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새로운 얼굴 (17/341)

새로운 얼굴

“마, 기욤이 내는 먼저 가봐야 긋다. 할 일이 많아가꼬 요즘 시간을 몬 내내.”

나폴레옹 형은 식사 시작 5분 만에 저녁식사를 먹더니, 아 정정해야겠네.

저녁식사를 씹지도 않고 삼키더니,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 알겠어. 조심히 들어가.”

이제는 거의 반년 넘게 본 나폴레옹 형의 빨리빨리 스케줄은 21세기 대한민국의 그것보다 훨씬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폴레옹 형이 소설을 쓰다가 드디어 미쳐버린 줄 알았다.

아, 맨날 권총으로 주인공 쏴죽이는 소설만 쓰니까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그건 아니더라.

- 교장이랑 얘기하고 왔다 아이가. 내 3년짜리 교육과정을 1년에 압축시켜서 배우겠다고 약속했다.

- 아니, 형 미쳤어? 그걸 어떻게 하려고해? 빨리 가서 물러달라고 해!

- 마, 놔라. 이거는 내가 미치갔꼬 하는 게 아이라 철저한 계산에 의한 기다.

계산!

- 도대체 무슨 계산인데? 들어나 보자.

- 자, 봐라. 내가 3년짜리를 1년 만에 통과하면 우예 되겠노?

- 뭐, 17살에 소위 달겠지. 또 뭐가 있나?

- 마, 돈을 벌잖아! 돈!

- 아니, 돈이라면 우리 사업장에서···.

- 마! 내는 이미 받을 만큼 받았다 아이가. 아무튼 이건 내 철저한 계산에 의한 기다. 알긋나?

- 아니 뭐 내가 모른다고 하면 때려치울 것도 아니잖···. 악! 악! 등짝 때리지 말라고!

- 니는 예절이 부족하다 예절이! 내가 오늘 예절 주입 한 번 해주께!

에이씨 생각나니까 또 짜증나네.

지 심기 좀 거스른다고 이 어리고 나약한 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걸 보니 나중에 무조건 액땜 할 거다.

그러고 보니 역사책에 나온 나폴레옹 초상화는 머리가 휑하던데 아마 평소에 맘씨를 곱게 안 써서 모발의 신이 머리를 가져간 것 아닐까? 음 일리 있군.

완벽한 논리야.

아무튼 근 반년 간 봐온 나폴레옹 형의 일과는 줄일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시간을 줄여 공부에 투자하고 있었다.

식사는 무조건 5분 내로.

하숙집에서 학교까지는 무조건 뛰어서.

쉬는 시간에는 쪽잠.

잠은 다섯 시간 이내로.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양의 세배, 게다가 난이도까지 고려 하면 그 배는 될 만한 공부량이니 시간이 일분일초라도 아까운 건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이 저렇게 하면서 살 수가 있나?

웬만한 성인도 저런 식으로 혹사하면 죽을 것 같은데 아직 16살인 나폴레옹형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벌써 반년 째 저렇게 살고 있단 말이지.

역시 한 나라와 민족을 책임지고 끌고나갈 사람은 뭐가 다르긴 다른가보다.

일단 나폴레옹 형이 우리 기수에서 나가게 되면서 항상 수석을 차지하던 나폴레옹 형의 자리는 나와 마티유 형이 번갈아 가면서 차지하게 되었다.

위고 그 놈은 학교를 휴학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파리파는 행동대장을 잃은데다가 우리 ‘평등 군단’에게 대차게 깨진 이후 대부분 조용하게 지내고 있었다.

우리 모임은 그 이후로도 정기적으로 열리며 서로 친목을 도모하게 되는 자리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정기 모임 날이었다.

“오, 기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이번에는 좀 빨리 왔네. 어서 들어와.”

“아니 그저께 학교에서 만났으면서 오랜만은 무슨 오랜만ㅇ···. 으억!”

“짜식,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하하!”

마티유 형은 말하고 있는 내 등을 팡 치면서 얘기했다.

대체 나폴레옹이고 이 양반이고 죄다 날 못 때려서 안달일까?

이러다가 내 등짝이 남아나질 않겠어.

난 얼얼해진 등짝을 짊어진 채 마티유 형네 방으로 들어갔다.

음, 오늘은 내가 1등인가? 아 아니네.

내 눈은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혼자 앉아 있는 제복 차림의 청년에게 향했다.

나보다 서너 살은 더 먹은 얼굴과 체격의 청년은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내가 헛기침을 하자 그제서야 내가 들어온 걸 알아챈 듯 했다.

“오! 우리 ‘평등 군단’의 구심점 기욤 드 툴롱! 다시 또 만나게 되어 영광이 네! 으하하핫!”

“아···예.”

청년은 과할 정도의 인사와 함께 내 손을 마주잡고 흔들어 댔다.

이 사람의 이름은 에마뉘엘 드 그루시. 파리 태생에 아아아주 잘나가는 후작가문의 귀하디귀한 자제 분이다.

학교 성적도 준수하게 유지해서 몇 달만 있으면 포병대 소위로 임관할 사람이다.

뭐?

곧 졸업하는데다가 그렇게 높으신 분이 왜 중하급 지방 귀족과 평민들이 모인 ‘평등 군단’에 있냐고?

그건 이 사람이 우리 모임 때마다 꾸역꾸역 들어와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계속 가입하겠다고 우겨댔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은 동서양 모두 통하는 듯 하하 웃으면서 ‘평등 군단’이 내세운 기치가 맘에 든다니 이름부터가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다니 하면서 가입하고 싶다고 떼를 쓰는데.

아니 뭐 내가 어쩔 수 있나. 결국 받아주고 말았다.

사람이 순진하고 낙천적인건지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탈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내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알겠나.

뭐, 하는 행동이나 말하는 걸 보면 영락없이 꽃밭에서 거니는 순진한 귀족 도련님인 것 같긴 하다.

- 오! 이렇게 훌륭한 생도들, 그리고 후배님들과 만날 수 있다니.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하해와 같은 성은이 아닌가. 아! 주여. 이 미천한 종이 감사드리 나이다.

- 역시 신께서 보우하시는 프랑스의 미래는 밝구나! 프랑스의 과거에 필리프대왕께서 있으셨다면 이제 프랑스의 미래를 이끌어갈 ‘평등 군단’이 그 길을 맡아 행진할 것이 분명할테니···!

이 사람 하는 말의 대부분이 거의 유아용 텔레토비 수준이나 기독교 종교방송에서 나올만한 말이란 말이지.

보통 이런 사람들하고는 선을 좀 둬야 한다.

머리가 꽃밭인 사람은 언제 어디서 미친 짓을 할지 도통 감이 안 잡히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말 좀 걸지마요. 제발. 나 웃는 사람한테 침 못 뱉는단 말이야.

“기욤! 자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말이요? 뭐, 딱히 별 생각은 없는데···.”

별 관심 없다는 내 제스처에도 그루시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열변을 토했다.

“말이란 말이지 기욤! 기수와 하나가 되는 전우이자 피를 나누는 형제나 마찬가지라네!”

“아···예.”

“생각해보게! 말이라는 친우와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거대한 평야를 뛰쳐나가는 수만의 명예로운 기병들을! 아아 너무나도 아름답지 않나?”

“그···그렇군요.”

계속해서 말 얘기를 꺼내던 그루시는 문득 침울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 그런 기병들을 지휘하지 못하다니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

아, 이 사람 중증 말박이인가?

21세기 미국에 포니인지 머니인지 하는 만화가 있었는데 그거 보여주면 아주 감격의 눈물을 흘리겠구만.

나는 이제 반쯤 정신을 놓고 그루시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 상 한 삼십 분 가량 넋을 놓고 있던 나는 그가 말한 한 단어에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기욤 자네는 정말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아! 내 열아홉 평생 이런 친우는 만난 적이 없어! 흠흠. 내 그런 자네한테만 말하는 건데 말이지. 자네 혹시 ‘루소’라는 사람 알고 있나?”

“켁! 쿨럭! 케헥 칵!”

마시는 것도 없는데 사레가 들리다니 세상에나 마상에나.

아니, 그것보다 아저씨. 뭐라구요? 루소? 혹시 왕 대가리를 깨고, 시민들이 세운 민주주의 프랑스를 만드는 시발점이 된, 그 루소?

루소는 이 시대 가난하고 젊은 지식인들의 아이돌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나도 원래는 몰랐는데, 주변에 평민들도 많고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사람이란 말이지.

사실 처음에 루소를 들었을 때는 누구지? 했다가 그 사람이 말한 ‘사회계약 론’을 듣고 수능공부 할 때 내용이 떠올랐다.

‘원래 사회는 구성원들끼리 계약을 맺고 만들어진 거임! 그러니까 왕권이 신한테 왔다는 건 구라인 듯? 쿠쿠루 삥빵뽕’

근데요.

아저씨 완전 귀족가문 아님? 그걸 왜 물어봄? 기득권의 마천루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어.

설마 이 사람 우리 ‘평등 군단’이 맘에 안 든 파리의 높은 사람들의 밀정인가?

아직 헌법도 인권도 없는 시대인데 말대답 잘못해서 끌려가면 무조건 죽는 거겠지?

“어··· 흥···미로운 사람이죠?”

“아아아니! 기욤! 흥미롭다니!”

좆 됐다.

말대답을 잘못한 건가? 하느님아버지알라신부처님 제발 저는 여기서 죽기 싫어요!

“그 분은 선지자야! 루소 그 사람은 잠자는 사람들의 눈을 띄워준 사람이란 말이네!”

“···에?”

이 사람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파리 고위 귀족이 루소를 왜 빨아?

그 이후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도착하고 모임이 시작될 때까지 장장 두 시간 동안 루소가 얼마나 위대한 지에 대해 그루시 저 미친놈한테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

“그러면 아라스 고등법원은 피고에게 1년 간의 금고형과 1천 리브르의 벌금을 선고한다. 이상으로 본 법정은 폐회를 선ㅇ···.”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존경하는 재판장님. 애초에 원고가 먼저 피고에게 숱한 갈취를 일삼았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대체 왜! 변호사의 반론은 듣지도 않는단 말입니까!”

“이보시오. 변호사! 재판장의 공명정대한 판결에 이의를 갖다니, 지금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는 겐가?! 한 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앞으로 변호사 자네를 선임하는 사람들에게 불이익이 갈지도 모르네!”

열을 내느라 흐트러진 벨벳 법복을 가지런히 모은 판사는 다시 판사봉을 잡고 세 번 땅땅땅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상으로 본 법정은 폐회를 선언합니다.”

판사의 말에 검사들과 판사들, 그리고 귀족인 원고는 시시덕거리며 이 더운 여름에 후끈해진 재판장에서 서둘러 나갔다.

그러나 피고와 변호사는 차마 이 재판장에서 나갈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이 나가는 순간 피고는 더 이상 법으로 보호받는 피고가 아닌, 그저 죄를 지은 범죄자일 뿐이니까.

“···변호사나리. 저는 괜찮습니다···. 변호사나리가 최선을 다하신 거 저도 압니다. 애초에 저 같은 가난뱅이가 변호사나리 같은 똑똑한 분을 한 푼도 안내고 일 시키는 것도 다 변호사나리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인데요. 그저, 염치 불구하고 제 아내와 아이만이라도 잘 지내도록 해주십쇼.”

얼마나 지났을까 피고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장을 나섰다.

변호사, 변호사나리라고 불린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이 변호를 맡은 피고가 문을 나서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의 손은 어느 순간부터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분노일까 아니면 체념일까.

아니. 자괴감이었다.

파리 최고의 대학교를 최우수로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뒤, 유수한 언변과 대나무 같이 곧은 심성으로 수많은 재판을 승소로 이끈 그였다.

그러나 그런 그는 오늘 억울하게 끌려온 평민 한 사람조차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했다.

이게 무슨 변호사인가.

기득권에 들러붙어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대는 게 지식인인가.

비참했다.

이 세상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어내도 고작 억울한 한 사람조차 제대로 변호할 기회도 주지 않는 이 세상이, 너무 비참했다.

아라스의 유명 변호사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변호사석에 앉아 그저 고개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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