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만남 (6/341)

만남

“자 오전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생도 여러분들 점심 맛있게 드시고수업은 오후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총원 차렷! 경례!”

질서정연한 어린 생도들의 경례에, 교관 또한 응답의 표시로 경례를 마친 뒤 천천히 교실을 나갔다.

“으아, 드디어 끝났네.”

“이봐. 폴, 오늘 점심 뭐 먹을지 정했어?”

“라파엘, 어제 내가 빌려줬던 책 어디 있어?”

“시끌벅적하네. 그래 이게 학교지.”

어제 밤을 어마어마한 고민 때문에 뜬눈으로 지 샌 바람에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나는 작게 읊조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학교의 분위기는 전생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하긴 18세기나 21세기나 학생들은 수학보다는 수다, 문학보다는 체육, 과학보다는 점심밥 메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스무리 한 건가.

그렇게 생각에 푹 빠져 있는 나에게, 몇몇 생도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봐. 신입! 어디에서 왔어?”

몇 살 정도 됐으려나. 한 열다섯? 열여섯? 개중 제일 대장으로 보이는 생도가 나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나보다는 형이니 존댓말을 써야 되겠네.

“툴롱 근처 께헨느라는 곳에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호? 툴롱이면 그 마르세유 옆 항구도시 아닌가? 촌놈은 아니니 다행이군. 하하.”

호탕하다고 해야 하나, 예의를 밥 말아 처먹었다고 해야 하나.

초면에 촌놈이니 뭐니 하는 거 보니, 이 녀석···. 피에르와 조르주의 냄새가 난다.

싹수가 아아아주 노란 냄새 말이지.

“좋다! 어디 말똥 냄새나는 촌구석 밭고랑에서 뒹굴다온 촌놈도 아닌 것 같으니 서로 통성명이나 해볼까.”

이 ‘과도하게’ 호탕한 녀석이 내 책상위에 걸터앉으며 선심 쓰듯 말했다.

“내 이름은 위고 드 라. 파리 태생이다. 네 이름은?”

“기욤 드 툴롱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봐, 기욤.”

위고가 갑작스럽게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혹시... 부모님이 아니라 조부모님 손에서 자랐나? 말투가 아주 노친네들이랑 판박이네.”

“예?”

씁. 예의를 밥 말아 처먹었다고 해도, 가족을 건드리다니. 이건 좀 심하네, 이 친구.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위고는 다시 장난스런 얼굴로 말했다.

“에헤이, 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농담이지 농담! 그것보다 너무 예의 차리는 거 아니야?”

“아..예.”

쯧. 하필이면 양아치 새끼한테 잘못 걸렸구만. 사람 기분을 아주 잡치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으신 분이야.

“그나저나 점심 같이 먹을 사람은 있나? 없으면 우리랑 같이 먹자고 기욤!”

지금 이 새끼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병 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사람 기분을 바닥까지 긁어 놓으시고 참 감사한 제안을 해주시다니 이것 참 감사해서 몸둘바를 모르겠어.

혹시 사람이 언제쯤 화나는지 분석해서 기록하는 걸 취미로 삼고 계신가? 혼미하다 혼미해. 혼세마왕이 ‘혼란하다 혼란해!’하면서 뛰쳐나올 것만 같다.

“이 곳 맛집은 내가 다 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분명 네 고향 요리보다 훨씬 맛있을 거야. 지방이 아무리 수준이 높아봤자 파리에는 안될 게 뻔하니까 말이지. 하하”

아. 넌 정말 진짜 중에 진짜구나?

이 새끼 머릿속에는 프랑스가 파리말고는 다 시골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아주 착각에 빠져 계시는군.

착각을 깨는 데는 충격요법만한 게 없지 암. 아암. 그렇고말고.

이건 내가 빡쳐서 말하는 게 아니다. 순수하게 저 어리석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계도하는 것 뿐.

“니들끼리 처먹어, 씨발새끼들아.”

첫날에 혼밥 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

***

세르주는 마차를 하루를 꼬박 달려 파리로부터 90km 떨어진 북서부 샤르트르에 도착했다.

파리가 북적이는 맛이 있었다면 샤르트르는 좀 더 진중하고 목가적인 분위기의 도시였는데, 아마 도심 중앙에 그 성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샤르트르대성당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더 심화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런 목가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세르주는 매우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는 기욤이 던진 그 ‘악마’스러운 말이 맴돌고 있었다.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르주는 계단을 오르는 발을 더 빠르고 힘차게 재촉할 뿐이었다.

마침내 그가 샤르트르 교구장실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잠시 그 ‘무서운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세르주? 네가 웬일이냐?”

“형제님, 아니 형님. 형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후배의 방문과 말에, 교구장 엠마뉘엘 조셉 시에예스는 읽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

“기욤 드 툴롱. 아직 13살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던가?”

저물어가는 태양에 의해 붉게 물든 노을을 보며 시에예스는 손에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벌써 한 병을 다 비웠지만 평소와 다르게 취기가 전혀 올라오지를 않았다.

한 시간 전 저녁식사를 마치고 떠난 세르주가 전한 말 때문이었다.

그래, 후배 놈이 오랜만에 와서 한다는 말이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니 당최 취하고 싶어도 취할 수가 없었다.

- 형님. 그 녀석이 그럽디다. 작금의 프랑스가 돌아가는 모양세가 정상이냐고요. 온 밭이 황금색으로 가득 찼는데 사람이 굶어죽는 게, 사람들이 아등바등 노력해도 먹고 살기 힘든 게 정상이냐고 물어봅디다.

- 확실히···. 옳은 일이라고는 볼 수 없지.

- 그리고···. 사람들 눈에 체념과 죽음이 가득하다고 그러더군요.

- 음···.

-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파리가 다르게 보이더군요. 저는 이제 파리가 북적이고 소음으로 가득 찬 도시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자 발버둥 치는 비명으로 가득 찬 도시로 보입니다. 게다가 그 녀석이 뭐라고 덧붙이던지···.

- 왜? 뭐라고 그러던가?

-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신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 세르주!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게!

- 아무튼···. 형님이시라면 지금 프랑스가 아이가 말하는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형세인지. 아니면 그저 기우인지 확실하게 아실 거라 믿기 때문에 여기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벨라도나의 비밀도 밝히신 형님 아닙니까.

- 야! 그 얘기는 다시는 하지 말랬지!

- 으하하핫. 역시···제 나이도, 형님 나이도, 파리도 달라졌지만 형님 골려먹는 재미는 여전하군요. 그래도 한 가지는 안 변했습니다 그려.

- 끄응···.

- 그래서···. 그 아이의 말을,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에예스는 그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까···. 형님 또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후, 미래가 두렵군요.

그 말을 남기고 세르주는 다시 마차를 타고 떠나갔다. 시에예스에게 커다란 폭탄을 던져놓고서.

“젠장, 이런 고민거리를 던져놓고 가다니. 오늘 잠은 다 잤군. 다음에 만나면 볼기짝을 때려 줄 테다.”

시에예스는 괘씸한 후배 세르주를 생각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서로 얽히고설키고 있었다.

가득 쌓인 귀족의 곳간과 텅텅 빈 농민의 위, 유랑여행을 떠나는 귀족과 하루 4시간을 자면서 일해도 풀칠하기 힘든 노동자, 그리고 시에예스가 이 곳 샤르트르의 교구장으로 근무하면서 본, 신분 간의 불평등으로 인한 수많은 불화.

이 모든 것이 지금 시에예스에게는 거대한 화약고처럼 보였다.

누군가 실수로라도, 일부러라도 자그마한 불씨를 떨어뜨린다면 모든 것이 잿더미로 화할 만큼의 화약이 쌓인 화약고 말이다.

문제는 불씨가 떨어지는 타이밍. 당장 내일도, 모레도, 내년도 될 수 있었다.

“만약, 만약 불씨가 화약에 닿는다면.”

한두 명의 죽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불러야하는가. 정변? 쿠데타? 아니다. 혁명? 그래 ‘혁명’, 혁명이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커다란 불이 될 혁명이다.

그 불은 절대 꺼지지 않으리라.

귀족, 성직자, 평민, 심지어···. 왕까지 삼킬 것이 분명하다.

눈앞의 아름다운 석양이, 시에예스에게는 마치 그 ‘혁명’의 불길로 보였다.

***

지역차별주의자 및 패드리퍼 새끼에게 욕을 박은 뒤, 기욤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 하, 역시 파리 출신이 아닌 귀족은 교양이 없다니까.

단순한 비웃음부터

- 쟤가 걔야? 위고한테 쌍욕 박은 놈?

호기심

- 보아하니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곧 그만두고 울면서 집에 돌아가겠군. 쯧쯧

안타까움인지 뭔지 모를 시선까지

나는 모든 이의 시선을 한 눈에 받고 있었다. 그리고 13년간의 ‘을’로써의 삶을 산 나의 생존본능은 이에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병신아! 걍 숙이고 들어갔어야지. 여기 있는 새끼들 나중에 다 고급 장교가 될 텐데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

‘아니 그래도 패드립은 좀 아니지. 씨발새끼가 깝치고 있어.’

어···. 경종만 울리는 건 아닌가?

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한다? 도저히 돌파구가 보이질 않는구만.

하긴 지방에서 홀로 올라온 기반도 없는 13살짜리 꼬맹이가 일진 비스무리한 놈들한테 찍힌 걸 도와줄 사람은 없지.

그러면 답은 하나뿐이군.

‘같은 아싸를 찾아서 무리를 만드는 수밖에.’

유유상종은 모든 생물군에 해당하는 말 아니던가.

아무리 여기서 아싸들이라지만 밖에 나가면 모두 도련님 소리 듣는 귀족자제들이다.

저기 저 일진 비스무리한 교양 없는 새끼들한테 굽실거릴 수는 없으니, 나도 나름대로 내 세력을 구축해야겠지.

그리고 내 눈에는 아까 점심시간부터 홀로 책만 읽던 백면서생이 보였다.

위고 쪽 놈들이 말로 툭툭 건드는 것 보니 저쪽도 분명 이쪽이랑 비슷한 상황일터. 내가 가서 말을 걸어도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가까이 가자 그 녀석의 얼굴과 체격이 확연히 들어온다. 음, 얼굴은 좀 곱상하게 생겼네.

근데 키가 좀 작네.

“큼큼. 그, 안녕하세요?”

“?”

우리의 잘생긴 땅딸보 씨는 내가 말을 걸자 ‘이 새끼 뭐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우 어색해. 이럴 때는 속사포로 말 할 틈을 주면 안 된다.

“전 게헨느에서 온 기욤 드 툴롱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

우리 땅딸보 씨는 내가 건넨 인사와 손이 맘에 안 들었나보다.

보통 이렇게 나오면 뭐라고 말이라도 해주는데 그것도 안 해주는 걸 보니 에베르 뿐 만아니라 이쪽한테도 미운털이 박힌 걸까.

그렇게 수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백면서생씨가 일어서서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하모, 만나서 반갑심더. 내는 저어그 코르시카에서 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 카이.”

“예? 누구요?”

“못 들었심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 카이.”

오 씨발.

작가의말

나폴레옹은 현재 아직 성장기도 안 온 14세입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