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도 잘하는 놈이 잘한다-158화 (158/267)

158화 갑을 관계

짐 켈러 덕분에 리사 수와의 협상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원래부터 AMD와 인연이 깊었던 짐 켈러.

지금껏 있어 왔던 AMD의 전성기에는 모두 그가 함께했었는데.

이번에 AMD가 야심차게 준비한 Ryzen 시리즈 또한 그 시초에는 그가 있었을 정도였다.

“짐, 네가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Zen을 만지작거리는 건 더 이상 재미가 없다고 했잖아?”

“그랬지. 실제로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뭐… Mr. 선의 제안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서 말이야.”

테슬라와의 위약금을 대신 내 주고, 1년 연봉으로만 5,00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게 짐 켈러를 AMD로 다시 데려올 수 있던 이유는 아니었다.

위약금과 고연봉은 단순히 부가적인 이유였을 뿐.

“AI? 그쪽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응. 아직은 구상 단계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인터넷 그 자체보다 더 혁신적인 게 탄생할지도 몰라. 아, 물론 AMD의 칩 개발을 우선순위로 놓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그를 데려올 수 있던 가장 주요한 이유는 결국 내가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처음 내가 테슬라에서 근무하고 있던 그를 만났을 때만 해도 우리의 대화는 이러했다.

‘님… 내가 조만간 AMD 인수할 건데 오실?’

‘ㄴㄴ 라이젠 만지는 거 질렸음. 노잼…… ㅈㅅ’

‘돈 겁나 많이 드림. 테슬라서 얼마 받음? 그거 3배 주겠음.’

‘돈은 별로 필요 없는데…….’

흥미가 당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 영입 제안을 거절하던 짐 켈러.

3배가 아니라 5배의 연봉은 어떻겠냐고까지 했는데 그것도 안 먹히더라.

지금껏 100이면 100 다 통했던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돈’ 전략이 처음으로 통하지 않았던 것.

하지만 그러다가 우연찮게 대화가 내가 가진 사업체들로 흐르게 됐는데.

‘잠깐만. 님 이 기업 님 거임? Tenstorrent?’

예전 10억 달러 정도를 스트라이프 같은 핀테크 기업들부터 시작해서 메타버스, 인공지능, 배달 서비스, AI, 빅 데이터, 자율 주행 등등 유망해 보이는 기업들에 모조리 투자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사들였던 기업 중에 텐스토렌트라고 실사 영화를 생성할 수 있는 AI 칩과 딥 러닝 모델을 만드는 스타트업이 있었는데.

그 회사에 짐 켈러가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거다.

‘AI/ML용 칩과 RISC-V CPU를 엄청나게 많이 연결해서 딥 러닝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솔루션? 잠깐만, 혹시 이거 때문에 AMD를 인수하려는 거임?’

‘응……? 어… 그, 그렇지?’

사실 무슨 질문을 했던 건지 하나도 이해 못 했다.

어디까지나 내 본질은 소설가.

달리 말하면 문과 of 문과라는 뜻이다.

칩이 어떻고 CPU가 어떻고 딥 러닝이 어떻고 따위의 물음을 이해했을 리가.

하지만 오히려 문과 중 문과였던 나였기에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짐 켈러가 묻던 물음에 일단 예스라고 답하는 게 맞는 대답이라는 것을.

‘이미지 인식과 음성 처리 작업… 거기에 특정 인물의 실시간 비디오 인터페이스까지 포함시키면… 와우. 정말로 순식간에 실사보다 더 사실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겠군요? 잠깐만. 설마 당신이 몇 년 전에 스웜을 설립했을 때부터 이런 미래를 구상했던 건가요?’

‘…….’

‘진정한 소프트웨어 2.0… 그걸 꿈꾸는 거군요!’

그 이후로는 솔직히 대화가 어떻게 흘러간 건지 당사자였던 나도 잘 모르겠더라.

짐 켈러가 뭐라 뭐라 어려운 소리를 잔뜩 쏟아 내면서 나보고 맞냐고 물었고, 나는 눈치를 봐 가면서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줬다.

급기야 그는 내가 지금까지 투자한 수백 개의 사업체들(주로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의 목록을 쭉 훑어보더니, 내 의도를 알아서 추측해 내기에 이르렀다.

물론 사실 내 의도랄 거는 전혀 없고 그냥 미래에서 온 회귀자로서 돈 될 거 같아 보이는 기업들에 마구잡이로 투자한 것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짐 켈러의 합류는 그렇게 결정됐다.

“Mr. 선은 천재야. 나도 그렇고, 리사 자네도 천재 소리는 수도 없이 들어 왔지만… 진짜 천재는 Mr. 선 같은 사람이겠지. 5년도 더 전부터 이 모든 혁신을 생각하고 준비하다니… 그에 비하면 우리는 그냥 일개 엔지니어에 불과하다고. 하하.”

심지어 대체 어떤 콩깍지가 씐 건지 리사 수에게 나에 대해 저렇게 설명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음, 모르겠다.

언젠가 들통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차마 그런 게 아니라고 말 못 하겠다.

여하튼 간에.

“이대로라면 바이오스 최적화가 문제가 되겠는데? 같은 칩셋이라도 메인보드 제조사에 따라 성능이 달라질 수 있겠어.”

“사내에서도 이미 인식하고 있는 문제야. 하지만 기존 주주들이 급하게 출시하는 걸 원하던 탓에 어쩔 수 없었지. 물론… AMD의 새 주인의 생각에 따라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나를 바라보는 리사 수와 짐 켈러.

아까까지는 서로 각종 전문 용어를 남발하며 어려운 얘기를 하던 탓에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대충 지금 출시하면 Ryzen에 몇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출시를 미뤄 달라 이거지?’

원래 Zen의 첫 출시로 예정되어 있던 게 올해 3월.

기존 주주들과 달리 나는 AMD의 현 부채 상황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니 급하게 출시할 필요가 없었다.

“원하시는 대로 관련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출시하는 걸로 하죠. Ryzen 시리즈의 첫 출발인 만큼 최대한 완벽에 가까웠으면 좋겠으니까요.”

“좋아요. 그래도 출시가 엄청 늦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길어 봐야 두세 달 정도?”

어차피 지금 당장 급한 건 CPU 판매가 아닌 채굴에 쓰이는 GPU였다.

그렇기에 나는 리사 수에게 한 가지 특별 요청을 했는데.

“그 대신 한동안은 그래픽 카드 생산에 집중하도록 하죠. 그리고 그래픽 출력 단자가 없는 대신 연산 성능에 집중한 그래픽 칩셋을 출시하고 싶은데요. 가능할까요?”

“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래픽 출력이 안 되는 그래픽 카드를 왜?”

팥 없는 팥빵을 만들자는 말과도 같은 거였기에 리사 수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하지만 조만간 팥 없는 팥빵을 엄청나게 원하는 수요가 생길 예정이었다.

일명 채굴용 그래픽 카드.

Ryzen을 통한 매출을 한동안 미뤄야 한다면, 다른 거로 돈을 벌면 됐다.

* * *

며칠 후, 대미 외국인 투자 위원회의 발표가 있었다.

[CIFUS, 퓨쳐 인베스트먼트의 AMD 인수 승인.]

[총액 120억 달러 내외로 추정. 일부에서는 사실상 외국인인 선우진이 AMD의 주인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존재.]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 선우진이 갖고 있는 퓨쳐 인베스트먼트의 지분은 고작 15%에 불과. 미국 투자기관 등 미국 투자자들의 비율은 35%가 넘는다. 외국 회사라고 보는 건 이상해.]

[퓨쳐 인베스트먼트의 CEO로 취임한 한국계 미국인 제이슨 최, “특정 국가를 위해 퓨쳐 인베스트먼트의 자금이 운용되는 일은 없을 것. 우리는 뱅가드그룹과 블랙록 이상의 범세계적 자산 운용사를 노리고 있다.”고 밝혀.]

우우우웅-

뉴스가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을 수 있었다.

[허… 축하드립니다, 대표님.]

“아! 오랜만입니다, 부회장님.”

바로 오성의 박재용 부회장.

사실 저번 만남 이후로 처음 가지는 통화는 아니었는데.

미래차 사건이 있던 이후로 짧게 통화를 했던 적이 있었다.

말로는 오성전자에서 맡기로 한 데이터 센터의 건설에 필요한 반도체 수량 때문에 한 전화였다지만, 아마 사실상 미래차를 쥐고 흔들 수 있게 된 내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거였을 거다.

그리고 이번 전화의 목적은…….

‘내가 파운드리 시장에 끼어드려는 건지가 궁금하겠지.’

AMD는 팹리스(설계)에만 중점을 둔 회사.

파운드리(수탁 생산) 업체인 오성과는 정반대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AMD가 과거에도 설계만 하던 회사인 건 아니었는데.

한때는 AMD도 자체적인 팹리스 제조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글로벌파운드리, AMD의 오랜 자금난으로 아부다비 왕가에게 넘어간 반도체 위탁 생산 전문 회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AMD가 내 것이 된 지금.

자금난으로 공장을 팔아 넘겨야 했던 AMD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 마음만 먹는다면 파운드리 회사를 인수해 오성그룹 이상의 연구비를 투자할 수 있는 회사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오성전자는 TSMC에 이어서 새로운 거대 경쟁사를 맞이하게 되는 건데.

박재용 부회장으로서는 결코 바라지 않는 상황일 거다.

‘뭐…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본심을 말하자면 나는 파운드리 시장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이미 벌인 사업이 너무나도 많았고, 제조업 회사를 꺼리는 내 성향 때문도 있었다.

특히나 반도체 파운드리 쪽은 엄청난 돈을 연구비로 퍼붓고도 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내 미래 지식이 통하지 않는 쪽이었다.

내가 반도체 파운드리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앞으로 TSMC와 오성이 투 톱 체제로 세계 시장을 먹는다는 거였는데.

반쯤 대만 공기업이나 마찬가지인 TSMC를 내가 가져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오성전자를 사들일 수도 없고, 그냥 순전히 맨땅에 헤딩해서 그 두 회사와 경쟁해야 한다는 건데.

굳이 내가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투자할 돈으로 사들이거나 확장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수익률도 비교할 수 없이 높을 거고 말이다.

“제가 팹리스 산업에 끼어든 만큼, 오성과는 더 긴밀한 협력 관계가 될 수도 있겠네요.”

[아……! 예, 그렇죠.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 생각을 숨기지 않고 밝혔다.

그러자 통화 너머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게 밝아지는 박재용 부회장의 기색.

사실 나는 미래차와는 달리 오성과는 그리 대립할 생각이 없었다.

우선 자기 주제를 모르던 미래차와는 다르다는 점이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내 사업 분야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던 미래차와는 달리 오성과는 이래저래 엮일 일이 많다는 게 그 두 번째 이유였다.

“조만간 AMD의 야심작인 Ryzen 시리즈 발표가 있을 겁니다. 1세대인 만큼 14nm에 불과하지만… 한 3세대쯤 가면 7nm 나노 공정이 필요하겠죠.”

몇 년 후에라도 7나노 공정을 양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회사는 전 세계에 두 곳뿐이다.

TSMC와 오성전자.

“그리고 저번에 말씀드린 클라우드 컴퓨팅에 들어가는 반도체 수량도 만만치 않죠. 하하.”

게다가 클라우드 컴퓨팅으로 인해 엄청나게 늘어날 반도체 수요에서 그만한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회사 또한 저 두 곳뿐이다.

내가 자체적으로 파운드리 회사를 차릴 생각이 아니기에 앞으로 내가 반도체를 맡길 회사는 TSMC와 오성전자 중 한 곳이 될 거라는 소리인데.

파운드리 업체의 특성상 수주량이 늘어날수록 그만큼 공급 단가가 떨어지고, 단가가 떨어지는 만큼 고객 유치도 더욱 수월해지고, 추후 개발비용 확보까지 수월해진다.

나만 한 고객을 유치하는 게 단순한 매출 증가 이상의 효과가 있다는 뜻.

내가 굳이 오성과 대립할 이유가 없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하. 현재 미국에 계신 거죠? 제가 조만간 미국에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요즘은 제가 좀 바빠서요. 어디 보자… 한 2주 후? 그 정도면 시간이 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오성그룹으로서는 내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수도 없이 많았고.

내게는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달리 말하면, 앞으로 최소 수십 년.

오성전자가 정말로 외계인을 납치해 와 기술력을 빼내 TSMC와 10년 이상의 기술력 차이를 내지 않는 이상…….

[물론입니다. 그러면 다다음 주에 뵙는 거로 하시죠. 하하. 비서실 통해 장소 알려 주시면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오묘한 갑을 관계가 앞으로도 쭉, 계속될 거라는 뜻.

굳이 목줄을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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