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투 (2)
“···그래가꼬, 그 재수 없는 얼라랑 칼질 대신 눈싸움을 한다꼬?”
“···어.”
“니 똘개이가?”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해? 그 놈이랑 나랑 머리 반개는 차이 나는데, 형은 이불쌍한 동생이 아무것도 못하고 칼에 썰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야?”
“하모, 한번쯤은 요단강 앞까지 가보는 것도 좋은 경험 아이가? 하데스 같은 양반 한번 만나보모, 니도 으른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지 않캈나?”
와. 이 양반 지금 내가 지가 쓴 개떡 같은 소설 요즘 안 읽어 줬다고 돌려 까는 거야?
증말 치졸하다. 치졸해.
이게 21세기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위인 중 하나인 영웅 나폴레옹이 맞냐?
진짜 나폴레옹은 전설이다. 가슴이 아주 웅장해지는구만. 어떻게 이런 쫌생이가 나폴레옹이지?
“그르즈믈그···. 즘··· 도와주시죠···.”
“흠···.”
내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형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잠깐. 저 눈빛.
무언가를 절실하게 원하는 눈빛이구만.
저 양반이 뭘 원하는 거지? 대가리에 학교랑 군대랑 먹을 거만 들어있는 사람인데 말이야. 기껏해야 소설?
···어.
에이 설마.
그 정도로 속이 좁아터진 사람이겠어?
“···주면 되잖아···.”
“응? 머라꼬요? 잘 안 들리는데예?”
“읽어주면 되잖아! 읽어주면!”
“하모, 우리 친한 동생이 내를 그리 찾는데 부름에 응답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제.”
내 말이 끝나자 나폴레옹 형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진짜 더러워서 참는다. 더러워서.
와 증말, 한두 살 먹은 초딩도 아니고 열여섯이나 먹은 사람이 이렇게 나온다고?
사실 영웅 나폴레옹은 프랑스 정부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아닐까?
내 앞에 있는 건 아무리 봐도 그냥 성격 더러운 동명이인인거 같은데.
“내가 근데 뭘 어떻게 도와줘야 카나?”
“일단 날 전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는 거 맞지?”
“···어? 뭐, 그르제?”
“형 예전에 지휘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제. 아, 그라모, 내가 그 서른 명 지휘하는 기가? 내는 좋제.”
나폴레옹 형은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그런데 손님.
계약서에 도장은 제대로 들어보고 찍으셔야죠. 아 이걸 그냥 찍어버리시네.
아이고 불쌍하셔라.
“아, 한 가지 더 있어.”
“엉? 먼데?”
“이제 나가서 열네 명만 명 모집해 오면 돼.”
“···?”
“뭐해? 안 나가고.”
“마! 그건 몬 들었다 아이가!”
나폴레옹 형은 잠시 눈을 꿈뻑이다가 이내 상기된 표정으로 외쳤다.
아니 근데 우리 손님 왜 화내시지?
그러니까 계약서 약관 밑에 조그만 회색글씨도 잘 읽으셨어야죠. 도장 다 찍어놓으시고 왜 화냄?
“낄낄낄. 그러니까 조건을 다 들어보고 결정하셨어야지. 애초에 내가 이름 알고 있는 생도도 몇 명 없는데, 어떻게 30명을 다 뽑았다고 생각하셨을까? 아, 설마 ‘명예로운’ 사관생도가 한입으로 두말하는 건 아니지? 그래도 나머지 열네 명은 내가 찾아올게.”
“갸아아악!”
이 세상에서 제일 귀찮고 어려운 게 사람 모으는 거다.
물론 서너 명 정도라면 꾸역꾸역 데리고 오겠지만, 서른 명, 그것도 생판 남인 수준의 사람 서른 명을 데려온다?
게다가 불러서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공짜로 일시키는 거나 다름없는데 누가 순순히 와주겠나?
육군 병장 만기제대를 겪은 입장에서 이런 일은 무조건 짬 때리는 게 최고다.
“역시 나폴레옹 형이야~. 믿고 있었다구 젠-장! 그럼 수고하십쇼~.”
“···.”
어휴 시원해. 이게 짬 때리기지.
어? 근데 저 양반 왜 자리에서 일어나?
나폴레옹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붕붕 돌리며 내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쾅쾅쾅!
“여기가 기욤 드 툴롱의 집 맞습니까!”
갑자기 들린 목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와 나폴레옹 형은 서로 잡고 있던 멱살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
“호외요! 호외! 흐억. 헉.”
“뭐야, 무슨 일인데? 뭔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헐레벌떡 하숙집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룸메이트를 보고, 마티유는 읽던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룸메이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냉수까지 한 사발 마신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위고 드 라. 학교에서 파리출신 생도들의 행동대장을 맡고 있는 재수 없는 놈이 오늘 기욤한테 결투를 신청했다.
어느 샌가 마티유만 듣고 있던 얘기는 하숙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와 듣기 시작하면서 거의 공개 성토자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파리 놈들이 기욤을 조져버리려고 한거지?”
“위고 그 재수 없는 새끼, 난 그 새끼가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어!”
“하! 언제쯤 돼야 그 깡패놀이가 끝날런지.”
어떤 생도는 침착하게, 어떤 생도는 분노로, 어떤 생도는 자조로 말을 이어나갔지만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생각은 같았다.
‘파리 놈들이 이번에는 도를 넘었다.’
기욤이 먼저 선빵을 갈긴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시비를 걸었으면서 이제는 고작 열네 살이 된 꼬마에게 열여섯, 열일곱 먹은 떡대들이 결투를 신청하다니.
소인배 파리 놈들이라지만 정말 비열하고 치졸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결투는 어떻게 됐는데···?”
마티유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이 소식을 가져온 룸메이트에게 물어보자, 자기 나름대로 파리 놈들의 부조리함을 얘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기욤 그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결투의 방식을 바꿨다나봐. 서로 몸을 상하게 하는 건 미래 프랑스 왕국의 큰 손해니 자제하고 대신 눈싸움으로 결투를 하자고 합의를 봤대.”
“뭐? 눈싸움?”
조용했던 분위기는 다시 시끄러워졌다.
눈싸움이라니. 무슨 다섯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나이 먹을 만큼 먹은 학생들이 눈싸움이라니. 그것도 결투를 눈싸움으로 한다고?
“그게 뭐야···?”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아니나 다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위고와 파리 놈들을 열띠게 비난하던 분위기가 냉랭해져버렸다.
“기욤이 옳은 판단을 했군.”
마티유가 냉랭해진 분위기에 맞지 않게 말했다.
“엥? 뭐가 옳다는 거야?”
“그러면 기욤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 한 개가 큰놈을 상대로 승산도 없는 결투를 해야 하나?”
“그건··· 아니지.”
“기욤은 적절한 선택을 한 거야. 그나저나 위고 그 녀석이 잘도 수락해줬군.”
“듣기로는 장교의 자질로 결투하자면서 사람들을 각자 모아서 모의 전투를 하자고 설득했다더라.”
“···허.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뜨겠구만. 그래도 대단하네.”
“그런데 기욤 그 녀석, 사람 모을 수 있긴 해? 걔 친구 없잖아.”
마티유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온 누군가의 말에 약간 온화해진 분위기는 다시 냉랭해지고 말았다.
“사람이 부족하면 뭐 어때? 까짓 거 우리가 가주면 되는 거 아냐?”
그 때 듣고 있던 생도 중 누군가 말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냉랭한 분위기를 깨고 곳곳에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냉랭해진 분위기가 다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난 그 파리 새끼들 처음부터 싫었어! 나도 가주지 뭐!”
“나도! 이참에 중앙 귀족이라고 나머지 싹 다 무시하는 콧대 높은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주자고!”
“기욤 그 녀석 촌놈 주제에 잘나가니까 파리 놈들이 시비 거는 거 봐! 같은 촌놈인 우리가 안 지켜주면 누가 지켜주겠어?”
“와아아! 죽이자! 죽이자!”
어느 샌가 하숙집은 극악무도한 마왕을 무찌르러 가는 용사들의 출정식 비스무리한 게 되버렸다.
“이건 뭐 십자군도 아니고···.”
마티유는 낮게 읊조렸다.
“그래도 나쁘진 않은데?”
마티유의 말에 이 소식을 가져온 룸메이트가 대꾸했다.
“그러게 나쁘지 않네.”
마티유의 얼굴은 웃음이 만개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지방과 평민 생도들의 구심점이 된 기욤. 그것이 마티유는 그리 싫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파리 놈들한테 한방 먹여줄 생각에 몸이 근질거릴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