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쪼잔한 선우진
소울브레인의 직원들은 순간 SW 인베스트먼트의 인수 이후, 그들이 여러 장의 비밀 유지 계약서를 작성했던 걸 떠올렸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만약 어길 생각이 들게 되더라도 바로 사라지게 만들 정도의 배상금이 적혀 있던 비밀 유지 계약서.
그때는 그저 선우진답게 매사에 꼼꼼하구나, 하고 여겼을 뿐이었는데.
‘다 이유가 있던 거였어!’
일본의 수출 제한을 예상한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우진이었으니.
일본의 경제산업성은 물론 국회에도 선우진의 사람이 심어져 있을 거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수출 제한을 선우진이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와 같은 대화가 소울브레인 회사 곳곳에서 오갔다.
“선우진이 진짜 회귀자인 게 아닐까? 진도진처럼 말이야. 왜, 예전 인터넷에서 이 주제 가지고 진지하게 토론하는 사람들도 있었잖아.”
심지어 아주 사실에 가까운 추측을 하는 사원도 있었다.
물론, 별다른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진짜 대박이네. 우리 양산까지 얼마 안 남았댔지?”
“개발부 동기가 그러는데 시제품은 저저번 주에 나왔댔어. 경북 쪽에 생산 시설 짓는 것도 이제 두세 달이면 끝나고.”
“와… 타이밍 소름이네. 딱 그때쯤이면 오성이나 GL, 하이닉스 재고량도 떨어질 때 아니야?”
초고순도의 불화수소 개발까지는 몇 걸음 남지 않은 상황.
비밀 유지 계약서 때문에 바깥에는 알려지지 않은 일이었지만,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꽤 큰 반향이 있을 터.
게다가 소울브레인의 몇몇 직원은 자신들이 최근 미국의 화학 소재 기업인 듀폰과 협약을 맺어 생산 공장을 지었던 걸 알고 있었다.
그것 또한 SW 인베스트먼트에서 나온 경영진들이 직접 지시했던 건.
“일본의 수출 제한 품목 중에 포토레지스트도 있잖아?”
“우리가 저번에 듀폰이랑 공장 신설하기로 한 게 분명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였지?”
덕분에 더할 나위 없이 분위기가 좋아진 소울브레인이었다.
보통의 기업에서 기업이 잘되는 건 그 노동자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라지만, 소울브레인은 SW 인베스트먼트의 인수 이후 그런 보통의 기업이 아니게 됐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주인이 바뀌고 그들이 그 변화를 가장 크게 체감한 게 있다면 바로 영업이익에 따른 성과급 비율의 변화였다.
종전 기대했던 것과 달리 기본급에 있어서는 큰 상승이 없었지만, 성과급과 같은 다른 측면에서의 변화는 매우 컸던 것.
반도체 재료 제조 기업에서 일하는 만큼 초고순도 불화수소의 중요성에 대해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일본의 수출 제한이 시작된 지금, 양산화에 성공한다면 소울브레인의 영업이익이 무지막지하게 뛰게 될 터.
인사 고과 등급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최소 300%에서 최대 800%까지의 성과급을 가져갈 수 있어 보였다.
“아으. 우리 사주 아직까지 갖고 있었으면 진짜 대박이었을 텐데.”
“한 다섯 배는 뛰었겠지?”
“그래도 이득 보고 판 게 어디야. 모집 이후로 계속 떨어져서 반토막 났다가, SW 인베스트먼트 덕분에 30%나 남겨먹었잖아.”
물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SW 인베스트먼트가 기존의 오너 일가에게서 67%의 지분을 사들인 후, 그 외의 지분까지 모두 취득해 상장폐지까지 신청하는 과정에서 판매했던 우리 사주를 지금 와서 아까워하는 이들도 몇몇 존재했다.
* * *
[일본 경제산업성,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 핵심 소재 수출 제한 발표!]
[본격적인 對한국 경제제재에 돌입한 일본… 이유는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해서?”]
[G20 회의에서는 자유무역 강조해 놓고, 공동성명 잉크 마르기도 전에 경제제재 가하는 일본.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자유무역에 위선적 태도 취하는 일본”이라 말하며 비판.]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인 만큼 양국의 경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서로 호혜성을 띄고 있는 양국의 경제였지만, 일본이 덩치가 더 큰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인 만큼 한국이 일본에 의존하는 면이 더 컸다.
특히나 핵심 소재나 핵심 재료 등에 있어서는 그런 모습이 더 두드러졌다.
그간 수출 주도 경제성장을 해 오는 동안, 한국 경제는 소재나 부품을 타국에서 조달해 그걸 통해 중간재나 완제품을 생산 및 공급하는 가공무역에 집중해 왔다.
자원이 부족하고 내수 시장이 협소한 만큼 경쟁 우위를 가진 타국, 특히 가까운 일본의 소재나 부품, 장비 등을 수입하는 게 더욱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일본의 수출 제재로 인한 여파가 클 수밖에 없었는데.
“오성이나 MK 모두 난리가 났겠는데.”
“기존 원자재나 부품 수출하던 일본 기업들도 손해가 크겠지만… 당장 오성이나 MK, GL 같은 곳들이 볼 손해가 더 크겠지.”
특히나 일본에서 직접적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의 핵심 품목인 불화수소, 불화 폴리이미드, 레지스트의 수출 관리를 엄격화할 것이라 발표한 상황.
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될 오성전자와 GL전자, GL 디스플레이, MK 하이닉스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모두 한국 경제를 이끌어 가는 대기업들.
당연히 그 영향은 증시로도 이어졌다.
[한일 무역 분쟁? 우려감에 증시 검은 월요일…….]
[코스피 -2.20%, 코스닥 -3.67%. 오성전자 -2.75% 등 시총 상위 종목 동반 하락.]
[오성전자 등 반도체株 중심 하락… 시가총액 일주일 새 51조 사라져. 원-달러 환율도 11.6원 대폭 올라…….]
그렇지 않아도 미국 증시의 성장으로 자금이 그쪽으로 몰려가 한 해 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한국 증시였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출 제재라는 악재가 겹치며 하락세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 * *
일본 수출 제재 발표가 있고 3주가 더 지났다.
나는 그동안 여전히 런던에 머물고 있었는데.
오늘은 화상 회의를 통해 제이슨과 윌리엄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퓨쳐 인베스트먼트가 보유한 오성전자 지분이 6%를 넘었습니다. 물론 공표되는 일이 없도록 소유주를 나눠 작업했습니다.]
[SW 인베스트먼트와 WS 매니지먼트의 보유 지분은 합하면 약 4%가 넘고요.]
일본 수출 제재로 오성전자의 주가가 소폭 하락한 상황.
작년에 5만 원을 넘겼던 주식이 지금은 41,000원대였다.
이번 기회를 통해 몰래 갖고 있는 오성전자의 주식을 늘리기로 결정, 해당 사항을 윌리엄과 제이슨에게 지시해 놨다.
물론 이번 기회에 저 10%를 사들인 건 당연 아니었고, 요 몇 년간 지속적으로 모아 왔던 지분에 2% 정도만 더 추가했을 뿐이다.
오성전자의 최대 주주인 오성생명이 약 7.5%, 오너 일가가 4.8%, 오성물산과 오성화재가 갖고 있는 게 5%를 조금 넘으니…….
오성 측 지분율은 18% 정도라고 볼 수 있었다.
즉, 내가 갖고 있는 오성전자의 지분이 그들의 1/2를 넘는 상황.
‘코로나가 터지면 또 대폭 주저앉겠지. 그때 마음만 먹으면…….’
아예 오성전자를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한번 생각만 해 본 거지,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오성전자 정도의 기업을 꿀꺽 삼키는 건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각계각층의 반발도 적지 않을 테고.
기존의 내 영향력에 오성전자까지 더해지면 그때부터는 한국은 누가 봐도 선우진 공화국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음… 사실 겉으로 드러냐나 아니냐의 차이긴 하니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지금도 사실상 반쯤은 선우진 공화국인 한국인데.
여기서 더 나아가는 건 딱히 바라지 않았다.
‘오성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데 40조 원이면 싸게 먹힌 거지.’
내가 몰래 오성전자의 지분을 모아 놓는 건 일종의 목줄 겸 투자.
당장 수익만 놓고 봐도 10만 전자가 오게 되면 그 수익률만 100%가 넘었고, 거기에 프리미엄까지 더해지면 150%까지도 갈 수 있을 거다.
거기에 우호 지분이란 명목으로 오성그룹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목줄이 되어 줄 거다.
나와 박 부회장의 사이가 꽤 좋은 편이라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그게 언제까지나 그럴 수 있을지는 미지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미래 정보도 몇 년 후면 바닥나 버리니 미리미리 혹시 모를 일을 준비하는 거였다.
거기에 요 몇 주 한국 증시의 하락세로 벌어들인 돈도 적지 않았는데.
최근 사들인 오성전자의 지분 2%만큼을 그대로 메운 수준이었다.
뭐, 어쨌거나.
“예.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제이슨, 윌리엄과의 화상 회의를 끝내고.
그다음으로는 소울브레인 측에 지시를 내렸다.
톡, 토독.
[나 - 이제 슬슬 언론에 발표하시죠.]
예전에는 MK 하이닉스를 인수할까도 생각했었다.
오성전자처럼 단순히 목줄을 채우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꿀꺽 삼켜 버리는 것.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인수가 불가능할 것 같아 포기했다.
사들일 자금이 부족한 건 당연 아니었지만, 반도체 관련국들한테서 전부 승인을 받지 못할 것 같아서.
팹리스 시장에서 최근 AMD의 성장세가 엄청난 기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내가 파운드리까지 진출한다면… 그때는 많은 이들이 나를 견제하기 시작할 거다.
지금처럼 그냥 오성전자를 파트너로 둬 이득을 보는 게 나았다.
[나 - MK에도 확실히 통보하시고요. 새 공급계약에 MK 몫은 없다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내게 예전 똥을 뿌리려 했던 적 있는 MK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 * *
일본의 수출 제재 발표가 있고 나서.
피해를 본 건 한국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이번 일로 수출이 제한된 핵심 소재를 공급하던 일본 내 기업들.
그들도 거래처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게 된 거였으니, 적지 않은 손해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던 그때, 발표된 하나의 소식.
[소울브레인, 12나노급 최고 수준 초고순도 불화수소 국내 생산 가능?!]
[일본 수출 제재 발표 후 겨우 한 달. 벌써 ‘탈일본화’ 성공?!]
[오성 디스플레이와 GL 디스플레이 등 디스플레이 업계, 국내산 불화수소액 등장에 쌍수를 들고 환영.]
마치 수출 제재를 기다렸다는 듯 한 달도 되지 않아 자체 개발 소식이 들려온 것.
개발에만 몇 년이 걸릴 거라 예상했던 초고순도 불화수소가 한국에서 생산이 가능하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미국 반도체 재료 기업 듀폰, 한국 내 공장 신설 완료. 소울브레인과 함께 국내에 레지스트 공급할 것.]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기존 한국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기업에 소재를 공급하던 일본 기업들 사이에서 엄청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두 눈 다 뜬 채로 자기네들 거래처를 빼앗겨 버리는 상황 아닌가.
게다가 일본 정부가 수출 제재를 철회한다고 하더라도, 그때 가면 한국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기업들이 일본산 핵심재료로 공급처를 돌릴까?
수출 통관 및 운임에 따른 추가적인 비용을 생각하면, 한국산 소재들이 일본산보다 쌀 수밖에 없을 텐데?
심지어 한번 바꾼 공급망을 다시 바꾸는 데에는 많은 장애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뭐? 저기 저 소울브레인이라는 곳이 선우진 거라고?”
“이러면 기술 우위도 소용없잖아! 저 한국 놈이 갖고 있는 돈이 얼만데! 아무리 일본의 기술이 남다르다고 해도 돈 앞에는 장사 없다고.”
“오성이나 GL 모두 선우진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다시 일본 기업으로 공급망을 바꾸진 않겠지… 이게 뭐야, 대체!”
자국의 정부가 자국의 기업들 수출을 막고, 남 좋은 일만 시켜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대체 정부는 무슨 생각인 거야?! 아니, 왜 이렇게 앉아서 거래처를 빼앗겨야 하냐고?”
“한국만큼 일본산 부품과 소재를 사 가는 곳도 없는데! 그간 한국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봐 놓고 왜 나선 거야? 알아서 적자 보는 곳을 제재하는 경우가 세상에 대체 어딨어!”
온갖 불만의 목소리가 일본 정부를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그때, 대상은 달랐지만 비슷하게 불만을 내뱉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쾅!
“선우진 이 개자식이!”
오성과 GL이 모두 웃게 된 상황.
홀로 인상을 쓸 수밖에 없는 MK 그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