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
내가 아는 종교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대충 그 종교 대빵이 나와서 내가 산 삶에서 데이터를 뽑은 뒤에 그걸 조리돌림하고 자기 마음대로 천당인지 지옥인지 환생인지 결정한다고 말하곤 했다.
확실한건 난 대빵도 만난 적 없고, 여긴 천당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데다가.
아, 환생? 환생은 맞을 수도 있는데. 보통 환생은 미래로 보내주지 않나?
왜 하필 유럽의 중국 프랑스, 그것도 1700년대냐···.
“기욤 도련님, 또 혼자 뭘 그리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니 그냥 평소처럼 잡생각이요. 별로 신경 쓸 건 아니에요.”
내 상념은 우리 저택의 집사 알랭에 의해 흩어지고 말았다.
뭐랄까, 이··· ‘세계’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다시 태어난 난, 기욤 드 툴롱이라는 좀 사는 귀족 가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 덕택에 원 지구에서는 꿈도 못 꿀만한 저택에 하인에, 어떻게 보면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사람들이 보통 유럽의 귀족하면 떠올리는 그 우아하고 폼 나는 그런 생활 말이다.
물론 내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홀짝이는 저 ‘이복형들’만 없었다면 말이지.
“알랭, 그런 튀기 일일이 챙겨줄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니 조르주?”
항상 내게 먼저 시비를 걸어대는 맏형 피에르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피에르 형님 말이 맞습니다. 반쪽짜리 귀족을 그렇게 떠받들지 마세요, 알랭. 하하하!”
그에 맞춰, 차남 조르주가 맞장구를 쳤다.
튀기라. 튀기.
뭐, 맞는 말이긴 하지.
난 귀족이 아니라, 평민 출신 여자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소위 말하는 사생아, 허구한 날 사극이나 막장 드라마에서 나오는 ‘서자’가 바로 지금의 나. ‘기욤 드 툴롱’이다.
아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어머니를 어머니라고는 부를 수 있구나. 홍길동보다는 조금은 낫군 그래.
내가 도발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만 있자, 그 두 사람은 다시금 내 신경을 벅벅 긁어대기 시작했다.
“저 녀석도 주제를 아니까 저렇게 조용한 것 아니겠습니까. 알랭? 하하”
쯧.
새끼들, 내가 여기서 열 세 살이고 저번 생 합치면 서른여섯인데 머리에 피도안 마른 중삐리 새끼들이 날 헐뜯는 걸 보면 아주 기가 찬다. 기가 차.
역시 이 치-즈 냄새나는 땅에서 다시 태어났어도, 나는 유교탈레반의 나라 한국인의 정체성이 더 큰 것 같다.
그러나 13년 간 이 이골 맞은 곳에서 수련한 내 믿음직한 처세술은 저 보기도 싫은 면상들을 향해 강제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형님들이 맞습니다. 알랭,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피에르와 조르주는 입꼬리를 재수없게 올리며 웃어댔다.
저저 낄낄대는 꼬라지 좀 보라지.
중학생 나이 아니랄까봐 호르몬 때문에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으면 좀이 생기는 건가, 아니면 태생이 글러먹어서 저러는 건가?
역시 공자 맹자는 틀렸어. 무조건 순자의 성악설이 맞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게 맞다.
저 새끼들은 그중에서도 TOP고.
너무 비굴하다고?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비굴하지는 않았다. 3년 전 참다못해서 들이 받아 봤지.
결과는··· 좀 안 좋았지만.
***
- 이 씨발새끼가 아가리 뚫려있다고 말 좆같이 씨부리네?
- 뭐 뭐야? 이 튀기 자식이 뭐라고?
- 왜? 튀기새끼한테 들이받히니까 꼴받냐?
그러나 2차 성징의 힘은 위대했고, 기껏해야 조금 덩치 있는 초딩에 불과한 나는 성장기의 중삐리 진압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 으아악 놔라, 놔라 이놈들! 으아악!
게다가 이렇게 한바탕 한 다음에는 가주님. 그러니까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분께서 친히 우리의 뚝배기를 깨버리셨다.
- 아무리 이복동생이라지만 엄연히 너희와 피를 나눈 형제다.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자질 중에는 자비와 인내도 있는 것인데 너희에게서는 전혀 찾아볼수가 없구나. 피에르, 조르주 두 사람 모두 근신 일주일이다.
여기까지는 뭐, 좋았다만.
- 그리고···. 막내. 넌 겸양과 복종이라는 자질이 부족하구나. 너도 근신 일주일이다.
말이 근신이지 일주일간 텁텁한 독방감금이라는 처벌이 끝나고 나는 혼미해진 정신을 붙잡고 닷씨는 그러지 않겠노라 빌고 빌어 용서를 겨우 얻어내고야 말았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이 한 여름에 독방감금이라니 난 도대체 어떻게 살아 나온 거지? 아직도 미스터리란 말이야.
결국 반항다운 반항도 못하고 그렇다고 들이받을 수도 없는 처지에 빠진 나는 골똘히 생각한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남들이 깔보지 못하게 철저하게 실력으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을 쌓는다.’
왜 나에게 전생인지 뭔지 모를 기억이 주어졌는지는 모른다. 혹시 서자로 태어난 거에 대한 사과보상인가?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탈탈 털어 써주지.
아직 성장기인 탓일까. 나중에 가서 내 바짓가랑이에 매달릴 피에르와 조르주두 놈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엔돌핀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아.
그렇지만 총기를 어릴 적부터 내뿜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피에르와 조르주 두 망나니 녀석에게 찍혀, 한밤중에 대가리가 깨질 수도 있고.
후계를 위협한다고 판단한 저 두 놈의 어머니 되는 분이 친히 내 우유에 청산가리를 탈 수도 있다.
명탐정 K-난에서 청산가리로 죽는 꼴을 많이 봐서인지 그런 건 정말 사양이야.
게다가 18세기 프랑스에는 어린 꼬마가 들어갈 교육기관조차 마땅치 않다. 교육?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이 얼마나 선진적인 양육 시스템인지, 21세기 한국에 있는 부모님들이 본다면 모두 개거품을 물거다.
그러니 오늘, 내가 13세가 되는 날까지 참았다.
적어도 이 정도는 되야, 날 교육기관으로 보내주던 말던 할 것 아닌가.
아아 이 서늘한 이 감각 13년만이군. 더 이상 흐리멍텅한 꼬마는 없다.
내가 이렇게 독하게 마음먹게 해줘서 고맙다. 피에르, 조르주 이 새끼들아.
***
“가주님, 소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나는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단정히 한 뒤, 화려한 장식이 달린 문을 열고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시대의 귀족은 정말 사치스럽다. 이 지방 촌구석에 있는 귀족도, 이렇게 많은 귀금속으로 서재를 치장할 정도라니.
문을 닫고 자리에 앉자. 아버지는 읽고 있던 책을 탁자에 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혹여 또 피에르나 조르주와 싸운 게냐?”
“아닙니다. 이건 두 분과는 관련 없는, 오직 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
아버지는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쓰고 있던 돋보기를 천천히 탁자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의 흥미를 놓칠세라 빠르게 말했다.
“절 소르본으로 보내주십시오.”
“소르본?”
소르본. 파리 소르본 고등교육기관.
귀족자제 뿐만 아니라 난다긴다하는 특출난 평민들을 모아 놓고 고등관료와 성직자들을 양성하는 프랑스 인재의 요람이자 교육의 메카다.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오른손으로 턱을 몇 번 쓰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네 나이가 얼마인지는 알고 얘기하는 게냐?”
“올해로 열 셋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성녀 잔 다르크께서도 열 셋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시고 전장에 나아가셨으니 나이는 하등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허.”
아버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당연하겠지.
여태까지 무언가에 대한 의욕도, 재능을 보여주지도 않은 열 세 살짜리 꼬마가 갑자기 위인을 예시로 들며 똑 부러지게 말하니, 분명 점심에 무언가 잘못 먹은 건가 싶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난 오늘 점심 꼭꼭 씹어 먹었거든. 절대 체할 리가 없다. 암.
아암.
“네가 갑자기 이러는 건 이유가 있을 테지.”
“···.”
“들어봐도 되겠느냐?”
아버지는 잠시 눈을 감더니 나에게 조곤조곤 얘기했다.
“제가 원하는 수준의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그 곳에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에는 절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아버지의 미간이 좁아졌다.
“허···. 네가 몇 살이나 되었다고 벌써 자만을 배웠단 말이냐.”
“자만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그 말을 마치자 아버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내가 평소에 누누이 얘기한 바가 무엇이냐! 귀족으로 살겠다고 한다면 그에 맞는 의무와 명예, 그리고 자질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대체 겸양과 겸손은 어디에 두고 왔느냐! 썩 나가!”
이런 이 정도까지 격노하실 줄은 몰랐는데.
반듯반듯한 귀족 그 자체인 아버지에게는 너무 겉 넘는 행동으로 보인 건가.
하긴 나라도 뭐 보여준 것도 없는 초등학교 6학년짜리 꼬맹이가 와서 ‘나 좀 쩌는 듯?’ 이러면 꿀밤 마려울 것 같긴 하다만.
나는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가주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후···. 오늘 저녁은 네 방에서 혼자 먹도록 해라. 먹으면서 네가 뭘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게 좋겠구나. 물러가라.”
“예 가주님.”
그래도 일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샘이다.
아버지가 분명 날 기존과는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다.
앵그리버드 스테이지 별 세 개까지는 아니더라도 별 한 개는 딴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지.
반듯하고 올곧고 가족애가 넘치는 아버지이니 지금은 화를 내도 조금 있으면 내가 한 말을 곰곰이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실 것이다.
내가 할 일은 끝났으니, 이제 낚싯대의 찌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
샤를 드 툴롱. 이 저택의 가장. 게헨느의 영주.
그리고 툴롱의 방계.
남프랑스의 사파이어 툴롱 항구에서 쫓겨난, 본래 이름에 어울리는 정당한 영지를 받지 못하고 시골로 유폐되다시피 한 귀족.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와인에 치즈의 맛도 지금의 그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는 잔에 담긴 남은 와인을 목울대 뒤로 넘기며 맛을 느끼려 했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지금, 오직 ‘막내’에 대한 생각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처음은 부정이었다.
- 어린 것이 행동이 말보다 앞선 탓이겠지. 그러고자 한 말이 아닐 것이야.
두 번째는 분노였다.
-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리 자만을 경계하라 했건만···. 에잉.
세 번째는 냉정이었다.
- 만약. 만약에. 정말 만약에. 저 막내 녀석이 한 말이 그저 말이 아니라, 깊은 속내에서 끄집어 낸 말이라면. 자신이 처한 ‘서자’라는 상황과 아버지인 나도 모르게 쌓은 모종의 지식을 종합해 내놓은 결과라면.
“천재가 아니면 제 자만심도 주체 못하는 사람이라.”
그는 와인 병에 남은 마지막 와인을 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확인해서 나쁠 것은 없지.”
그리고 그 아이가 만일 천재라면.
그의 코에는 향긋한 와인 향이 아니라 20년 전 사촌과 형들에게 쫓겨나다시피 떠난 툴롱 항의 비릿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