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명품 지갑이 탐이 남
후싱루이와의 통화는 별 탈 없이 끝났다.
한 번의 거절 이후 더 이상 중국 국적 취득 제안을 하지 않는 그였는데.
덕분에 그 이후로는 서로의 근황이나 안부를 주고받다가 끝이 났다.
아마 그도 내게 이제 와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같았다.
‘뭐… 그래도 나름 깨어 있는 양반이니까.’
중국 중앙정치국에 속한 25명 중 후싱루이 정도면 깨어 있는 거로는 1~2위가 되지 않을까.
실제로 나와 여러 협력을 진행하며 광둥성을 꽤 발전시켰던 그였다.
나 외에 여러 외국 기업을 유치하는 둥 글로벌화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던 것.
여하튼.
‘중국도 많이 급한 모양이야. 나한테 이리 급하게 연락시킨 걸 보면.’
현재까지만 놓고 평하자면 미중 간 반도체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확 기운 상태였다.
특히 중국의 반도체 업계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장비 규제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중국 최대의 낸드플래시 기업이자 중국 메모리 반도체 굴기의 최핵심 기업인 YMTC는 생산의 핵심인 에칭 장비를 못 구하고 있어 여러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낸드플래시에 있어서 단수, 즉 몇 단을 쌓을 수 있느냐는 회로 배치와 함께 3D 낸드 성능의 핵심 요소.
단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낸드플래시 성능 또한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해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성능이 좋은 식각(=에칭) 장비.
‘그런데 반도체 장비는 5개 회사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지.’
선단 공정 장비 대부분을 장악하는 반도체 장비 빅 5.
AMAT, ASML, LAM, TEL, KLA.
이 중 네덜란드의 ASML과 일본의 TEL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회사는 모두 미국의 회사다.
즉, 꼴랑 다섯 놈 있는데 그중 세 놈이 이제 중국에 반도체 장비를 못 파는 미국 놈들인 것.
물론 이렇게만 보면 그러면 다른 두 놈한테 사면 되겠네! 싶겠지만…….
[일본,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중국 업계 “미국 규제보다 타격”]
우리나라도 나름 친미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편인데 그래도 일본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특히 미중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며 미국과 한 몸처럼 밀착하려 들고 있는 요즘의 일본은 미국의 푸들이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일본이 미국을 따라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를 가하게 된 것.
‘정확히는 반도체 관련 23개 품목에 대해 한국·미국 등 우호적인 국가 수십 곳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는 경제 산업상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거긴 한데…….’
그저 특정 국가를 명시하지 않았다 뿐이지 저 조항이 어디를 겨냥한 건지는 누가 봐도 뻔했다.
게다가 일본이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에 합류했다는 건 중국에게 특히나 더 치명적이었는데.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통해 노리고 있는 낸드플래시와 D램 분야.
현재의 낸드플래시뿐만 아니라, 앞으로 3D D램으로 발전하게 될 D램에서도 무척이나 중요한 공정이 에칭 공정이었는데.
그 에칭 공정에 필요한 에칭 장비가 미국의 LAM, AMAT 그리고 일본의 TEL까지 3사가 독점한 시장이라는 것.
[중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회사 YMTC, 공급망 차질로 웨이퍼 공장 건설 계획 연기]
[웨이퍼 제조 시스템은 미리 확보해 놨지만 에칭 장비 없어… YMTC 장비 공급 문제로 증설 연기]
그 결과, 올 스톱 되어 버린 YMTC의 공장 증설 계획.
물론 YMTC 한 곳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CXMT 등 중국의 주요 메모리 업체들 모두가 공장을 제대로 가동하고 있지 못하는 상태.
듣기로는 유지 보수도 못 맡기고 있어, 기존 구매했던 장비를 분해해 나온 부품으로 유지 보수에 활용하고 있을 정도란다.
‘그러면서 또 자존심은 살아 있어서 마이크론을 제재했지.’
이대로 당하기만 할 수는 없다는 듯, 최근 미국의 메모리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에 대한 제재안을 발표한 중국.
마이크론의 제품이 네트워크에 심각한 보안상 위협이 된다고 그러던데.
그러니까 지금 중국은 ‘너희가 우리한테 반도체 장비 안 팔면 우리도 너희 반도체 안 사!’ 이러는 거다.
물론 미국이야 ‘응, 안 팔아~’ 하면 그만.
당장 중국 매출이 사라지게 생긴 마이크론이야 나름 뼈아프겠지만 그래도 중국 매출이 회사 전체 매출 중 16%에 불과한 만큼 큰 타격까지는 아닌 상황이었다.
‘결국 큰일 나는 건 중국이란 소리지.’
마이크론이 퇴출되면 그 공급 부족분을 누군가가 메워야 할 텐데.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서서 중국에 반도체를 팔 기업이 어디에 있을까?
심지어 증설은커녕 기존 장비 유지 보수도 힘든 상황인 탓에 자국 기업의 생산분으로 그 빈자리를 메우지도 못하고 말이다.
[네덜란드, 일본에 이어 중국에 반도체 기술 수출 통제 동참]
게다가 며칠 후 들려온 또 다른 소식 하나.
‘아… X됐어요…….’
벌써부터 중국 정부가 똥줄 타는 게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아니나 다를까.
[보스, 중국 측에서 반도체 공급망 관련 협력을 논의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며칠 후 SW 반도체를 통해서 들어온 연락.
“음… 번호 바뀌었다고, 잘못 전화했다 해 주세요.”
물론 진짜로 저렇게 답하지는 않겠지만 여하튼.
SW 반도체는 공장과 설비를 모두 미국에 지은,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업.
심지어 그 오너조차 조만간 미국 국적을 얻게 된다.
당연히 중국과 협력할 이유가 없었다.
* * *
[선우진, 미국인 되다… 내일부터 미국에서는 미국 국적으로 활동]
[대한민국 외교부, 빠르게 선우진 국적회복 절차 밟을 거라 밝혀… 우수 인재 여부 국적 심의 위원회 심의 거친다]
결국 미국 국적 취득 절차가 완료됐다.
오늘부터 나는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
물론 내가 미국인이 됐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딱히 없었다.
[스웜 모터스: + 6.2%]
굳이 하나 찾자면 스웜 모터스의 주가 상승?
미국 내 여러 언론이 대대적으로 내 미국 국적 취득 뉴스를 내기도 했고, 내 국적에 따른 불안정성 등 기타 요인들이 해결됐다 여긴 건지 스웜 모터스에 대한 매수세가 쏟아진 것.
-ㄷㄷㄷ 스티붕 유에 이은 우진 선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런 놈이랑 선우진 비교 ㄴㄴ
-ㄹㅇ 군대 가기 싫어서 짼 놈이랑 예비군까지 끝낸 선우진은 비교 불가지
-혹시 이게 요즘 인기라는 갓양남인가요?
-엌ㅋㅋㅋㅋㅋ 맞네ㅋㅋㅋㅋ 선우진 이제 탈한남이네
국내에서도 내 미국 국적 취득에 대한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일부 극성맞은 사람들 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선우진이라면 뭐 그럴 만도 하지. 미국에 갖고 있는 사업체들 가치가 얼만데’와 같은 반응.
“아, 국적회복이요? 네. 외교부에서 직원분들이 나오셔서 도와주시더라고요. 허가 신청서도 바로 작성해 심사 넣었고요.”
그래도 혹시 몰라 방송을 켜 시청자들과 소통했다.
일전, 대중 호감도를 위해 이런 소통 기회를 자주 가지라는 조언을 따르는 것.
그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어 심심했다는 게 이유이기도 했고.
[실시간 시청자 수: 3,362,423명]
예전에 비하면 꽤 초라한 시청자 수.
하지만 그때야 내가 방송을 했던 게 몇 번 되지 않았을 때니 막 천오백만 명 넘게 찍고 그랬던 거지.
지금은 이렇게 방송을 켜는 것도 열 번이 넘었던 터라 그때처럼 많은 시청자들이 찾지는 않았다.
‘소통 없이 <라스트 에이지>만 하느라 다들 떠나갔던 것도 있고.’
최근 방송의 대부분은 내가 한 달 가까이 빠졌었던 <라스트 에이지>였는데.
그렇다고 내가 전문 방송인은 아닌 터라 게임에 집중하면서 시청자들과의 소통도 놓치지 않기가 무척 어렵더라.
처음에는 채팅창을 신경 쓰다가도 금방 게임에 몰입하게 돼 소통을 잊어버리는 것.
게다가 <라스트 에이지>가 나름 난이도가 있어 빡겜을 요하던 터라 그럴 겨를이 많지 않기도 했고.
그 탓에 처음 <라스트 에이지> 방송을 할 때만 해도 수백만 명의 고정 시청자가 있었지만, 저번 방송에서는 백만 명 조금 넘었었을 정도다.
[실시간 시청자 수: 4,176,213명]
‘오늘은 그래도 미국 국적 취득이라는 이슈가 있어서 사백만 명인 거지.’
그사이 조금 더 늘어난 시청자 수.
“네? 왜 새벽 4시에 라방 켜냐고요? 뭔 소리세요? 저 미국인이라 지금 LA 기준 오전 12신데.”
-ㅋㅋㅋㅋㅋㅋㅋㅋ
-반박 불가네 ㅅㅂ;;
-이게 그 NTR인가 그거 맞죠?
-근데 이제 국뽕티비를 어떡하냐? 선우진 팔아먹는 거 국뽕티비들 단골 소재던데
-ㅋㅋㅋㅋㅋ조만간 다시 한국인 될 거라 노 상관임
“뭐, 장난이고. 다시 한국 국적회복까지는 한 일주일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원래는 보통 2~3개월 걸린다는데 저야 뭐 빨리 해 주겠죠.”
실제로 원래라면 최소 일주일은 지나야 열릴 국적 심의 위원회도 바로 내일 예정되어 있단다.
한국 정부로서는 최대한 빨리 내게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시켜 주고 싶은 것.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방송을 끝냈는데.
[국제 신용 평가사 S&P와 무디스, 대한민국 신용 등급 ‘Aa2, 안정적’으로 하향]
[3년 전, 한국 국가 신용 등급 사상 최고인 Aa1으로 상향 조정 했던 신용 평가사들… 일제히 하향 조정. 선우진 국적 상실 영향?]
[대한민국 정부가 선우진 국적회복을 서두르는 이유? 선우진의 이탈로 하향 조정 된 국가 신용 등급]
…아니, 무슨 나 하나 없다고 한국 신용 등급이 낮아져?
안 그래도 몇 년 전에 한국의 국가 신용 등급이 사상 최고 등급인 Aa1이 됐던 게 나 때문이 아니냐는 소리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사실이었나 보다.
* * *
[시그니처 은행, 뉴욕주 금융 당국에 의해 폐쇄… 자산 몰수 작업 들어가]
[퍼스트리퍼블릭 은행 파산 선언… 연쇄적인 은행 도산 속에 은행주들 일제히 폭락]
예상했던 대로 실리콘밸리 은행의 파산 이후 추가적으로 파산하는 은행들이 나타났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은행주, 금융주들도 급락했는데.
“바클리스와 스탠다드차타드의 주가가 6%가량 하락했습니다. 도이체방크의 주가는 14%, 크레디트스위스는 25%가 넘게 떨어졌고요.”
과감하게 하락에 베팅했던 덕분에 큰 수익을 볼 수 있었다.
단기적으로 전체 증시에 하락장이 찾아오면서 수익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한 것.
은행주뿐만 아니라 금융 시장에 공포감이 퍼지면서 주요 지수가 모두 큰 폭으로 하락한 덕분이었다.
‘꽤 쏠쏠하네.’
얼마만에 투자 몇 번으로 이렇게 벌어들이는 건지.
그러던 그때, 추가적으로 들려온 소식이 하나 있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아예 파산 위기라고요?”
스위스의 글로벌 투자은행이자 유럽 최고의 투자은행으로 유명했던 크레디트스위스.
한때는 세계 9대 투자은행에 속했었을 정도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2010년대의 유럽 위기를 거치면서 예전의 성세를 잃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몇 년 동안 돈세탁 혐의 등 여러 스캔들에 휩싸이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
급기야 스위스 특유의 예금자 비밀 보호가 개정되면서 스위스 은행 하면 떠오르던 ‘철저한 예금주 보호’도 사라지며 엄청난 뱅크 런이 발생했었다고 한다.
거기에 이번 은행 위기까지 겹치며 전체 시총 중 1/4가 그대로 날아가 버렸으니.
이제는 정말로 크레디트스위스가 파산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네. 크레디트스위스의 최대 주주인 사우디국립은행에서 추가적인 유동성 공급을 거부했습니다. 뒤늦게 스위스 국립은행이 500억 스위스 프랑의 유동성을 긴급 지원 하겠다 결정했지만 시장을 안심시키지 못했고요.”
지금의 사태를 안정화하려면 크레디트스위스가 적어도 500억 스위스 프랑만큼의 유동성을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고 한다.
500억 스위스 프랑이면 달러로는 550억 달러 정도.
‘분명 크레디트스위스가 세계 최중요 은행 30곳 중 하나랬는데.’
그런 곳이 꼴랑(?) 550억 달러 어치 유동성이 없어 파산 위기라니.
…아니, 내 기준이 너무 높은 건가?
여하튼.
‘EU는 사업회사의 은행 주식 100%가 원칙적으로 허용되는 곳이지.’
한국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금산 분리.
미국도 5%까지는 완전히 허용하고, 5% 이상부터 25%까지는 미국 연준이 허용 여부를 판단한다.
그 탓에 나도 금융 지주회사 형태로 된 투자은행은 몰라도, 상업은행 지분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이나 일본은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는데.
‘크레디트스위스의 현 시가총액이 97억 달러.’
그리고 예상되는 크레디트스위스의 손실은 50억 달러다.
즉, 크레디트스위스의 현 가치는 40~50억 달러 정도.
스위스 정부로서는 자국 경제를 생각해서라도 크레디트스위스만 한 곳을 파산되게 놔둘 수는 없을 텐데.
어떻게 얘기만 잘하면 반값에 크레디트스위스를 살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로스차일드는 은행과 투자회사들을 통해 금융업을 지배했었지.’
흔히 로스차일드와 비교되는 록펠러는 석유산업을 지배했었다.
그렇다면, 록펠러의 석유산업이 지금 시대에서는 첨단 기술 산업이라 쳤을 때.
‘금융과 테크 둘 모두를 지배한다면?’
세상을 움직일 만큼의 자본과 기술.
둘 모두를 갖게 된다면 세상을 지배하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