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깨달은 위협 (5/341)

깨달은 위협

세르주는 행복했다.

지금은 교황보다도 자신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평소에는 주교와 사제라는 위신 때문에 하지 못한 것, 먹지 못한 것, 사지 못한 것을 그는 지금, ‘13살 꼬마의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하고 다닐 수가 있었다.

- 어···. 사제님께서 이런 길거리 음식을 드셔도 됩니까?

하고 물어보는 노점상에게는

- 난 별로 먹고 싶지 않으나 이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군. 하하. 두 개만 주시게.

- 네? 두 개요? 귀공자 분이 드신다면 하나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 이 아이가 워낙 대식가여서 말이지. ‘그냥’ 두 개 주시게. 하하하.

라고 대답하고

- 어···. 사제님께서 이런 잡스러운 가게에 들어오셔도 됩니까?

하고 물어보는 기념품 가게에서는

- 난 별로 갖고 싶지 않으나 이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군. 하하. 두 개만 주시게.

- 네? 두 개요? 귀공자 분만이라면 하나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 이 아이가 워낙 수집광이여서 말이지. ‘그냥’ 두 개 주시게. 하하하.

라고 대답하고

- 어···. 사제님. 여행 중이라고 하셨는데 성찬용 포도주가 왜 필요하십니까?

하고 물어보는 와인 상인에게는

- 난 별로 필요하지 않으나 이 아이가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군. 하하. 두 병만 주시게.

- 네? 귀공자분이 이걸 마셔요?

- 이 아이가 워낙 일찍부터 술을 배워서 말이지. ‘그냥’ 두 병 주시게. 으하하핫!

세르주는 행복했다.

***

삽시간에 대식가, 수집광 및 조기 알콜 중독자가 되버린 나는 이 아저씨가 내 파리 행에 따라온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 사람.

내가 위험할까봐 따라온다더니 아주 날 방패로 삼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하고 다니고 있어.

저저 입 찢어지는 거 보라지. 좀 더 찢어지면 아주 조커가 되겠어.

뭐 그건 그거고. 이 사제님,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자기가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두 개씩은 사서 꼭 나에게 하나는 가져가라고 하는 거 보니 말이다.

같이 수 일간 부대끼며 지내서 그런가, 세르주는 더 이상 딱딱한 사제가 아니라 싱글벙글 낙천적인 동네 마음 좋은 아저씨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물론 졸지에 날 알콜 중독자로 만들어버린 건 제외하고 말이지. 아직도 날 바라보던 와인 상인의 눈빛이 잊혀지지가 않는단 말이야.

- 저런 못써먹을 꼬맹이 같으니, 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되려고 이잉..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지. 그러고 보니 그 적대적인 눈빛을 보니 마침 생각나는 게 있다.

‘프랑스 이 나라, 대체 어떻게 아직까지 안 망한 거지?’

게헨느에서 파리까지 오늘 길에,

마르세유, 아비뇽, 발랑스, 리옹 등 수많은 도시와 시골마을을 지나는 길에,

나는 적대적인 눈빛을 넘어 마치 가증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들과 마주했다.

그 시선의 대부분은 햇빛에 탄 구릿빛 피부와 농삿일로 단련된 잔근육을 가진 소작농들이었다.

생기 잃은 그들의 죽은 눈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는 내가 탄 마차에 닿자 마치 가솔린이 가득 찬 배럴에 불씨를 넣은 듯 활활 타올랐다.

그들의 눈빛은 너무나도 뜨거웠다. 마치 눈앞의 귀족을 남김없이 태워버리고 말겠다는 듯.

그들을 보며 나는 게헨느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헨느의 농지는 대부분 포도밭이었다. 한 여름이 되면, 온 동산이 향긋하고 달달한 포도 내음으로 가득 찼다.

포도주를 식사에 항상 곁들이는 프랑스의 식생활은, 타 영지에 비해 적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게헨느로 하여금 그 덕분에 포도의 이익이 극대화되게 만들어주었고, 귀족이니 평민이니 할 것 없이 모두 어느 정도 편안한 삶을 영유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저택을 나서서 길가를 걷다보면 모자를 벗고 환하게 인사해주는 농부들, 강가에서 빨래를 하며 담소를 나누던 아낙네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그것이 게헨느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게헨느의 일상은 밖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곳곳에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이 보였으며 농부들은 눈에 생기가 사라진지 오래인 듯 했으며,

신나서 추수를 할 시기에 농부들이 그저 밭고랑에 앉아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잘못 되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욤의 의문은 여정 중 만난 한 귀족의 말로 곧 해결되었다.

- 평민들? 아랫것들에게까지 신경을 쓰다니 마음 씀씀이가 넓구나, 꼬마 친구. 그런 놈들은 우리처럼 고상하지를 못해서 그렇단다. 성실히 일하고 일해서 많은 수확을 올릴수록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걸 모르는 아둔한 사람들이란다.

- 세금? 아 인두세, 대물세, 포도주세, 곡물세, 소금세, 소비세, 토지임대료, 시설임대료, 추수세, 담배세, 무보수 공공노역만 하면 된다네. 아 물론 나라에 내는 국세는 따로 또 내야하고 말이야.

- 아, 그러고 보니 곡물 가격도 좀 오르긴 했지.

- 얼마나 올랐냐고?

- 한 2배 정도 올랐을 거란다.

- 아 물론, 곡물을 파는 건 우리고 사는 건 저 자들이지. 껄껄.

“···씨발.”

이게 나라냐? 밥 가격이 두 배로 뛰었는데 내야하는 세금 종류가 몇 개라고?

어떻게 이런 나라가 굴러가고 있는 거지.

이 정도면 민란 한 번 일어나야하는 거 아닌가?

사탄을 불러와도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수준의 착취가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와! 프랑스 정말 대애애단해! 너무 대단해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다면 과장인가?

아니 절대 과장 아닌 거 같은데.

이러다가 반란이라도 나서 귀족들이 다 단두대에 눕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프랑스 혁명이 언제였지.”

프랑스 혁명, 압제에 억눌린 정의로운 시민들이 나서서 사탄 같은 귀족과 왕을 귀/족과 오/ㅤㅏㅇ으로 예쁘게 커팅해버린 희대의 사건.

전생에서 책에서 읽었을 때는 내심 통쾌했었지만 지금 나는 귀족으로 태어나 버렸다.

좆 됐다. 좆 됐어. 아주 신나서 탭댄스를 출 것만 같다.

지금 당장 혁명이 일어나도 딱히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를 깨닫자 내 피부가 쭈뼛쭈뼛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혁명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사람을 더 돌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사를 공부했던 게 수능 때니까 이 몸의 나이인 13년 하고도 3년 전에 봤던 연도표를 기억하고 싶어도 어렴풋이 느껴질 뿐, 정확한 정보를 기억할 수가 없다.

오늘일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고, 10년 뒤 일수도 있다.

분명한건

“1700년대가 지나가기 전에 터졌었단 말이지.”

내가 다른 건 다 까먹어도 나폴레옹은 안다.

불세출의 명장이자 독재자, 그리고 프랑스 민중의 해방자 나폴레옹

그가 1800년 초부터 왕성하게 활동했으니 분명 프랑스 혁명은 그 전이다.

올해가 1784년이니 시간이 경각에 달한 게 분명하네.

“이런 젠장...”

나는 또다시 아득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오랜만에 밟는 파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북적이는 것이 여전히 20여 년 전 자신이 대학을 다닐 때와 마찬가지였다.

다만 달라진 것은 자신의 나이와 옆에 어떻게 보면 ‘보호 중’이라고 할 수 있는 꼬마를 대동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디보자....아, 여기 있군요. 기욤 드 툴롱. 1771년 게헨느 출생. 맞습니까?”

데스크에 있는 한 부사관의 말에 세르주는 과거를 추억하던 것을 멈추고 현실로 돌아왔다.

“맞소.”

“입교 수속은 완료했습니다. 내일부터 학교로 나오시면 됩니다만 생도가 입을 제복은 치수를 맞추고 재단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모레 오후쯤 해서 받아 가셔야 합니다.”

“알겠소이다. 그대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있기를, 아멘.”

“아멘.”

하사관은 그렇게 말하며 세르주의 손에 입학증명서를 직접 쥐어주었다.

그 손이 군인임을 감안해도 무척 억세고 거칠어 세르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손이, 무척 거치십니다.”

“하하. ‘사제님도 아니고’ 저 같은 일개 부사관이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있나요. 월급으로는 가족 먹여 살리기가 힘드니 막노동이라도 해야 하더군요.”

눈앞에 있는 사제의 뼈를 찌르는 하사관의 말에, 세르주는 그저 묵주를 올려 인사를 하고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평소였다면 불쾌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 오전, 파리 외곽의 바스티유 요새를 지날 때 기욤이 꺼낸 이야기 때문에, 세르주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던 것이다.

- 주교님. 주교님은 이 분위기가 안 느껴지십니까?

- 응? 기욤 군, 무슨 분위기를 말하는 겐가?

- 사람들이 모두, 악에 받혀있다는 분위기 말입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긴가 민가 했는데 파리에 들어오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일반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 기욤 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식이라네. 신분의 차이로 말미암아 상대에게 악한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안 좋은 일이야.

- 애초에 신분이라는 것,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있지도 않던 것이잖습니까. 신분을 보고 선입견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 총기는커녕 생기조차 보이질 않는 현실이 정녕 주교님은 모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 무슨 소리하는 건가! 기욤 군, 어떻게 보면 자네의 보호자 된 입장으로서도 방금 언행은 단속해아만 하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는 말을 하지 말ㄱ···.

- 그러면 농부가 세금이 아까워 곡물을 추수하지 않고, 사람들이 먹고 살기에도 힘든 게 정상입니까?

- ···.

- 만일 저들이 가지고 있는 체념이, 어느 날엔가 분노로 치환된다면.

“누가 화를 당하게 될 것 같습니까-라.”

하숙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기욤을 향해 가는 마차 안에서 세르주는 계속해서 뇌까렸다.

저 아이가 정녕 13세 살의 나이가 맞는가?

저 아이는 사실 사탄이 보낸 악마 아닐까?

평균을 상회해도 너무 상회하는 아이의 말에 그보다 거의 세배의 나이를 먹은 35살의 세르주 주교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마차가 하숙집에 도착할 무렵, 파리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바뀐것은 자신의 나이 뿐이라고 자조하던 세르주는, 사실 파리도 바뀌었음을 자신도 모르게 깨닫고 말았다.

세르주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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