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투 (4)
결전의 날 아침, 위고 드 라는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로는 물론 아침식사 메뉴가 훌륭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기욤 그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애송이를 합법적으로 조져버릴 상상을 하는 것이 컸다.
검으로 명예롭게 자웅을 가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결투는 결투다.
서로의 명예와 위신을 걸고 싸우는 자리인 것이다.
위고도 처음에는 그 꼬마 놈의 술수에 걸려든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일주일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히려 자신에게 더 득이 되는 결투방식이었다.
수십 명을 데리고 위풍당당하게 개선하는 명망 있는 위고 드 라.
그리고 옆에 기껏해야 프랑스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는 얼치기 한두 명을 데리고 털레털레 도망갈 기욤 드 툴롱.
아, 얼마나 좋은 그림인가.
위고 드 라는 학교를 향해 오늘따라 더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죠? ···기요? 저기요!”
“어···? 어어.”
기욤의 말에 위고는 상념에서 깨어나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광경을 다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기욤 드 툴롱은 서른 명을 꽉꽉 채워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몇몇은 위고도 알고 있는 얼굴이다.
분명 촌놈들과 평민 출신들이었다. 그 치들이 지금 ‘평등 군단’이라는 이름이 금실로 새겨진 깃발까지 들고 오와 열까지 맞춰 도열하고 있었다.
위고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뒤에도 서른 명에 달하는 사람이 서 있었다.
오히려 평균 체격은 이쪽이 더 크고 탄탄했다. 그러나 개중 누구도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호주머니에 손을 한 짝씩 넣거나 껄렁한 모습으로 다리를 꼬고 있을 뿐.
위고는 저 촌놈들과 천한 평민 놈들 상대로 고상한 파리 귀족들이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오히려 허술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마뜩찮았다.
그래도 어쩌랴, 꿀 같은 방학에 자신의 긴급소집에도 응해준 친구들이다. 그들을 자신의 부하처럼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었다.
위고의 눈은 다시 기욤과 그 ‘평등 군단’에게 향했다.
‘···아주 독기를 품고 준비했군.’
두 양자가 보여주는 모습의 차이를 알게 된 위고는 생각했다.
‘그래도 체격은 우리가 훨씬 커, 질 싸움은 아니다.’
***
“억!”
“악! 아악!”
“으억! 내 머리!”
전투(?) 개시 삼십 분 만에 우리 깃발을 향한 스무 명에 달하는 파리파의 공세는 마티유와 그를 위시한 건장한 아홉 명에게 철저하게 돈좌되었다.
아니 그냥 돈좌가 아니지. 열일곱 열혈남아들이 던진 눈덩이에 맞은 파리파 대부분은 맞은 부위를 움켜잡고 나뒹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그런 광경을 보고 있는 위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놈들이 던지는 눈덩이에 짱돌이라도 들어있는 건가?”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위고의 옆에 떨어진 눈덩이는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산산이 깨져나가며 튀어나갔다.
“끼얏호우! 받아라!”
“저 파리 놈들 살려서 보내지마!”
“다른 곳은 필요없다! 머리! 머리를 노려! 끼요요욧!”
평등 군단의 깃발 수비대는 광기에 젖어 눈에 보이는 파리파의 머리마다 눈뭉치를 던져댔다.
“···이거 재밌는데?”
마티유는 가까이 다가오던 파리파 한명의 정수리에 눈뭉치를 맞추며 말했다.
파리 놈들을 두들겨 패는 게 재미없을 리가 없다.
그런데 두들겨 패는 걸 나만 일방적으로 팬다면?
그것도 엄청 쎄게.
“이건 뭐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네. 나폴레옹하고 기욤 그 두 사람은 이런 걸 다 예상하고 준비해 둔건가? 대단하구만.”
마티유는 다시 10시 방향에서 접근하던 파리 놈의 머리에 눈뭉치를 맞추며 말했다.
머리, 그것도 정수리에 정통으로 눈뭉치를 맞은 파리파는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실로 브르넬흐 겨울거리의 학살이라고 불릴 만 한 전투였다.
***
“자자, 여러분 모두 모여보세요!”
“뭐야 무슨 일인데, 기욤?”
난 쿠키 바구니를 들어 사람들 있는 곳에 내려놓았다.
“뭐야 쿠키야?”
“아뇨. 포탄인데요?”
“어? 포···포탄?”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이건 우리의 비밀무기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쿠키 바구니를 덮은 천을 걷어냈다.
“뭐야 그냥 눈뭉치잖아.”
“난 또 먹을 건줄 알았네.”
내가 천을 걷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허이 싸람들이 증말. 희대의 악당들과의 결전을 앞에 두고 먹을 걸 찾다니.
“그러지들 말고 한 번 만져보시죠.”
“아니 무슨 눈뭉치에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다고 그래?”
“어? 이거 뭐야!? 뭐 이렇게 딱딱해!?”
“그러게 말이야. 이거 그냥 돌멩이 수준인데?”
내 밀명 아래, ‘이삭의 민족’ 조리사 아주머니들이 준비한 눈뭉치들은 새벽 동안 집 밖에서 얼어붙어, 거의 유사 돌멩이가 되었다.
한 분에게 쿠키 바구니 두 개씩 만들라고 부탁드렸으니 서른 바구니.
우리가 한 사람 당 한 바구니 씩 들고 개인 화기로 쓸 무기로는 충분했다.
“근데 이거 사람 맞으면 죽는 거 아니야?”
마티유 형은 유사 돌멩이를 쥐고 딱딱한 정도를 시험하려는 듯 바닥을 툭툭두드리며 말했다.
“형 그거 알아?”
“뭔데?”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죽어.”
아아. 기욤이 선사하사, 그저 하찮은 눈뭉치에 불과한 것이 사회의 정의를 무너뜨리는 악당들을 해치울 성스러운 무기가 되었노라.
***
“으히히히히 꼴좋다 낄낄.”
우리 기지의 깃발수비대가 파리 놈들 머리를 으깨버리는 걸 본 나는 내가 아침에 전해준 ‘특제 눈덩이(얼음탑재)’가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너무나도 맘에 든 나머지 소리내서 웃고 말았다.
“마, 기욤이 좋아할 시간이 없다! 축하는 나중에 하모 된다 아이가.”
나폴레옹 형은 그런 내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자, 점마들 첫 번째 공세가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 아이겠나?”
“아 기다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구.”
난 내 몫의 눈뭉치 바구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말했다.
위고 이 새끼. 대가리 딱 대라.
***
“···그러니까 지금 몇 명이 부상이라고?”
“여섯 명이 지금 몸져누웠어. 한 놈은 팔이 부러진 게 분명하다면서 난리를 피우던데, 헛소리인 것 같고···.”
“···애들 사기가 바닥이겠군.”
“애초에 모인 애들 다 촌놈들 합법적으로 때려줄 기회라고 해서 온 거지, 그놈들한테 맞으려고 모인 건 아니잖아. 어쩔 수 없지, 위고.”
“그래도 어쩌겠어. 저놈들 깃발 못 뺏으면 눈 따위에 맞아서 아픈 것보다 더 수치스러울 걸. 다시 한 번 가보자. 이번에는 나도 같이 따라갈게.”
“그러면 우리 깃발은 누가 지켜?”
“한 서너 명 남겨놓으면 되지 않겠어?”
“음···뭐 알겠어. 애들한테는 일단 말해놓을게.”
“그래 고맙다.”
말을 마친 친구가 다시 다른 애들에게 가는 걸 보고, 위고는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2월이지만 아직 차갑고 시원한 겨울 공기가 폐 속으로 물길 치듯 들어왔지만 위고의 답답한 마음은 하나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촌놈들의 방어선은 견고했다.
물론 첫 번째 공격에 저 녀석들이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 안했지만, 스무 명가량을 보냈는데 여섯이 겨우 눈에 맞아서 아프다고 난리칠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이게 진짜 전쟁이었다면 위고는 목표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이미 군대의 오분지 일을 희생시킨 졸장 중의 졸장이었겠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의 방어선은 단단하다.
적의 무기(?)도 우리 것보다 우월하다.
위고는 사관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떠올렸다.
- 적이 유리한 고지를 점거하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 우회 아니면 돌격이지. 두 가지를 같이 쓰는 게 가장 효율적이고.
- 그러나 적이 요충지에 있다면 우회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돌격도 아군의 희생을 너무나도 많이 요구하구요.
- 그래서 기병대가 있는 거 아니겠나. 기병대의 우월한 기동력으로 적을 우회하고 모루인 보병으로 하여금 협공하는 것이지.
그러나 이곳에 기병대는 없다. 기껏해야 달리기 좀 빠른 알보병들이지.
“기껏 배웠는데 그걸 써먹을 수도 없다니.”
위고의 눈에는 다시 깃발을 향해 달려나가는 스무 명의 인영이 어렸다.
***
“저기! 저 놈 위고 맞지?”
맨 앞 선두를 맡은 생도가 조용히 말하자마자 나는 허리를 숙인 채 쫄래쫄래선두 옆으로 이동해, 선두가 가리키는 방향을 지긋이 살펴보았다.
“맞네.”
이 재수 없는 새끼 드디어 복수할 때가 왔구만.
우리 특공대는 학교를 빙 돌아서 파리파의 엉덩이 부분에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가 달려 나가기만 하면 저 파리파 놈들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흔들어대기 충분한 위치였다.
“기욤, 어떻게 할까. 지금도 충분히 우리가 이길 만 한 것 같은데.”
선두를 맡았던 생도가 날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안돼. 작전은 작전이야.”
“쩝. 알겠어.”
아직 3시 37분, 작전 시간까지는 3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 작전은 3시 40분에 실행할끼다.
- 왜 하필 그때야?
- 우리 아들이 점마들 첫 공세를 버텨준다면 대략 30분 정도 끌어볼 수 있을 기다. 하모, 점마들이 다시 들어 올라카믄 한 10분은 있어야 되지 않캈나? 점마들이 다시 우리 수비대에 머리를 들이박을라꼬 점마들 기지에서 나오는 순간이 우리가 공격할 시간이 될끼다.
음, 역시 후에 불세출의 명장이 될 남자인가? 군재는 원래 타고나는 건가? 나 폴레옹 형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질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다시 초조하게 거리에 달려 있는 시계를 보며 때를 기다렸다.
“어? 기욤! 저거 봐!”
“어!? 이거···.”
선두가 소리치며 가리키는 방향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자, 스무 명이 넘는 파리파가 다시 우리 기지 쪽으로 달려 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공격의 때가 왔다.
“와아아아!”
“깃발! 깃발을 노려!”
“마! 개쉐이들아! 나 나폴레옹 꽁무니만 따라오라카이!”
“···이게 무슨.”
파리파가 다시 적의 깃발을 뺏으러 달려 나간 지 삼분정도 지나자 우리는 파리파의 기지 뒤와 옆에서 물밀 듯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3시 방향에서는 나폴레옹 형이 수 명과 함께 달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우악! 우아악! 우악!”
“햣하! 받아라!”
물론 우리들이 달려 나오면서 바구니에 담긴 눈뭉치를 마구 던져댄 건 덤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눈뭉치에 얻어맞고 쓰러진 파리파에게 계속 눈을 던져댔다.
내가 놈들이 구축한 방어선 위로 올라가자, 놈들이 꽂아놓은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있는 힘껏 달려 깃발을 뽑아들고 외쳤다.
“우리가 이겼드아아아아아!”
평등 군단의 위대한 승리였다.
***
우리가 뽑아든 파리파의 깃발을 어깨에 짊어진 채 당당하게 걸어 우리 기지로 걸어가자, 우리의 깃발 코앞까지 올라간 파리파는 넋을 잃은 채 터덜터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위고 드 라의 표정이 제일 가관이었지.
위고는 우리가 빼앗아간 자기들 깃발을 본 순간부터 시종일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털레털레 자기네 집으로 걸어갔다.
아마 ‘파리파의 행동대장’ 위고는 앞으로 없겠지.
친구들의 명예까지 촌놈들한테 박살나게 만든 사람이 어떻게 행동대장처럼 굴겠나.
위고는 이제 졸업할 때까지 조용히 살아야만 할 거다.
우리 평등 군단은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평등 군단 만세!”
“파리 새끼들 얼굴 봤어? 낄낄.”
“아 힘들다 오늘 저녁은 간단하게 먹고 바로 누워서 자야지. 헤헤”
그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은, 아 물론 고집은 좀 있는 마티유 형도 기분이 좋은 지 우리 하숙집으로 가는 길 내내 콧노래가 끊이질 않았다.
드디어 자기들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콧대 높은 파리 깍쟁이들한테 한 방 먹여줬다는 게, 그동안 소수로서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굉장히 큰 기쁨이었다.
한 사람만 빼고.
나폴레옹 저 양반, 아까까지만 해도 날 따르라니 뭐니 소리지르던 활발한 양반이 다른 사람들이 콧노래 부르고 만세 삼창을 하는 도중에도 묵묵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흠. 동생 된 도리로서 불편하구만 그래.
“형 왜 그래?”
“아무것도 아이다. 일 봐라.”
나폴레옹 형은 내 말에도 괜찮다는 듯 손사레를 치더니 다시 벽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뭐, 사람들 모두 내면에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근심거리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으니까. 나폴레옹 형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나는 플뤼에 부인이 만들어준 ‘승전 기념 쿠키’를 입에 베어 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형의 근심거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 건 다음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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