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크빅 선생님
“피에르, 조르주. 오늘 사냥에 같이 따라 오거라. 막내는 집에서 기다리고.”
“예 아버지.”
“예 아버지.”
“예 가주님.”
샤를은 손질이 끝난 사냥용 총을 알랭에게 건네주며 아들들에게 말했다.
곧 샤를은 말들의 몸이 잘 풀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알랭과 말을 타고 잠시 주변을 산책하고 오겠노라 말한 뒤 저택을 나섰다.
“역시 고상한 툴롱 가의 사냥에, 급에 안 맞는 튀기는 데려가지 않는 게 맞지. 하하”
“그렇죠 형님. 역시 아버지의 혜안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시야에 사라지자마자 피에르와 조르주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날 씹어돌리기 시작했다.
음, 오늘은 아침부터 상쾌한 조리돌림이라니 하루가 참 길겠어.
아무튼 내가 이 저택을 뜰 때까지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으려면 그저 묵묵히 참아야지 별수 있겠나.
원래 참는 자에게 복이 오고,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은 면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미 세 번은 넘게 참아서 저 놈들을 때려죽여도 염라대왕이 ‘너 무죄’라고 말해줄 것 같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내 안의 반야심경을 써나가고 있자, 어느 새 말들의 몸을 푼 아버지와 알랭이 들어와 두 애새끼를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혼자 남아 뭘 해야 시간을 잘 때웠다고 소문이 날까 하면서 내가 잠시 머리를 굴리고 있던 때.
누군가 저택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게헨느 영지의 주교인 세르주 뒤랑은 영주인 샤를의 부탁을 받고 그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영주라고 해도 바쁜 주교를 오라 가라 하다니 너무하는군 그래.”
주교가 지역의 사제들을 아우르며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런 것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지역의 주교나 하는 일이지, 게헨느 같은 코딱지만한 지역의 주교는 하루 종일 예배실에서 혼자 고무줄놀이나 하는 게 일상이었다.
때문에 그의 입은 샤를에게 불평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따분한 예배실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는 것에 대해 상당히 흡족해하고 있었다.
‘막내아들이 영특한 것 같은데 한번 봐 달라니.’
어제 밤 샤를의 저택에서 온 심부름꾼이 전해준 편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주교는 곰곰이 생각했다.
편지의 내용은 자질구레한 내용을 치우면 간단한 내용뿐이었는데 그 ‘내용’이 평소 반듯하고 진중한 샤를이 할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르주 뒤랑 주교님께.
우리 막내아들의 영특함을 한 번 시험해 주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오시는 김에 내 창고에 있는 포도주를 몇 병 가져가셔도 되니, 한 번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영지에 주교님 외에 명석하고 통찰력 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우니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만약 오신다면 되도록 내일 정오로 부탁드립니다.
샤를 드 툴롱 올림.]
“자기 자랑은커녕 의무와 명예만 찾던 딱딱한 샤를이 썼다기에는 아주 감정적이란 말이야. 듣자하니 막내가 이제 겨우 13살이라던데.”
여느 부모처럼 자기 자식이 똑똑했으면 하는 샤를의 바램이라고 단순히 여기며, 세르주는 이내 샤를 씨의 막내아들의 생각보다 샤를의 창고에서 어떤 와인을 꺼내갈지 생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
“오늘 수확이 아주 좋습니다. 주인님.”
“알랭 자네가 사냥감을 잘 몰아준 덕분이지. 피에르, 조르주 너희 둘도 오늘 사냥 하는 법을 배웠으니 나중에 너희들끼리도 한번 해보려무나.”
“예 아버지!”
“네!”
오전에 사냥을 나간 네 사람은 저물어가는 석양을 등에 짊어진 채 사슴 두 마리를 가지고 저택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러나 저택의 분위기는 오전에 출발할 때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예를 들어 정원에서 뭔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왔다갔다하는 사제복을 입은 남자라던지.
“세르주 주교님? 일이 아직 안 끝났나요? 아니면 가져가시기로 한 와인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샤를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에서 내리며 사제에게 말했다.
“샤를 씨!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할 말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사제복을 입은 남자는 샤를의 뒤에 말을 타고 있는 두 사람, 피에르와 조르주를 보더니 샤를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보는 눈이 많군요. 둘이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서재로 가시지요. 알랭! 뒷정리는 자네가 맡아서 해주게나. 피에르, 조르주 피곤할 텐데 각자 방에 들어가서 쉬거라!”
두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을 내버려 둔 채 빠른 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덩그러니 남겨진 피에르와 조르주는 어리둥절하며 방으로 향했다.
***
“저 아이, 당신 막내아들 말입니다. 대체 정체가 뭡니까?”
“···이해가 안 가오만, 대체 무슨 말인지?”
“어떻게 된 게 13살짜리가 문학, 수사학, 상업, 역사까지 모두 꿰고 있단 말입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오.”
“그래요. 내가 말한 건 아직 성인들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게 분명하긴 합디다. 그런데 그 통찰력과 사고의 수준은 보통 영특함이 아니오!”
샤를이 서재의 문을 닫자마자 펼쳐진 세르주의 속사포에 샤를은 어리둥절해하며 세르주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 낸 문제 몇 가지를 아이가 잘 풀 길래, 좀 철학적이고 어려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학문은 머리로 외우면 되지만 사고의 깊이는 단순한 암기와도 달라서, 아이가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되기 때문이오.”
“그런데요?”
“샤를 씨, 당신은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을 때라고 생각합니다만.”
“매우 이성적인 대답이군. 상식적이고.”
“그렇게 말해주시니 기분이 좋군요.”
“그리고 당신 아들이 당신보다 나은 것 같소.”
“예?”
***
이 사람은 대체 뭔데 아까부터 나한테 요상한 질문을 던져대는 걸까.
치렁치렁한 사제복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면서 갑자기 찾아와서는 나한테 씽크빅 문제 비스무리한걸 던지는데, 질문 몇 개를 잘 대답해 줬더니 혼자 또 죽을상이 돼서는 미간에 힘을 빡 주질 않나.
혹시 내가 한 말이 자기 딴에는 맘에 안 든 건가?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기욤 군. 혹시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 네?”
사람이 언제 죽냐고?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올린 건, 한국 옆 나라 만화가가 쓴 해적질 하는 만화였다.
그 뭐냐 그 눈 내리는 에피소드였는데 거기서 아마 돌팔이 의사가 독버섯 먹고 하던 말 아니었나?
음 그걸 말해도 될까? 이 사제 아저씨는 그 요상한 사슴 의사도 아닌데 말이지.
고심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사제 아저씨의 얼굴은 진지한 표정에서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꼬마 주제에 제법 머리를 굴리는구나 하고 귀엽게 봐주는 저 표정.
전생에서 대략 초등학교 졸업할 때 즈음부터 못 본 그 얼굴이다.
날 그렇게 좋게 봐주는데 뭐라도 말해드려야 되는 거 아닌가 싶다. 아 근데 ‘그걸’ 말해도 될까? 뭔가 남의 걸 훔치는 듯한 기분이라 떨떠름하단 말이야.
고민 되네 이거.
잠깐만. 그런데 그 만화 그린 작가, 분명 내가 죽을 때쯤에는 이상한 작화에 자기가 만든 모 캐릭터에 별 이상한 설정 붙이고 좀 추해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 이건 내 ‘조그마한 복수’다. 당신이 쓸 거, 내가 미리 좀 쓸게.
“역시 우리 꼬마 기욤에게는 조금 어려운 문제였ㄴ···.”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서 잊혀 졌을 때가 아닐까요?”
미래의 만화작가 양반. 미안해!
***
샤를은 평소 하던 대로 자신의 서재에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그의 머릿속과 심장은 흥분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때문에 타인이 보기에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과 묘하게 상기된 표정이 합쳐져 저 사람이 어딘가 아픈가 하고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한 시간 전 저녁식사 때만 해도 아들들이 자신에게 어디 편찮으신 곳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던가.
- 당신 아들은 천재요! 앞으로 우리 프랑스를 이끌어 나갈 인재가 분명하외다! 저 아이의 미래가 곧 이 저택의 위상이 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 일평생 툴롱 항구와 이 곳 게헨느 외에는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 아이가···. 13살이 맞지요?
- 예
- 아이가 말한 소르본 고등교육기관에 가기에는 너무 어립니다. 이건 성모께서도 굽어 살피실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 그러니?
- 육군학교에 보내십시오. 그곳은 기욤 군보다 어릴 때부터 입소하는 아이도 많으니 지금 보내도 상관없을 겝니다.
- 그렇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이 군인이 맞습니까?
- 군인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소르본에 갈 적정 나이가 될 때까지 체계적이고 격식 있는 교육을 받자 이거지요. 그리고 장교도 명예로운 귀족의 의무아닙니까. 길이야 나이가 차서 차차 결정하면 되는 일입니다!
- 일단···. 일단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저도 샤를 씨가 기욤 군을 공부시킨다면 제가 주교라는 지위로 할 수 있는 만큼 기욤 군을 밀어주겠습니다. 다만···.
- 다만?
- 앞으로 저희 성당 예배실로 와인이 정기적으로 도착한다는 가정 하에 말이죠.
- 하! 주교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와인으로 예배당을 채울 만큼 드리겠소.
주교와의 대화를 몇 번이고 되짚어보던 샤를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유일하게 대학을 경험해본 주교 세르주. 그가 공증한 인재인 기욤. 그리고 기욤이 앞으로 다닐 육군학교와 소르본에서 기욤과 연을 쌓을 미래의 고위관료들. 그 중심에 서 있을
기욤 드 ‘툴롱’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고 했던가.
그래서 쥐 죽은 듯이 살았다.
고향인 툴롱에서 형제들과 사촌들에 의해 숙청당한 뒤, 그가 어릴 적부터 쏘다니던 툴롱의 거리와 항만장 대리로 청춘을 불태운 툴롱 항구는 그에게 더 이상 쳐다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지금.
“어쩌면 이제 오를 수 있는 나무 일지도”
샤를은 새로운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열며 낮게 읊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