 주교님도 조심히 가세요.”
세르주 주교는 작별인사를 한 뒤, 안주머니에서 무언가 약병 같은 걸 꺼내 눈에 한 방울 씩 떨어뜨렸다.
“근데, 지금 눈에 넣는 건 뭐에요?”
“어? 어, 어? 아···이거 말이지···.”
세르주 아저씨는 내 말에 화들짝 놀라더니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요 그거.
“이봐 세르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끼리 해후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오늘 안에 샤르트르로 가려면 일찍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네만.”
우리 두 사람이 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고 있자, 시에예스 사제도 마차 안에서 답답했는지 마차에서 나와 우리 둘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별건 아니고, 세르주 주교님이 눈에 뭘 넣으셔서 그게 뭔지 여쭤보고 있었습니다.”
시에예스 사제는 내 말을 듣더니 세르주 주교가 쥐고 있는 약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저 약물? 독초 벨라도나에서 추출한 약물인데, 희석해서 쓰면 멀미에 좋다네. 멀미약이라고 할 수 있지.”
“···멀, 미약이요?”
“그렇네만?”
시에예스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나 내 눈은 천천히, 하지만 강렬한 눈빛을 담아 세르주 주교의 얼굴로 향했다.
- 우웨에에엑. 주···주교님. 멀미를 가라앉히는 팁 같은 건 없나요?
- 하하하! 나에게도 그런 건 없다네!
없다매. 없다매. 없다매!!!!!
“기···기욤 군. 자···잠시만 나한테 해명할 기회를 주ㄴ···.”
“없!!!! 다!!! 매!!!! 갸아아아아악!!!!”
용서는 개뿔, 절대 안 해줄 거다.
***
“쯧쯧쯧, 대체 내 밑에서 뭘 배운 건가. 세르주. 나, 시에예스는 세르주 같은 맹랑한 동생한테도 좋은 정보 같은 걸 아낌없이 나눴는데 말이지.”
“끄응···.”
세르주는 시에예스의 말에 연신 끙끙댔다.
“형님, 그 제가 기욤 군에게 안 알려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니라?”
“그 뭐냐, 어릴 적부터 기물에 의존하고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자고로 사람은 어릴 적에는 좀 굴러도 봐야···.”
“세르주 자네. 못 본 사이에 아주 꼰-대가 다 됐구만? 하하하!”
시에예스는 세르주의 변명 아닌 변명에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꼬···꼰대라니요 형님! 제가 얼마나 진취적인 사람인데요.”
“그래 그래 우리 꼰대 주교님은 정말 진취적인 분이시지. 암, 그렇고 말고.
하하하!”
“···후, 이걸로 얼마나 더 놀려먹으실 겁니까, 형님.”
“자네가 10년 동안 나한테 카페 여직원이랑 있었던 일을 들먹였으니 나도 한 10년은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킬킬 대는 시에예스의 모습에 세르주는 샤르트르로 가는 시간이 억만년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
‘기욤 드 툴롱···.’
샤르트르로 가는 마차도 어느 덧 중간 지점을 넘어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세르주는 아침부터 계속 꾸벅꾸벅 졸더니 결국 마차 안에서 곯아떨어진 지 오래였다.
덕분에 시에예스는 혼자 새벽에 있었던 기욤과의 대화를 찬찬히 곱씹을 수 있었다.
‘확실히 보통 아이는 아니었다.’
기욤, 그 아이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물론 아직 역사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던 일이기에 그것이 과연 실현될 지는 의문이었지만.
- 조만간 곧 민란이 일어날 겁니다.
- 민란이라···. 왜 그렇게 생각하나?
- 30년간의 곡물 가격 변화를 생각해 보시죠.
- 곡물가격?
- 예.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제가 주로 거래하는 방앗간 주인이 하는 말이, 거의 2배 이상 뛰었다고 하더군요.
- 곡물 가격이 2배 이상이라.
- 쉽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귀족은 곡물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영지 내에서 사람들이 알아서 바치니까요.
- 그렇군. 곡물을 구매하는 대부분은 일반 민중이라는 건가.
- 맞습니다. 게다가 도시나 농촌의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았죠. 체감 상 일반민중이 느낄 부담감은 어마어마할 겁니다.
- 일리가 있군. 그렇지만 단순히 곡물 가격만으로 민란이 일어날 거라고 보나? 과거에 프랑스가 전란에 휘말렸을 때도 곡물 가격은 똑같이 올랐지만 민란은 없었네.
- 저도 단순히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민란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그러면?
- 가장 중요한 건 세금입니다.
- 세금이라.
“소득에 90%에 달하는 세금이라···. 민란이 안 일어나는 게 신기하군.”
시에예스는 기욤과의 대화를 회상하며 말했다.
프랑스가 곪아 가고 있는 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얼마나 곪았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의 말대로라면, 프랑스는 이미 곪은 수준이 아니라 곪아 터져 진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에예스의 눈은 어느덧 마차 창문 밖의 밀밭으로 향해 있었다.
곧 올 추수철을 기다린다는 듯 어느덧 크게 자란 녹색의 밀이 그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싱그럽다.
잔잔한 바람에 몸을 맡긴 밀의 모습이, 덧없이 싱그러워 보였다.
문득, 아까 있었던 기욤의 말이 떠올랐다.
- ···그렇다면 기욤 군. 자네는 언제 쯤 그런 민란이 터질 거라고 생각하나.
- 음. 저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일단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무조건 10년 안에 터질 겁니다.
- 10년···. 10년이라···. 규모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 아마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의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태워버릴 정도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 싱그러움도 모두 타오르고 만단 말인가.”
샤르트르에 도착할 때까지 그 싱그러움을 눈에 담아두려는 듯 시에예스는 밀밭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