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황혼의 기사
돈을 벌기는 어려워도 쓰기는 쉽다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말이지만, 나에게는 조금 다르게 적용되는 것 같았다.
‘돈을 벌기는 쉽지만 쓰는 건 더 쉽네.’
[21세기 폭스 인수전, 승자는 써밋-MGM?]
[총액 800억 달러에 21세기 폭스 인수를 거의 확정 지은 써밋-MGM.]
[엔터 업계 초대형 공룡 등장하나… 40%에 가까운 프리미엄으로 21세기 폭스 지분 사들이려는 선우진.]
이번 뉴욕 증시의 상승장으로 벌어들이게 될 수익금만큼을 그대로 내놓게 생겼다.
물론 그 대신 20세기 폭스 영화와 TV 스튜디오, FX 네트워크 및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등을 가져오게 되긴 하겠지만.
“고생하셨습다, 래클런. 하하. 반독점 심사요? 그거야 물론 문제없죠.”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아, 아버님께서 제게 우진을 몇 번이나 칭찬하더군요. 젊은 나이에 지금의 위치에 오른 이유가 있으시다면서… 하하, 저와도 비교하신 탓에 곤욕을 면치 못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우진과 비교된 게 영광이기도 했지만요.]
이런 말을 들으니, 루퍼트 머독과 래클런 머독의 차이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사실 저번 루퍼트 머독과의 만남에서 대놓고 ‘한번 해 보실?’을 시전한 나였지만… 그건 루퍼트 머독이 지금 80대 후반의 노인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던 말이었다.
만약 그가 래클런처럼 40대였다면 아무리 나였어도 루퍼트 머독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다.
개인의 도덕성을 제외하고 루퍼트 머독이란 사람의 능력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그는 역사에 이름을 새길 정도의 쟁취자이자 정복자였으니까.
괜히 머독 제국을 만들어 낸 게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늙었지.’
조만간 90세를 바라보는 80대 후반의 나이.
물론 루퍼트 머독의 모친 또한 100세를 넘기셨었을 정도로 장수하는 DNA를 갖고 있다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 아무리 길어도 10~20년의 시간이다.
지금은 그에게 있어 인생의 말년인 것.
‘그리고 그 어떤 대단한 정복왕도 말년에는 안정을 바라는 법이지.’
열정과 열의가 살아 있다 해도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적어도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제국 전부를 걸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을 누군가와 벌일 정도의 열정과 열의는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래클런도 사실 그렇게 믿음직스러운 후계자감은 아니지.’
그가 부족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재벌 2세인 건데.
그간 내가 봐 온 국내의 재벌 2세들과 비교하자면 몇 배는 더 능력 있는 래클런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2세로서 괜찮은 거지, 루퍼트 머독과 비교하자면 미진한 점이 많은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모름지기 아버지라 함은 제 자식의 부족한 점만 보이는 법 아니겠는가.
‘뭐, 결국 머독이 내게 21세기 폭스를 넘긴 것도 당연한 거였다는 거지.’
폭스를 내게 팔지 않으면 한판 붙어 버리겠다 말하는 나라는 존재.
인생의 전성기였다면 그래 어디 한번 붙어 보자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 말년에 나타난 거다
그렇다고 그의 사후 회사를 물려받을 래클런이 그의 뒤를 이어 나와 계속 맞붙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으니.
래클런이 말한 것처럼 루퍼트 머독이 나와 제 아들을 수차례나 비교한 것도 거기서 오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나와 래클런의 사이가 꽤 좋았으니.’
더욱이 800억 달러라는 인수 금액도 합리적인 가격이었고.
디즈니와 경쟁을 붙여 100억 달러 더 얻자고 친구로 둘 수 있는 이를 굳이 적으로 돌릴 이유가 없는 거다.
물론 이게 진짜 제국의 얘기였다면 이웃 나라를 믿고 동맹을 대가로 이권을 넘겨주는 건 무척이나 멍청한 짓이겠지만…….
‘미국에는 반독점법이 있으니까.’
소설로 치자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반독점법.
이제 21세기 폭스가 빠지게 될 머독 제국을 구성하는 뉴스코프에는 FOX, FOX NEWS, ITV, SKY와 같은 방송사들 그리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나 더 선, 더 타임스와 같은 신문사들, 하퍼콜린스의 출판사 등이 있는데.
출판사야 이미 윅슨 출판사를 갖고 있는 내게 그리 매력적인 매물이 아니었고.
그 외에 미국 내 방송국과 스포츠 중계 채널들은 반독점법 때문에 내가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것들이었다.
스웜을 통해 스트리밍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내가 전통적인 방송 사업들까지 소유하게 되는 건, 미국 전기통신법상 문제 삼을 여지가 꽤 있으니까.
다른 전통 미디어 기업들에게 반독점법을 빌미로 공격받게 될 거다.
“예. 다음에 봬요. 그때는 저번처럼 도날드도 함께하는 게 좋겠네요.”
[영광입니다, 우진.]
아무튼 그렇게 래클런과의 통화를 끝내고.
탁-!
요즘 한동안 집중하고 있는 집필에 힘쓰기 위해 작업실 자리에 앉았는데.
‘이게 또 이렇게 풀리네.’
<건곤무쌍>의 완결 이후 계속 붙잡고 있던 루덴 대륙의 최종 이야기를 다룬 시리즈.
최종 시리즈가 되는 만큼 예전과 달리 시작부터 암흑 속에 빠진 듯한 느낌으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 떠오르는 스토리는 있었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
그간의 여정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리즈다 보니, 만족하는 게 이렇게 어렵다.
하지만 이번 21세기 폭스 인수 건을 처리하면서 새롭게 떠오른 영감이 있었는데.
‘루퍼트 머독이 이렇게 또 도움이 되네.’
그의 모습을 보며 떠오른 내용이 하나 있었다.
이야기를 조금 전개해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루덴 대륙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에 좋아 보이는 내용으로 말이다.
‘모든 인간은 다 늙기 마련이지.’
영웅을 넘어 황제, 또 그걸 넘어 신과 같은 위치에 오르게 된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
하지만 신과 같을 뿐이지 신이 될 수는 없었다.
그의 초월적인 경지는 그저 그의 수명을 보통의 인간의 배로 늘려 주기만 했을 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에게도 끝이 있기 마련이었다.
‘물론 신이 되지 못할 뿐이지, 영생을 이룰 수는 있어.’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관.
원한다면 인간의 한계를 벗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이라면 결단코 택하지 않을 방법들.
‘모두 비인간적인 방법들이니까. 타인의 생명을 바쳐 이뤄 내거나, 말 그대로의 의미로 인간임을 포기해야 하지. 이런 걸 택한다면 그간의 캐릭터성을 해치는 모습일 거야.’
그런 반전의 모습에서 오는 재미도 있겠지만, 그거 조금 얻자고 지금까지의 근간을 흔들 수는 없었다.
독자나 관람객의 위치에서 작품들을 볼 때, 가장 싫었던 점이 바로 새로운 시리즈의 재미를 위해 희생되는 전작 주인공이나 캐릭터들의 모습 아닌가.
그걸 잘 알면서도 내가 그런 일을 내 손으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탁, 타다닥-!
첫 장면은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물론 그가 이번 작에서도 주인공이 되는 건 아니다.
소시민으로 태어나 영웅이 되었고, 나아가 영웅을 넘어 황제가 되었던 그의 이야기는 이미 끝이 났다.
보여 주고 싶은 것은 모두 보여 주었으니, 더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이번에 다룰 건 그가 이룩해 낸 제국을 물려받을 후계와 그리고 그의 사후 제국과 대륙에 벌어질 이야기.
당연하게도 주인공 또한 다른 이가 되어야 했다.
‘완벽에 가까운 주인공이었던 만큼 자신의 후계 또한 그런 이로 선정했겠지. 하지만… 대륙을 통일한 그만큼 완벽한 이가 다음 세대에 또 존재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한다.
그의 재능과 능력을 빼닮았다는 소리를 듣던 후계자.
그에게 모든 걸 물려줄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말년을 마무리 짓던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이었는데.
완벽하다 생각했던 후계자에게 한 가지 결점이 발견된다.
황제에게 있어서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크지 않은 결점이지만, 황제이기 이전에 영웅이었던 그로서는 결코 무시하기 힘든 결점.
‘후계자의 능력이 뛰어났던 만큼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걸 못 알아챘던 거야.’
그 결점을 덮어 두느냐, 아니면 꺼내 징치하느냐.
고뇌에 빠지게 된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어느 정도 작가를 닮기 마련인데.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그건 <마지막 마법사>의 초반 부분에서의 얘기였고.
소시민을 벗어나 영웅이 되고, 왕의 자리에 오르고 결국에는 대륙을 통일하기까지.
지금의 나보다 몇 배는 밀도 높은 수십 년을 보냈을 그는 나와는 사뭇 다른 이가 되어 있을 거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가 어떠한 선택을 내렸을지 아직은 결론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톡, 토독-
[나 - 위대한 군주들의 말년을 다룬 책들이 따로 있을까요?]
[나 - 책이 아니더라도 좋고요. 정리해서 자료를 보내 주세요.]
엘레나에게 보낸 문자.
관련된 자료를 여럿 읽어 보고 꽤 고심을 해야 지금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해결하지 않아도 됐다.
우선, 이번 작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으니.
‘제목은… <황혼의 기사>가 좋겠어.’
장면이 전환된다.
대륙의 최북단.
그곳에는 명예와 기사도를 중시하는 한 명의 기사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 기사가 주인공인 건 아니다.
그 기사를 따르는 종자… 즉, 요즘 말로는 기사 지망생.
‘어찌 되었든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의 죽음을 다뤄야 하는 시리즈야. <마지막 마법사>의 팬들에게는 아쉽고, 무거운 내용이 될 수밖에 없겠지. 그런 만큼 이번 작의 주인공은 유쾌하면서 재밌는 캐릭터인 게 더 좋지 않을까.’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영감 정도라고 생각해서 키보드를 잡았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샘솟는다.
이렇게 생생한 느낌이 들 때 빠르게 써야 하는 법.
타닥, 탁, 타다닥!
글이 막힐 때는 결국 이야기가 잘 풀리더라도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짜맞추는 기분.
하지만 지금처럼 글이 잘 나올 때는 정반대의 기분이다.
마치 이야기가 혼자 살아 숨 쉬고 나는 그걸 전달하는 것뿐인데, 신기하게도 내가 쓰고 싶은 그대로의 내용이 나오는 것.
‘이런 걸 보면 나도 천생 글쟁이란 말이지.’
이런 순간 때문에 내가 아직도 글 쓰는 걸 그만두지 않는 거였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투자 성공을 통해 드는 기분이 짜릿해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게 마음에 드는 글이 뽑혔을 때 드는 만족감이었다.
타닥!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머릿속에 가득하던 영감이 어느새 모두 끝을 보이고 글이 막힐 때쯤.
시간을 확인해 보니 그새 8시간이 넘게 지나 있었다.
꼬륵-
그와 함께 밀려드는 배고픔.
시간은 새벽 2시.
무얼 먹기에는 좋지 못한 시간대였지만 이대로 잠들기에는 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음, 혹시 요기할 게 좀 있을까요?”
며칠 전 런던에 와 루퍼트 머독을 만나고 한동안 켄싱턴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예, 셰프에게 얘기해 식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답해 주는 집사님.
‘새벽 2시인데도 셰프님이 아직 계셔?’
아무래도 집필에 빠져 있는 동안 혹시 몰라 집사님이 대기시켜 놓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올라온 야식.
웬만한 미슐랭 파인 다이닝 저리 가라 수준이었는데.
거기에 다 먹고 나면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분들이 와서 치워 주는 것까지.
‘음, 이럴 때 보면 역시…….’
돈이 좋긴 좋아.
4,000만 파운드짜리 집에서 전부 합치면 수백만 파운드가 넘는 연봉의 사용인들에게 시중받는 삶.
웹 소설 보면 이세계로 전생한 주인공이 귀족이나 왕족으로 전생해 시중받는 걸 ‘아, 이런 건 불편하니 이제 하지 마세요!’ 하곤 하던데.
내가 직접 그런 걸 체험하게 되니 알겠다.
모두 거짓말이다.
“안녕히 주무시길.”
내가 잠자리에 들자 자연스레 불을 끄고는 나가는 집사.
캬. 이 맛에 나 어릴 때 누나가 나 부려 먹었구나.
‘선우진! 일로 와 봐!’
‘왜?’
‘빨리! 급해! 진짜 급한 일!’
‘아… 뭔데?’
‘불, 불 좀 꺼라.’
‘……?’
언젠가의 대화가 떠오르는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