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참는 게 이기는 거다
구탁모 상무와의 통화.
“반갑습니다. 저희가 얘기 나누는 건 처음이죠?”
가벼운 인사로 시작했다.
박재용 부회장보다 10살 더 어린 구 상무다.
재계의 젊은 피들.
박재용 부회장부터 시작해 미래차의 장 부회장 그리고 지금 나와 통화하고 있는 구 상무까지.
아직은 다들 총수가 아니지만, 그룹의 후계자로 내정된 지 몇 년 된 이들이라 흔히들 젊은 총수 3인방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으음… 물론 예외적인 경우인 나는 뺐을 때의 얘기였다.
‘인연이 또 이렇게 되네.’
여기에 최원태 회장의 MK그룹을 끼면 재벌 4대 그룹이라 불린다.
재밌는 점은 내가 어쩌다 보니 그 네 명 모두하고 엮이게 됐는데, 각각 나하고의 관계가 다 다르다는 것.
한 명은 처음부터 쭉 좋은 관계, 다른 한 명은 사이가 나빴다가 (나한테만) 좋아져 버린 관계.
나머지 둘은 어떻게 될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구 상무가 박 부회장에게 굳이 내 연락처를 물어 이리 전화한 걸 보면 전자와 후자의 경우 사이쯤이 되지 않을까.
반면, 최원태 회장은 저 반대쪽일 테고.
통신 3사의 인터뷰가 처음 나온 곳이 MK였다는 건 재계에 소문이 쫙 퍼졌던 덕에 이미 알고 있었다.
[MK하이닉스, 엔비디아에 HBM2 공급 시작.]
[인텔과 협업 강화한 MK하이닉스, 오성 꺾고 메모리 시장 1위 노리나…….]
[고성능, 기업용 메모리 제품 매출 증가로 영업이익 20조 원 돌파될 것으로 예상되는 MK 하이닉스.]
뭐, 자신감을 가질 만하긴 했다.
MK텔레콤이 지닌 MK하이닉스의 지분이 23%, 거기에 국민연금의 것이 10%.
이번에는 정부가 내 편을 들었다지만, MK하이닉스만 한 기업의 M&A에서까지 내 편을 들어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최대한 막으려 들면 막으려 들었지.
지금도 부담스러운 체급인 내 국내 경제 영향력을 여기서 더 늘리고 싶어 할 정부는 없다.
게다가 반도체 쪽은 인수 합병이 제일 까다로운 분야라.
그저 미국에서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힌 국가 전부한테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 산업이었다.
자일링스처럼 FPGA 분야에 특화된 곳이라면 몰라도.
AMD를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내가 DRAM과 NAND 분야에서 1, 2위를 다투는 MK하이닉스까지 가지려 하는 건 당연 승인받지 못할 거다.
최원태 회장이 저렇게 나올 수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
아무튼.
“예, 잘 알죠. GL전자 제품은 저도 애용하고 있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구 상무와의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방금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던 게.
실제로 부모님이 사시는 본가까지 포함해 국내의 내 모든 집에 들어 있는 가전들은 GL전자 제품이 대부분이다.
그 탓에 언젠가 한번 꽤나 어색한 일이 벌어진 적 있었는데.
‘아이고. 귀한 곳에 이런 누추한 분이. 어서 들어오세요.’
오성과의 협력 관계가 더욱 강화되면서, 박재용 부회장을 내 집 중 하나에 초대해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친목 도모를 위한 식사였고.
사촌인 CM그룹의 박 회장(몇 달 전 회장이 됐다, 명예회장-회장 체제)도 함께 자리했었다.
즉, 범오성가의 재벌 둘을 집에 초대해 놓고 오성이 아니라 GL전자 가전으로 가득찬 집을 보여 줘 버린 것.
‘TV가… GL 거네요?’
‘어? 여기 냉장고도… 에어컨도 다 GL 제품인데?’
‘흠… 흠흠. 이거 참. 그래도 폰은 오성 겁니다.’
뒤늦게 스마트폰을 꺼내 보여 줘 봤지만, 사실 나는 애플과 오성의 제품을 둘 다 쓴다.
하나는 업무용, 하나는 개인용.
그 사실은 언론에서 여러 번 다뤘던 터라 당연히 박재용 부회장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뭐, 여튼 그렇게 어색한 식사 자리를 가졌었다는 거다.
‘가전은 GL이 맞긴 하지.’
OLED와 QD-LCD로 나뉜 TV를 제외하면, 정작 백색 가전 쪽의 실제 성능을 비교해 보면 오성이나 GL이나 별 큰 차이가 안 난다던데.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서 그런가.
나도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서 GL 거를 산 건 아니고, 모두 엄마의 취향이다.
나도 아직 기억하는…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썼던 10년 된 TV가 GL 제품이었다던데.
교체할 때까지 고장 한번 안 났었어서 다른 데는 몰라도 GL 가전은 믿을 만하다는 게 엄마의 생각이었다.
구 상무와 통화하게 된 김에 그럼 엄마 얘기를 해 줬는데.
[정말인가요? 음, 혹시 제가 나중에 이사장님께 따로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번에 저희 플래그십 라인업에서 신제품이 몇 개 나왔는데,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요.]
‘음. 이걸 바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남의 성의를 거절하면 섭섭하지.
원래 공짜 밥처럼 남이 사 준다는 건 거절하면 안 되는 법이다.
어차피 해 봐야 몇 푼 되지도 않을 거고.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엄청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그런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겠지?
전리품 계산은 원래 확실하게 해야 하는 법.
물론 가장 먼저 백기를 들었다는 점은 감안해 줄 수 있었다.
[신규 IoT 프로젝트를 포함해 GL그룹의 클라우드 컴퓨팅 파트너를 SCP로 교체하겠습니다.]
먼저 나서서 AWS와의 계약이 끝나는대로 클라우드를 SCP로 변경하겠다고 밝힌 구 상무.
거기에 IoT 관련해서도 AWS가 아닌 SCP를 적극 활용하겠다고 한다.
IoT 장치들 또한 생성하는 데이터 양이 어마어마했다.
특히 저번 셀립스키가 듣고 놀랐던 엣지 컴퓨팅과 관련된 기술이 IoT에서 유효하게 쓰일 수 있는데.
IoT라는 게 데이터는 많이 생성하지만, 정작 엔진 과열 등의 리포팅이 필요한 문제 발생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데이터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엣지(단말 또는 그 근처 서버)에서 먼저 데이터 분석을 통해 결과를 얻어 낸 후, 유용한 정보만을 클라우드로 전송하는 게 비용 절감 측면에서 훨씬 유리했다.
셀립스키가 말하길 엣지 컴퓨팅 관련 기술만큼은 SCP가 타 경쟁사보다 두 단계 정도는 앞서 있다고 했으니.
가전이 주가 되는 GL전자와의 시너지가 제대로 날 수밖에 없을 거다.
“SCP와의 계약을 후회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IoT 관련해서도 제가 가지고 있는 기술 스택들이 좀 많거든요. AWS가 보유한 기능은 저희도 대부분… 아니 오히려 뛰어난 부분도 있고요.”
[하하. 그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몇 달 전 실리콘밸리를 방문해 IoT 장치 연결성과 데이터 관리 및 스토리지를 연구하는 기업들을 살펴봤는데, 손을 안 댄 곳이 없으시더군요.]
구 상무 또한 단순히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제안한 거는 아닐 거다.
물론 항복기를 흔드는 상황이니 무리해서라도 기존 IDC에서 AWS로 전환해 나가던 걸 SCP로 급선회하는 거이기는 했다.
다만 그에게도 마냥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뜻.
‘여기서 만족하기엔 조금 애매하다는 소리이기도 하지.’
요즘 드는 생각인데.
내가 처음에는 작중 빌런이 전부였던 <찬탈자>의 빅터 3세를 어째서 <마지막 마법사>의 주인공만큼이나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성격이…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최근 쓰고 있는 소설은 선협물인 <건곤무쌍>과 <찬탈자>의 최종장인 4부였는데.
최종장인 만큼 <찬탈자>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다.
빅터 3세가 반더 왕국의 왕이 되기 바로 직전의 부분.
폐세자가 된 왕세자는 심복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고.
늙은 왕은 결국 빅터 3세가 다음 대의 왕임을 선포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아니 실권을 전부 잃은 현왕이었으니 반더 왕국에서만큼은 사실상의 만인지상이 된 빅터 3세.
하지만 대륙 전쟁을 일으킬 젊은 군주는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하는 법을 몰랐다.
하루라도 빨리 왕위에 올라 절대왕권을 통해 왕 이상의 존재가 되고자 했다.
지금 쓰는 파트가 딱 거기였는데.
‘그놈 참 욕심 많네.’
내가 쓰면서도 빅터 3세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욕심 많은 건 빅터 3세보다 내가 더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걸 보면 소설의 등장인물이란 작가를 투영한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았다.
‘GL… GL이 사실 내 입장에서는 별로 빼 먹을 게 없기는 한데…….’
반도체 웨이퍼 제조사인 실트론도 작년 그룹에서 분리해 MK에게 팔았고.
사실, 있다 해도 별 쓸모 없다.
디스플레이 정도는 살짝 탐나긴 하는데…….
그걸 내놓으라 하면 재계에서 성격 좋기로 소문난 구 상무도 ‘뭐 이 미친놈아?’ 하면서 싸우려 들겠지.
GL CNS도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사실 모든 면에서 이미 내가 갖고 있는 사업체들의 하위 호환이라 막 엄청 땡기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름 국내에서는 먹어 주는 SW 업체라 내주더라도 전부를 내주지는 않을 거다.
즉,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아쉬움을 완벽하게 달래 주려면 ‘그간 내 사업 영역과 겹치지 않고’, ‘내게 쓸모도 있으면서’, ‘GL에서도 내주는 데 별 아쉬움이 없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게 어디 없으려나……?
‘잠깐만.’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곳이 하나 있긴 했는데.
스읍.
이거 물어봐도 되나?
“…….”
[대표님?]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느라 말이 없던 나를 구 상무가 불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구 상무님께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어서 잠시 고민 좀 하느라고요. 실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예? 대체 어떤 거기에……? 그냥 편하게 말씀해 주시죠. 하하, SW그룹과 GL그룹은 앞으로 쭉 함께 갈 파트너 아니겠습니까.]
그룹 아닌데…….
뭐, 세간의 인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별 상관 없으려나.
여하튼.
구 상무가 저렇게 말하는 만큼 고민하지 않고 시원하게 한번 질러 보기로 했다.
“음. 제가 좀 생각을 해 봤는데요. GL전자 모바일 사업부가 몇 년째 쭉 위기이지 않습니까? 적자 폭도 점점 늘어나고 있고요.”
[…개선 중입니다. 이번 분기에 실제로 전 분기 대비 적자 폭을 개선하기도 했고요.]
“예? 어, 기사를 보니 올 한 분기 영업손실이 1,361억 원이라고… 아.”
저번 분기에는 더 심했다는 얘기구나.
진짜 돈 먹는 하마는 여기 있었네?
“흠흠. 그러시구나. 아, 제가 이 얘기를 왜 하는 거냐면요…….”
그 돈 먹는 하마랑 궁합 착 들어맞는 돈 주는 선우진이라고 있는데.
거 한번 합 좀 맞춰 봅시다.
“혹시 이참에 모바일 사업부를 파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특허 포함 통째로요.”
[…….]
“…아시다시피 제가 돈은 좀 많아서요. 가격은 잘 쳐드리겠습니다.”
구 상무가 당황한 건지 통화 너머로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길 잠깐.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선 대표님의 말씀은 웬만하면 전부 들어드리고 싶습니다만…….]
“예. 이해합니다.”
그렇게 결국 거절당한 내 제안.
뭐, 괜찮았다.
애초에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제안이었으니까.
이게 바로 무적의 방어기 ‘안 되면 말고’였다.
게다가…….
‘어차피 몇 년 안 남았지?’
알아서 GL전자에서 자체적으로 MC사업 본부를 철수하는 게 바로 몇 년 후였다.
그때가 오면 오늘의 대화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구 상무.
코로나 시기 전체적으로 힘들어질 GL그룹에 언제든지 붙잡을 수 있는 동아줄이 있다 생각하는 거로 충분했다.
‘탐나기는 한단 말이지.’
GL전자의 MC사업본부가 지닌 특허권 등의 지적재산권 그리고 핵심 인력들.
다른 건 몰라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GL전자의 핵심 기술들은 몇 년 후에도 여러 곳에서 쓰일 정도다.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그뿐이다.
딩연히 GL전자의 스마트폰 제품들을 말하는 건 아니다.
GL폰, 그러니까 인터넷 등에서는 GL이 아니라 GR을 붙여 지랄폰이라는 소리를 듣던 GL전자의 핸드폰은 다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무려 3년 반이나 GL폰을 쓴 당사자가 나였기 때문.
그리고 GL폰을 3년 반이나 썼다는 건 다른 의미로도 해석할 수도 있었다.
‘내가 그만큼 엄청난 인내심의 소유자라는 뜻이지.’
엄마가 내게 어릴 때부터 해 주신 말씀.
참는 게 이기는 거다.
몇 년 정도야 뭐.
할 일이 넘쳐나는 탓에 이것저것 하다 보면 금방일 거다.
‘그러면 MC사업 본부 말고…….’
* * *
[GL CNS, 지분 35% 매각을 위한 우선 협상자로 SW 인베스트먼트 논의 중.]
[그간 논란이었던 ‘일감 몰아주기’ 이슈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분 매각이라 밝혀… 하지만 어째서 SW 인베스트먼트인가, 사실상의 화해?]
[GL U+, SW텔레콤의 제4이통 출범 시 기존 LTE 망 대여해 줄 것으로 보여.]
[달라진 태도… 통신 3사가 아니라 오로지 GL만?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통신업계.]
돌아가기회귀도 잘하는 놈이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