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그는 신이야
탁-!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글이 잘 나왔다.
이틀 사이에 약 두 권 분량.
처음 <마지막 마법사>를 썼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당연한 거기도 했다.
흰 도화지 위에 자유롭게 이야기를 그려 나갈 수 있던 <마지막 마법사>와는 달리, <황혼의 기사>는 <마지막 마법사>와 <찬탈자>라는 이미 완성된 도화지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그려 내야 했으니.
신경 써야 할 것도, 고민이 필요한 부분도 더 많았다.
‘한동안은 글이 좀 막히겠어.’
그래서일까.
두 권 분량까지는 예전에 비해서 어려웠던 거지 막상 그런 대로 수월하게 쓰긴 했지만, 이후부터는 전개에 있어서 고민이 많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몇 있었지만 모두 다 썩 만족스럽지는 않은 느낌.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 글을 억지로 풀려고 하다 보면 결국 결과물도 별로 만족스럽지 않게 나온다는 것을.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다른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언젠가는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 영감이 떠오를 터였다.
‘오늘은 오랜만에 경기나 보러 가 볼까.’
오전은 모조리 집필에 쏟았으니, 오후에는 외출을 해 볼 생각.
마침 크리스탈 팰리스의 경기가 17시 조금 넘어서 있었다.
구단주라고 따로 전용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구단에 얘기하면 자리가 나올 거다.
톡, 토독-
문자를 보내 구단에 표 하나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
그다음으로는 캘리포니아에 있을 엘레나에게 전화를 걸어 <황혼의 기사>와 관련된 소식을 알렸는데.
“<황혼의 기사> 초반부 원고가 완성됐어요.”
[예? <황혼의 기사>요? 아……! 저번에 쓰신다던 그……!]
깜짝 놀라는 엘레나.
그러고 보니 제목을 아직 말하지 않았었다.
<마지막 마법사>와 <찬탈자>를 이을 새로운 시리즈를 쓸 생각이란 것 정도만 가볍게 언급했었을 뿐.
덕분에 오랜만에 잔뜩 흥분한 엘레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벌서 두 권 분량이나 쓰셨다고요? 정말요? 빨리 읽어 볼게요, 직원들도 함께요!]
“하하. 천천히 읽으셔도 됩니다. 급할 건 없으니까요.”
[그런데 <황혼의 기사>라니… 제목부터 엄청 기대가 되는데요? 황혼… 그리고 기사… <마지막 마법사>로 시작한 이야기가 <황혼의 기사>로 끝맺음 되다니.]
불현듯 떠올라 큰 고민 없이 지은 이름이었지만.
엘레나의 말처럼 그간의 루덴 대륙 시리즈를 마무리짓는 최종 작품의 제목으로 꽤나 적절한 이름인 <황혼의 기사>였다.
‘나 스스로도 쓰면 쓸수록 저 이름이 마음에 들었지.’
황혼이라 함은 해가 막 져서 어둑어둑할 때를 일컫는 말.
사람의 생애에 빗대어진다면 그 사람의 말기에 해당하는 순간을 뜻하기도 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에 비유될 수도 있고 말이다.
‘원래는 <마지막 마법사> 주인공의 말년을 빗대서 쓴 거였지만… 글쎄, 앞으로 어떤 전개를 택하냐에 따라 다른 의미도 포함할 수도 있겠네.’
가장 위대한 영웅이자 가장 위대한 마법사가 세운 통일 제국.
그 제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아직은 나도 알지 못했다.
지금 어느 정도 방향을 생각해 놓더라도, 막상 집중해 쓰다 보면 원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는 일도 잦으니까.
‘우선은 계속 고민해 보자.’
거기까지 소설 생각을 마친 후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러기 위해 에드에게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다만, 크리스탈 팰리스의 경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었는데.
그걸 때우기 위해 오랜만에 영화관에 갈 생각이었다.
* * *
“음. 전 사실 스토리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그래도 재미는 있었습니다.”
“하하. 저도 비슷해요. 원래도 복잡한 영화를 찍는 감독이지만 이번 건 유독 그렇더군요.”
영화를 다 보고 나오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스토리를 이해하는 게 힘들었다는 에드.
사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회귀하기 전에도 보았던 영화였기에 그나마 조금 더 수월했을 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을 본 것이었는데.
제작은 놀란 감독이 설립한 제작사인 신카피가 맡았지만, 배급은 써밋-MGM에서 담당한 영화였다.
인셉션의 제작사였던 레전더리 픽쳐스와는 예전 써밋 엔터이던 시절에 독점 배급 계약을 체결했었고, 써밋-MGM이 된 후에는 아예 인수해 버리기까지 했었다.
그 과정에서 놀란 감독의 작품들을 제작 및 배급하면서 적잖은 관계를 쌓을 수 있었고, 덕분에 이번 테넷도 써밋-MGM에서 배급을 맡을 수 있었던 것.
‘테넷이 엄청난 수익을 거두는 영화는 아니지만 인터스텔라와 덩케르크에 이어 놀란 감독과 써밋-MGM이 함께하는 세 번째 작품이니 의미가 적지 않지…….’
수익성 측면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그간 써밋-MGM의 수많은 흥행작과 비교해서 그렇지, 그래도 테넷이 투입된 제작비 이상을 벌어다 주기는 할 거다.
이만한 초대형 블록버스터 기준에서는 손해를 안 본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했다 볼 수 있었다.
물론 내 기억 속의 테넷은 글로벌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며 놀란 감독의 영화 중 최초로 흥행에 실패한 영화가 됐었지만, 그건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얘기였다.
이번에는 타이밍을 앞당겨 1년여 일찍 개봉한 상황.
개봉 1주 차가 막 지나가고 있는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손익분기점을 넉넉하게 넘길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이대로 오펜하이머도 써밋-MGM이 가져오면 좋겠는데.’
오펜하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 이후 차기작.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전기 영화였다.
내가 회귀하기 전에는 그 제작 계획만 간신히 나왔던 작품이라 꽤 기대가 되고 있었다.
‘테넷에 이어 조만간 패러사이트도 개봉 예정이고.’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게 될 봉 감독의 패러사이트도 올해 9월 개봉이 예정되어 있었다.
원래는 올해 5월에 개봉됐을 걸 4달이나 늦춘 이유는 아카데미 시상식 시즌에 맞추기 위함.
원역사에서처럼 한국에 먼저 개봉 후 북미에서는 제한적 상영으로 뒤늦게 푸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글로벌 동시 개봉을 할 생각이었다.
제작사인 써밋-MGM의 명성은 물론 봉 감독의 북미 및 유럽 내 명성 또한 원역사에서보다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
물론 자막과 함께 봐야 하는 비영어 영화인 만큼 북미 내 엄청난 흥행까지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원래의 기록은 물론 역대 비영어 영화가 세운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울 수 있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거기에 원래 그랬던 것처럼 패러사이트를 통해 온갖 영화제 상을 휩쓸게 된다면… 아무리 디즈니의 마블이 보여 주는 기세가 여전해도 올 한 해는 써밋-MGM의 것이 될 거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거였고.
‘영화 쪽은 이제 충분한 거 같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21세기 폭스 인수도 이제 단 한 걸음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미국 법무부 규제 당국의 반독점 심의.
그것만 끝나게 되면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 스튜디오는 이제 7개에서 6개가 되는 것.
원래 6개였던 걸 써밋-MGM을 키워 내 7개로 만들어 냈던 거니, 내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격이다.
[미 서부 작가 협회, “써밋-MGM의 21세기 폭스 인수에 적극 찬성. 회사가 아닌 제작자를 우선하는 할리우드 유일한 대기업이 바로 써밋-MGM.”]
[반독점 심사 통과를 자신하는 써밋-MGM! “아직 우리의 시장 점유율은 소비자 비용을 증가시킬 만큼 크지 않아… 인수가 완료되더라도 지금까지의 디즈니보다 조금 높은 수준. 오히려 경쟁 체재를 통해 소비자에게 이득이 될 것.”]
반독점 심사에 대해서는 딱히 걱정 없는 상황.
다만 심사가 모두 완료되는 데에 최소 1년 가까이 소요된다는 게 유일한 흠이었다.
[폭스 인수시 북미 박스오피스를 지배하게 될 써밋-MGM, 수익의 40% 이상을 차지하게 될 수도]
물론 그 이후의 시너지를 챙각하면 1년이야 당연 기다릴 만했다.
* * *
소울브레인.
총 사원 수 약 1,200명에 달하는 중견기업인 이곳은 몇 달 전 한차례 변혁기를 거쳤었다.
“소식 들었어? 우리 회사 딴 데로 팔린다던데?”
“뭐? 그거 헛소문 아니었어?”
“아냐. 비서실 일하는 동기가 말해 줬는데 회장님 의사가 확고하시대. 이제 은퇴하고 싶으시다고.”
“아… 상무님 때문인가.”
사실 보통 같은 상황이었으면 소울브레인과 같은 곳을 팔 오너는 없을 거다.
오성전자와 GL 디스플레이, 하이닉스 등의 거래처를 둔 만큼 매년 적지 않은 영업이익을 벌어들이는 알짜 회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회장의 유일한 아들이자 기업을 물려받을 후계자였던 2세가 최근 세상을 달리한 상황.
기업을 정리하고 아예 손을 떼겠다는 회장의 의사가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는 직원들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는 것과 그게 마음에 드느냐는 별개의 얘기였는데.
“후. 어디래? 오성이나 MK?”
“글쎄.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우리 같은 협력사를 그치들이 살 이유가 있을까?”
“휴우. 이상한 곳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애초에 구관이 명관이라고.
그간 소울브레인의 복지 및 대우 등이 나쁘지 않았던 덕에, 갑작스러운 변화를 반길 리가 없었다.
물론 오성이나 GL, MK와 같은 곳에 인수되는 거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부장님, 혹시 부장님은 아시는 거 없으세요?”
“글쎄, 나도 모르겠네. 어찌나 보안이 철통이던지… 다만 외국계라는 건 반쯤 확실하네. 협상 자리에 온 사람 태반이 외국인이었거든.”
그렇게 소울브레인 직원들이 걱정과 함께 보낸 몇 주가 지나고.
인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윤곽이 드러났는데.
[SW 인베스트먼트, 소울브레인 오너 일가 지분 전량 취득! 67%로 최대 주주 등극.]
“SW 인베스트먼트? 어? 어디서 들어 본 거 같은데…….”
“인베스트먼트가 붙은 거면 사모펀드 아냐? 아… 최악인… 어? 잠깐만? SW?”
“내가 아는 그 SW 맞지?”
그걸 알게 된 순간 소울브레인의 전 직원들이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다.
그간의 걱정이 모두 해소되는 건 물론 모두 기대감으로 뒤바뀌는 기분.
마치 엄청난 역배당의 승패를 맞췄을 때의 쾌감과 비슷했다.
물론, 딱 하나의 걱정거리가 남아 있긴 했는데.
“혹시 인수 후에 정리 해고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어디 가서 선우진네 회사라고 자랑 한번 해 보자, 제발. 원래 줬다 뺏는 게 제일 나쁜 거라고.”
자고로 인수 합병과 정리 해고, 구조 조정 등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
인수 절차가 모두 마무리된 후 자신들의 자리가 여전히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나온 발표가 그들을 안심시켰다.
“구조 조정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저희는 소울브레인의 인력을 더 충원할 생각입니다. 대신, 여러분이 빠른 시일 내에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거 말씀이시죠?”
“트웰브나인급 초고순도 불화수소의 대량 생산입니다.”
SW 인베스트먼트에서 온 경영진의 말.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재료이자 선두 주자인 일본이 전 세계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초고순도 불화수소를 자체 생산할 계획이란다.
그 말을 듣고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 소울브레인의 직원들이었는데.
‘우리 보고 그걸 생산하라고?’
‘언제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개발한다 해도 문제지. 일본 기업을 놔두고 증명도 안 된 국산 기업의 불화수소를 쓸 곳이 있을까?’
‘선우진도… 만능은 아니구나. 제조업은 처음이라 그런가, 뭘 모르긴 몰라.’
‘개발 비용은 잔뜩 들여 놓고 만들어 봐야 팔 데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의견을 입 밖으로 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방금 막 오너가 바뀐 상황.
이럴 때일수록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을 실천해야 할 때였다.
그리고 몇 달 후.
[일본 경제산업성, 고순도 불화수소의 한국에 대한 수출 우대 조치 취소 발표!]
[한일 무역 분쟁 발발하나?]
[발등에 불 떨어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계!]
‘선우진은… 신인가?’
소울브레인의 모든 직원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