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고민 (1)
“형! 오늘도 고마워요!”
“그래 그래. 내일도 또 오렴.”
“아이고 매일 받기만 해서 어떡해.”
“괜찮아요. 부담 가지지 마세요. 하하.”
“나리들 덕분에 딸아이가 기운을 차렸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아휴 다행이네요. 자, 오늘은 아저씨 몫 간편식사도 같이 드릴 테니까, 혼자 굶지 마시고 따님이랑 같이 드세요.”
원래 옷이었던 부분보다 이제는 기운 곳이 더 많아진 옷을 입은 중년 남성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가판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음~ 좋아. 오늘도 아아아주 보람 찬 하루구만.
아무래도 언제 혁명이 터져서 사람들 목숨이 파리 목숨이 될지 모르니, 미래에 내가 분노한 민중에 의해 단두대에 안 끌려가게 해줄 방파제를 만들고자 시작한 자선사업은 내 인간관계가 넓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미래를 조금이지만 아는 나로서는 아는 얼굴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건 정말 사양이니까 말이야.
특히 가장 친한 나폴레옹 형과 마티유 형.
그루시 그 양반은··· 뭐 가끔씩 4차원으로 빠지는 게 열불 터지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특별히 선심 써서 친하다고 해주지 뭐. 아무튼 이 사람들이 죽는 건 정말 생각도 하기 싫다.
때문에 ‘이삭의 민족’이 주관하는 불우이웃 식사 제공 자선사업은 나의 강력한 요청 끝에 이제는 평등 군단, 아니 이제는 좀 ‘덜 호전적’인 이름으로 개명한 평등 클럽의 정기적인 일과가 되었다.
처음에는 ‘아니 우리가 왜 그래야뒈? 시룬뒈?’하면서 입이 댓 발 나왔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자신이 건네주는 선의의 손길에 환하게 변하는 불우이 웃들의 미소를 몇 번 보더니 내심 자기들이 좋은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만족감에 흐뭇해져서 이젠 아니꼬워하는 사람들도 많이 줄어들었다.
하긴 이 세상에 남한테 부정적인 감정을 받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감정만 받고 싶지.
세상이 항상 웃으면서 살만 한 곳이 되면 좋으련만.
문득, 방금 전 아픈 딸아이의 음식을 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떠난 헤진 옷의 중년 남성이 떠올랐다.
씁쓸하구만.
담배가 이 만큼 땡기는 건 이복형들인 피에르와 조르주 그 새끼들이 날 괴롭힐 때 이후로 오랜만이네.
물론 그때는 빡쳐서 피고 싶었고, 지금은 그냥 씁쓸한 기분을 날리고 싶어서 피고 싶다는 게 다르긴 하지만.
그런 나의 진지한 상념은 누군가 내 등짝을 팡! 하면서 때리는 바람에 허공에 흩어지고 말았다.
“악! 아니, 등 때리지 말라고!”
“으하하하! 기욤! 자네 무슨 고민인데 그렇게 똥 씹은 표정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나!?”
어느 샌가 가판대 정리를 끝낸 그루시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 그런데, 다 좋거든? 다 좋은데 왜 항상 다들 내 등짝을 못 때려서 안달이지? 내 등에 꿀이라도 발라놨나.
그러고 보니 마티유 형이 저번에.
‘기욤. 네 등은 말이지. 뭔가···뭔가가 있어. 사람의 손바닥을 끌어들이는 마력이라고 해야 하나?’
뭔가가 있긴 개뿔.
등에 있는 건 가끔 나는 여드름뿐인데 있긴 뭐가 있어 진짜로.
아, 단두대로 가던지 말던지 그냥 상관하지 말걸 그랬나.
“아 별거 아니에요. 그것보다 정리는 다 됐어요?”
“으하하! 이 그루시 님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당연히 모두 다 끝내놓고 왔지!”
“좋아요. 그러면 이제 사업장에 다시 갖다 놓죠. 오늘 할 일은 끝났으니까.”
“알겠네! 내 바로 가지! 하하하!”
그루시는 그 말을 하고 가판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고개를 돌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 사람이 에너지가 넘친단 말이야. 따라가기가 힘드네 증말.
“그보다 말이지.”
그루시의 말에 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루시는 가판 대를 옮기기 쉽게 수레에 쌓으며 말하고 있어서 난 그루시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예?”
“고민이 뭔 지 말 안 해줄 건가?”
“···뭐, 대수롭지 않은 거라서 딱히···.”
“이상하군. 내가 아는 기욤은 그런 얼굴을 한 적이 없는데.”
뭐야. 이 사람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나?
“···.”
“몰상식한 불한당들에게 싸움이 걸렸을 때도, 난생 처음 말에 탔을 때도 내가 아는 기욤의 눈에는 총기와 당당함이 자리 잡고 있었네.”
“···그런데 위고 그 녀석하고 싸웠을 때 그루시 형은 없었잖아요?”
“어허. 이 세상에는 장막 안에 앉아 수 백 킬로미터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네. 물론 나도 그 중에 하나고.”
“아···예.”
어···.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평소의 그루시가 맞는 것 같기도?
“그런데 지금 자네 눈에는 총기도 당당함도 찾아볼 수가 없군.”
“···.”
“무슨 일인가?”
수레에 짐을 모두 실은 그루시는 고개를 돌려 평소의 장난스러운 눈빛이 아니라 진지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되네. 난 그저 친우로서 자네가 혼자 시름하고 있는 게 안타까웠을 뿐이니. 모두들 자신이 남들에게 별로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고민은 하나씩 간직하고 있기 마련 아닌가?”
하 참. 그루시 답지 않게 날카롭네. 그렇게 내가 티를 냈나.
“···이따 사업장 도착하면 얘기해 드릴게요. 여긴 말하기에는 좀 추우니까.”
“하하하! 좋아! 좋아! 그럼 출발해 보자고!”
그루시는 그렇게 말하며 수레를 끌고 온힘을 다해 달려 나갔다.
난 그런 그루시의 뒷모습을 보고 잠시 눈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1785년 초겨울, 파리의 하늘은 푸르렀다.
***
그루시와 얘기를 나눈 후 사업장을 나서자 하늘은 어느새 노을의 마지막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루시에게 뭐 대단한 소리를 한 건 아니었다. 그저 파리의 빈민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앞날이 걱정된다, 뭐 이런 정도?
괜시리 뭣도 모르는 도련님한테 내가 생각하는 혁명이니 뭐니 얘기해 봤자 그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까.
곧, 저녁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킨 기름램프와 촛불의 빛이 창문으로 새어나오면서 따듯한 기운이 파리의 거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램프와 촛불이 피워내는 불꽃은 물론 21세기의 가로등과 비교하면 세발의 피긴 했다.
그래도 집집마다 자연스러운 불꽃이 보여주는 감성은 밋밋한 가로등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21세기였다면 이런 거리는 상상할 수 없었겠지.
아, 아닌가? 21세기 인수타구램 갬-성하고도 맞을 것 같긴 하네.
어두워진, 그러나 따듯한 파리의 거리를 걸으며 집에 도착한 나는 집 앞에 세워져 있는 마차를 볼 수 있었다.
“엥? 뭐지. 하숙집 누구 손님인가?”
“어? 기욤!? 기욤 맞느냐?”
마차 안에 있던 사람은 내가 무심코 낸 목소리를 듣고 마차 문을 열며 말했다.
“어···? 세르주 주교님? 주교님이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마차 안에 있던 사람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 고향의 세르주 주교님.
어, 근데 좀 후덕해지신거 같은데···? 요즘 음식이 좀 많이 땡기시나.
“무슨 일이라니. 기욤 자네가 잘 지내는지 오랜만에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고, 또 자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왔다네! 으하핫!”
세르주 주교님은 그렇게 말하고 내 손을 격하게 흔들어댔다.
어우 언제나 퐈이팅이 넘치셔 증말.
주교님이 말이 끝나자 마차 안에 있던 사제복 차림의 서른 중반정도 된 남성이 나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네가 기욤 군인가. 세르주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네. 만나서 반갑군.”
“아···예. 안녕하세요.”
“난 세르주 녀석의 선배 사제인 에마뉘엘 시에예스라고 하네. 자네에게 듣고 싶은 것도, 얘기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 밤에 찾아 왔네.”
“음··· 일단 밖은 추우니까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고맙네. 잠시 실례하도록 하지.”
내가 하숙집 문을 열자 세르주와 시에예스 두 사람은 고개를 잠깐 까닥여 감사를 표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난 겉옷을 벗고 내 탁자에 올려져있던 기름램프와 벽난로에 불을 붙였다.
초겨울의 차가운 날씨에 의해 추웠던 방은 불씨에 의해 점차 따듯해지기 시작했다.
플뤼에 부인이 손님이 오셨다며 늦은 밤에도 준비해준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절반 정도 마신 차를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저와 하고 싶다는 얘기가 뭐 길래 찾아오신 건가요?”
시에예스는 그 말을 듣더니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지금의 프랑스가 곧 소돔과 고모라나 마찬가지라는 당돌한 친구 얘기를 듣고 만나보고 싶었다네.”
뭐야. 아저씨가 내가 한 말을 어떻게 알아요.
난 고개를 살며시 꺾어 세르주 주교를 쳐다보았다.
세르주 주교는 내 눈을 마주치더니 슬쩍 고개를 돌리고 휘파람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예전에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었던가? 그 말 취소. 단 둘이서 한 얘기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다니.
난 다시 시에에스를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얘기는 쉽게 꺼낼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나. 세상이 만들어질 때 귀족이고 왕이고 없었다는 얘기보다는 덜 한 얘기 아닌가? 하하.”
아니 세르주 이 양반 대체 어디까지 말하고 다닌 거야?
이 서슬 퍼런 왕정시대에 저런 말 함부로 하고 다니면 내 목이 날아간다고!
난 다시 세르주에게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세르주는 흠칫하더니 헛기침을 연발하고 창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우 얄미워.
“···그래서 혹시 절 법원에 잡아다 넣으시려구요?”
음. 다른 죄수들이랑 갇히는 건 쪼오오큼 위험하지 않을까? 차라리 독방에 넣어달라고 해야하나.
“엥? 내가 자네를 왜 잡아넣나? 나도 자네랑 똑같이 생각하는데 말이지. 하하하.”
시에예스는 내 말을 듣자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아 나를 무슨 잔인한 이단심문관이나 치안감찰관처럼 생각하는 건가 보군.
걱정하지 말게. 나도 자네랑 비슷한 류야.”
“비슷한 류라면 어떤···?”
그는 살짝 고민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이고 성직자고 귀족이고 다 한 번 쓸려봐야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야하나?”
“푸우우웁! 케헥! 콜록콜록!”
시에예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르주는 마시고 있던 차를 뿜으면서 시에예스를 당황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혀, 형제님! 아, 아니 형님! 그···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뭐야 세르주, 왜 그러나? 네가 저번에 찾아와서 알려준 말을 좀 ‘과격’하게 바꿔 봤을 뿐인데 말이야. 하하하!”
시에예스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그러다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진지한 눈빛을 건네며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이 얘기를 듣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군? 마치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란 듯이 말이야.”
“···곧 있으면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어차피 세르주 아저씨한테 내가 한 말은 죄다 들었을 사람이다. 뭐 더 숨기고 모른 채 해봤자 나만 피곤해지겠지.
“···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시에예스는 손을 모아 턱을 받치며 말했다.
“좀 긴 얘기가 될 텐데 괜찮겠습니까?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여서요.”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하숙집 주인장께 차가 아니라 커피를 달라고 할 걸 그랬네.”
그날 우리 방의 불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작가의말
여러분들의 관심과 격려 덕분에 일반연재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독자여러분!
아 그리고 조만간 소설 제목이 바뀔 것 같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제목이 pc, 모바일 화면에서 모두 잘려나가서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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