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돈장난 (9/341)

돈장난

“나 원 참, 대체 무슨 생각인지...”

샤를 드 툴롱은 손에 쥔 편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셋째 아들이자 장차 툴롱 가를 이끌 재목인 기욤이 보낸 편지가 생뚱맞은 내용으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이다.

[가주님께,

강녕하신지요? 저는 이곳에서 나름 잘 지내고 있답니다.

(중략)

다름이 아니오라, 5,000 리브르를 조속히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봉된 계약서에 상세한 이유를 적어놓았으니 자세히 읽어주세요. 기욤 올림.]

동봉된 계약서의 내용은 대단히 이상한 내용이었다.

소싯적 툴롱 항만장 대리로서 많은 돈을 만져보고 또, 그런 돈의 흐름을 나름잘 안다고 자부하는 샤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가득했다.

회사를 만들겠다.

근데 세 개정도 만들 거다.

사장 명의도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다.

그런데 실제로 일 하는 사장은 한 명이다.

왜 그렇게 하냐고?

자본금을 늘려야하니까! 상공회의소에서 대출 받으려면 어쩔 수 없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다 때 되면 알게 될 거다.

“도통 모르겠군... 그나저나 오천 리브르라니, 동네 구멍가게를 만들 것치곤 꽤 되는 걸.”

5천 리브르.

바꿔 말하면 10만 수.

숙련 노동자 한명이 일급으로 20 수를 받는 프랑스에서 그 정도 돈은 상당한 거액에 해당되는 수준이다.

만약 샤를의 영지가 포도 사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는 곳이 아니었다면 귀족일지라도 선뜻 내줄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샤를은 기욤을 믿었다.

아이가 파리로 떠난 지 6개월 간 자신이 받아 본 성적표는 모두 최고점에, 서자로 태어나 불평 한마디는 할 수도 있으련만 곧 14살이 되는 지금까지도 한번도 궁색한 말없이 큰 아이다.

‘좋아. 실패하던 성공하던 네가 무언가를 배운다면 못 내줄 것도 없지.’

“알랭! 게 있는가?”

“예, 주인님 무언가 하명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내 이름으로 기욤에게 어음 하나만 보내주게. 액수는 5천 리브르로.”

그렇게 말하며 샤를은 기욤이 보낸 계약서에 자신의 사인을 써넣었다.

***

20xx년 5월.

추운 겨울이 완전히 물러나고 파릇파릇한 풀향기를 뽐내는 봄이 온 세상은 여유로움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OO대학교의 캠퍼스는 곧 다가올 중간고사로 신음하고 있는 학생들의 비명으로 인해 아비규환이 되어있었다.

- 교수님들은 분명 악마가 분명해. 어떻게 시험 직전에 레포트를 10장이나 써오라는 거야!?

- 틀림없어, 이건 우리 학생들을 과로사 시키려는 사악한 교수들의 음모가 분명해!

- 교수타도! 발표철폐! 학점주권을 되찾자!

- 으아아악 내가 이런다고 대학원에 순순히 갈성싶더냐! 놔라! 놔라! 으아악!

곳곳에 펼쳐지는 시험기간 전의 진풍경과 교수들의 철권통치에 흉흉해진 분위기는 학기 초 만해도 꿈과 희망으로 초롱초롱했던 새내기 대학생들의 눈을 영혼 없는 좀비의 눈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때문에 이 날 경영학과 학장 김 모 교수는 이 생기 잃은 새내기들을 동정한 나머지, 자신이 맡은 경영학 수업 대신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리라 마음먹고 강단에 섰다.

“음, 여러분 오늘 수업은 없습니다. 대신 여러분이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내용의 이야기만 단순하게 해드리고 일찍 끝내드릴게요.”

“”“!!!!!”

“”“

“혹시 순환출자라고 들어보신 분?”

물론 김 모 교수의 이야기는 매우 길어져 당초 계획과는 다르게 쉬는 시간까지 이어졌지만.

이토록 정열적인 학생들을 외면하는 것은 교육자로서의 도리가 아니기에, 김교수는 오늘도 나태한 자신을 채찍질했다.

***

잠시 과거의 기억에 빠져있던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임기찬은 이미 죽었다. 지금 나는 기욤이지, OO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 아니다.

‘그래도 가르쳐주신 건 잘 써먹겠습니다. 교수님.’

순환출자.

유투브에 많이 나오는 ‘보석상이 얼마 손해인가’류 문제다.

어떻게 말하면 경영이나 경제 쪽에서 소위 말하는 ‘분식회계’의 기초적인 버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응? 그거 나쁜 거 아니냐고?

뭐, 너무 막 쓰면 나쁜 거 맞다! 물론 들어갈 돈이 남의 돈이라는 가정 하에.

A 기업은 돈이 있다. 100만원.

A 기업이 B 기업에 돈을 50만원 빌려주면서 회계장부에 ‘받아야할 빚 50만원’을 기록한다.

이제, B 기업이 C 기업에 돈을 30만원 빌려주면서 B 기업의 회계장부에 ‘받아 야할 빚 30만원’을 기록한다.

이제, C 기업은 A 기업에 돈을 10만원 빌려주면서 C 기업의 회계장부에 ‘받아 야할 빚 10만원’을 기록한다.

자, 이제 A 기업의 장부를 까보자.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돈 50만원.

B 기업에게 받아야할 빚 50만원

C 기업이 빌려준 빚 10만원.

시작할 때는 100만원이었던 돈이, 장부에는 110만원이 되었다.

“주식회사라면 주주총회에서 얻어맞고 쫓겨나겠지. 뭐, 그전에 국세청이 바보도 아니고 내버려둘 리도 없고.”

그렇지만 이곳은 18세기 프랑스다.

21세기 국세청과 금융감독원처럼 서슬 퍼런 눈빛으로 기업의 속살을 강제로 벗기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상공회의소 같은 상인들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만 이 시대수준의 회계 장난이나 알아차리지, 매운 맛을 넘어선 21세기 불닭볶음면 수준의 미치게 매운 회계 장난을 이 사람들이 알아차릴 리 만무하다.

애초에 상공회의소 아저씨들을 털어서 대출 받으려고 하는 건데 들킬 거면 시작도 안했지.

“으헤헿 크후헤헤.”

곧 14살짜리한테 휘둘릴 상공회의소 양반들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구만. 내가 프랑스의 J.P. 모건이자 조지 소로스다!

상공회의소의 대출 건은 쉽사리 해결됐다. 어떻게 보면 ‘너무’ 쉽사리 해결된 게 문제지.

- 자, 이름이···. ‘이삭의 민족’? 거, 가게이름이 정말 이게 맞습니까?

- 어디보자. 장부도 깨끗하고, 오? 자본금도 상당하군요. 7,800 리브르라···.

- 흠···. 좋습니다! 우리 상공회의소는 귀하에게 6,000 리브르를 대출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은행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돈을 꿔주는 곳이라기엔 좀··· 엉성하긴 하네.

설마 프랑스 얘네, 지들 국가 재정도 이런 식으로 검사하지는 않겠지?

하긴 뭐 내가 걔들이 어떻게 하는지 안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대출을 받아서 내 자본금은 이제 13,800 리브르가 되었다.

사업 부지를 살 돈도, 사람들을 고용할 돈도 충분하니 이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 할 시간이다.

크후헿음헤핳.

‘점마··· 요즘에 그 사업인가 머시긴가 한다꼬 할 때부터 눈이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

같이 따라온 나폴레옹의 생각이었다.

***

“씨발! 씨발! 씨발! 개씨발!”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건축양식인 바로크식으로 한껏 꾸며진 호화스러운 방 안.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남자는 고상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쌍욕을 걸쭉하게 내뱉고 있었다.

그것은 옆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쏟아내는 내면의 분노이자 체념,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프랑스 왕국의 재무총감 네케르는 너무나도 저주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첫 번째는 어마무시한 부를 축적하고도 국가재정은 나몰라라하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 방만을 넘어서 재해수준의 국가 경영을 한 선왕들인 루이 14세와 루이 15세가.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이.

개중 제일 저주스러운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왕과 몇몇 높으신 귀족들이 건네주는 ‘재무총감’이라는 감투에 홀려, 그것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고 단숨에 먹어치운 자신이, 그는 너무나도 저주스러웠다.

“젠장. 젠장. 젠장. 도대체 35억 리브르를 어디서 꺼내야 하는 거야!”

35억 리브르. 프랑스의 1년 예산이 약 1억 리브르니, 대략 35년 치의 프랑스국가 예산인 거금 중의 거금이었다.

그리고 그 거금 35억 리브르는, 프랑스가 현재 짊어지고 있는 ‘국가 채무’였다.

“젠장, 튀르고 그 영감탱이가 옳았어. 그 여우같은 영감이 때려치울 때 알아챘어야하는 건데...!”

네케르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이제는 생을 다한 그의 선임인 튀르고 재무총감은 1774년에 부임하여 프랑스의 국가 채무를 탕감하기 위한 여러 가지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프랑스 대부분의 부를 차지하고도 세금과 부역에서 자유로운 특권계층인 귀족과 성직자를 겨냥한 정책도 당연스럽게 그 중 섞여있었다.

그러니 프랑스의 부를 짊어지고 있는 귀족들과 성직자 나으리들이 보았을 때.

그런 튀르고의 행태가 얼마나 고까웠겠는가.

튀르고는 결국 2년 만에 명사회라는 귀족카르텔에 의해 쫓겨났다.

정확히는 자신이 스스로 물러난 것이지만,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튀르고 자신의 뜻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재무총감이라는 직위가 곧 독이 든 성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네케르는 그 성배가 너무나도 탐이 났다.

제네바 태생의 은행가 네케르는 모든 상업자들의 꿈인 재무총감 네 글자가 너무나도 갖고 싶었다.

그래서 가졌다.

그러나 그 찬란한 성배를 끝까지 들이키고 나자, 성배 안에 새겨져 있는 선명한 저주문을 네케르는 보고야 말았다.

‘국가 채무 15억 리브르.’

자신이 마신 것이 독이 든 성배수준이 아니라 선악과라는 것을 알게 된 네케르는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 기회는 있었다.

만약 1776년, 네케르가 부임했을 때만 하더라도 불필요한 예산을 긴축하고, 귀족과 성직자에게 진실로써 호소했다면 15억 리브르는 오늘날의 35억 리브르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케르는 숨겼다.

모든 돈의 흐름을 사람들에게서 숨겨, 마치 이 나라가 빚 없이 탄탄한 재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속였다.

그 덕에 사람들은 프랑스가 매년 1천만 리브르의 흑자를 보고 있는 줄 알았다.

사람들은 네케르를 칭송했다. 왕, 루이 16세도 네케르를 만고의 충신이라고 치켜세웠다.

- 역시 네케르 총감이오! 튀르고 그 정신이상자와는 궤가 다르오!

- 자네를 기용한 것이 내 최대의 치적 아니겠는가? 하하하!

오히려 매년 5천만 리브르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도 그저 속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재산을 털어 채무를 탕감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부유한 은행가인 그도, 국가 규모의 돈 앞에서는 한낱 개미에 불과했다.

결국 네케르의 거짓말은 9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 거짓말이 들통 난다면 발생할 후폭풍이 너무 두려워진 네케르로 하여금 그 사기극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9년 동안 15억의 리브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35억 리브르라는 ‘거품’을 만들어 냈다.

오늘도 네케르는 자신이 재무총감을 그만둘 때까지 이 ‘거품’이 터지지 않기를 빌며, 신에게 자비를 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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